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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으로 언론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고 때로 사실이 왜곡될 때 그 실체와 원인들을 폭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언론에 대한 이러한 생각은 이상에 지나지 않고 대부분의 언론들은 자신들의 지지 기반이나 이해 관계에 따라 나름의 당파적이거나 이해타산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

 

문제는 보통 사람들이 언론을 접하면서 일정 정도는 언론의 당파성에 대해 의심을 품기는 하지만 여전히 언론이 '사실 보도'를 할 것이란 기대를 접지 않고 언론 보도를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그런 이유로 어떤 언론을 접하느냐에 따라 정치적 견해를 달리 할 뿐 아니라 때로는 일반적인 경제적 선택까지도 크게 영향을 받는다. 그 영향력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것으로써 우리의 고정관념까지 뒤집는 탁월함을 발휘하기도 한다.

 

우린 왜 빚에 대해 무방비 상태가 돼버렸나

 

지난 몇 년간 우리는 일부 언론을 통해 빚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었다. 바로 다음과 같은 제목의 기사들이 우리의 고정관념을 바꾸고 좀 더 과감하게 빚을 내어 쓰라고 용기를 주었다.

 

빚, 피할 수 없다면 현명하게...좋은 빚, 나쁜 빚 - <머니투데이> 2008. 3. 14

[새내기 부자되기] '좋은 빚' 활용해 수익률 높여라 - <한국경제> 2006. 4. 12

좋은 빚, 나쁜 빚? - <조선일보> 2006. 5. 1

빚은 나쁘다? 저금리 시대, 잘 활용하면 藥  - <한국경제> 2009. 2. 11

빚을 얻을 수 있는 것도 자산 - <머니투데이> 2005. 11. 21

자산관리 무료 순회강연 "빚도 관리하면 자산 됩니다" -  <이코노믹리뷰> 2007. 3. 9

[생애재무설계 A to Z] (9) 잘 얻은 빚은 재산이다 - <한국경제> 2006. 4. 5

 

우리는 언제부터 빚에 대해 이토록 무방비 상태가 되었을까? '빚은 소도 잡아먹는다'라는 속담을 믿고 살던 때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빚이 만들어 내는 해악에 대해 우리는 새까맣게 잊고 있다. 위 기사 제목에서부터 느껴지듯이 특집기획까지 해 가면서 빚에 대한 새로운 선동을 해주는 언론들 덕에 우리는 지금 가계 부채 1000조 시대를 열게 되었다.

 

때로는 냉철하게 빚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벗겨내도록 논리를 제시하고, 때로는 우리의 눈이 흥분에 취할 만큼의 신세계를 보여주기도 했다. 어느새 빚이 하나의 일상으로 자리 잡게 된 지금, 거슬러 올라가 생각해보면 실시간으로 포위되어 감성과 상식이 재구성되는 시간을 살았다. 언론의 치밀하고 집요한 노력의 결과물이다.

 

특히 언론들은 부동산 가격이 본격적으로 상승하기 시작하던 때부터 연일 빚에 대한 새로운 인식체계를 제시했다. 일명 '좋은 빚'이라는 이름으로 빚 자체를 조건과 상황에 따라 구별 짓는 작업을 했다. 우리 의식속에 선을 그어 놓고 선과 악으로 구분한다. 원래 한 몸이었던 빚이 '좋은 빚'과 '나쁜 빚'으로 이등분된다. 기사들 속에 등장하는 좋은 빚은 주로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켜줄 지렛대로 비유된다.

 

'융자나 신용을 통해 타인의 자본을 지렛대로 삼아 자기자본의 수익률을 높이는 기법이다. 쉽게 말해 빚을 통한 투자를 말한다. 아파트 담보 대출이나 모기지론 등 융자를 받아 부동산을 구입하거나 주식시장에서 신용을 쓰는 경우도 선물시장의 증거금 제도 등이 모두 레버리지에 해당한다. 레버리지의 효과는 대단하다. 잘만 이용한다면 10억으로 가는 길에 '터보엔진'이 될 수 있다.' - <한국경제> 2006년 4월 12일자 '좋은 빚 활용해 수익률 높여라' 중

 

빚에도 '좋은 빚'과 '나쁜 빚'이 있다는 언론

 

반면 나쁜 빚은 소비하기 위해 빌리는 돈이라고 설명한다. 신용카드로 원피스, 구두 등을 충동구매하는 것은 나쁜 빚이라 정의 내린다. 물론 이러한 분류가 경쟁적으로 신용카드 발급 영업을 하는 카드사에겐 불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언론사들은 카드사들의 여러 마케팅 전략을 대행해줌으로써 카드사로부터의 불평을 차단한다(이 부분에 대해서는 차후 신용카드에 대한 언론의 태도를 집으면서 살펴보도록 하자).

 

여기서 질문을 던져 보자. 학업을 마치기 위해 쓰는 학자금 대출 등이 어떤 빚으로 분류될까? 앞서도 지적했듯이 학자금 대출로 인해 졸업과 동시에 사회 생활 시작부터 빚을 안고 가야 하는 사회 새내기들의 고통을 감안한다면 과연 그것은 좋은 빚일까, 나쁜 빚일까? 한 기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좋은 빚'이란다. 아마 그것 또 한 미래를 위한 자기 투자의 영역으로 분류되면서 좋은 빚의 항목으로 입력될 자격을 얻은 듯하다.

 

이렇게 빚에 대한 친절한 분류는 빚에 대한 기존의 경계심을 '꼭 그렇게까지'라며 느슨하게 풀어놓게 만든다. 빚을 멀리하라던 어른들의 교훈은 낡은 것이 되고 저금리의 빚이 가져다 줄지 모를 횡재에 한 발짝 다가서게 만든다. 물론 여전히 조심스런 발걸음이다. 행여나 나쁜 빚이 줄서 있는 선에 닿을까봐 좋은 빚으로 다가갈 온갖 방법들을 찾게 된다. 사람들의 욕구를 알아챈 언론은 이번에는 좀 더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한다.

 

[재테크 특집] 지혜로운 빚테크 - <동아일보> 2006. 6. 27

빚더미 서민도 2억 주택구매 가능?... 똑똑한 '빚테크' 노하우 - < SBS > 2011. 10. 11

꽉 막힌 은행대출 '빚테크'로 뚫는다 - <조선일보> 2011. 8. 25

<재테크> 대출규제 범람...'빚테크' 관심 - <연합뉴스> 2007. 2. 22

부자들은 돈 벌기 위해 빚진다 - <부산일보> 2011. 5. 17

 

제목만 보면 말 그대로 빚지는 데에도 특별한 능력과 정보가 필요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 내용을 들여다 보면 대부분 뻔한 내용을 담고 있다. 결론은 낮은 이자의 빚을 찾으라는 것이다. 은행간 금리를 꼼꼼히 비교한 후 조금이라도 더 저렴한 곳을 찾으라는 이야기이다. 낮은 이자율을 선택하라는 말은 뻔한 내용이라 특별한 정보라고 할 것도 없다. 그러한 사실을 누가 모르겠는가? 다만 이자율을 선택할 자유가 보통 사람에게 존재하지 않다는 게 문제가 아닌가.

 

물론 신용등급이 좋고 처음으로 빚을 내는 입장이라면 단 1%라도 더 싼 금리를 제시하는 은행을 찾는 것은 필요할지 모르겠다. 보통 사람들의 경우, 이자율을 따져 보거나 비교해 보지도 않고 은행에서 돈을 빌려준다는 사실에 고마워하며 덥석 사인부터 하는 경우가 많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나름 유용한 정보일 수 있다. 그러나 기사를 꼼꼼히 살펴보면 돈 빌리는 대단한 비법이 강조되기보다는 좋은 빚의 기가막힌 활약을 소개하는 것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로버트 기요사키의 달콤한 성공담을 믿지 마라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의 저자 로버트 기요사키는 '부채가 자신을 위해 일하도록 하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빚을 이용해 생애 첫 부동산 투자를 한 경험담을 소개했다.

 

그는 1974년 유명한 휴양지에 있는 콘도를 구입했다. 돈이 없었던 그는 신용카드를 이용해 10%의 계약금을 걸고 나머지는 은행 빚으로 해결했다. 100% 빚으로 샀지만 이자 비용보다 임대료가 높아 매달 20달러가 현금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는 1년 뒤 그 콘도를 되팔아 3만 달러의 수익을 올렸다.

 

아마 일부 독자들은 이 글을 접하면서 순간 혼란스러움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앞서 소개한 기사의 한 대목 '10억으로 가는 터보 엔진'까지는 '지나친 과장 아닌가'하고 실소했던 독자들이라도 기요사키의 횡재 경험담을 듣고는 순간 마음이 흔들렸을 수도 있을 것이다.

 

100% 은행돈으로 산 집에서 이자 수입보다 더 큰 월세를 챙기고도 1년 뒤 매입 자금에 두 배 가까운 차익까지 챙겼다니, 입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일들은 초기 자산 시장의 거품기에 분명히 일어나기도 했다. 그러나 기요사키가 이런 식의 횡재 경험담을 책으로 펴낼 때 쯤엔 수익률이 이전만 못한 상황일 수밖에 없다. 은행이자보다 높은 월세를 챙길 수 있는 부동산이 가능하다는 소문은 그 자체로 부동산 시장의 가격을 끌어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먼저 투자를 시작한 기요사키와 같은 소수에게 기요사키의 성공담은 자신이 싼값에 구매한 투자 물건을 비싸게 넘길 '뒤늦은 투자자'를 확보하기에 좋은 먹잇감이다. 그러나 뒤늦은 투자자들은 자신의 물건을 더 비싸게 넘길 '더 늦은 투자자'를 구하기 어려워 진다. '나도 기요사키처럼'이란 환각제를 맞은 상태에서 이미 오를 대로 오른 자산에 투자해 봤자 부채 규모가 커서 월세로 감당키 어려울 수밖에 없다. 또 월세에 대한 달콤한 이점이 사라지고 난 후엔 새로운 투자자를 찾기가 쉽지 않다.

 

우리 상식까지 바꿔버린 재테크 성공담들

 

사실 평범한 사람들의 귀에 들려오는 횡재 성공담은 이미 자산 시장의 수익이 꼭지점에 도달했음을 알려주는 신호다. 그 성공담에 취해 자산투자의 배에 올라탔다면 경제사학자 찰스 킨들버거의 말처럼 '나보다 더한 바보가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가진 것이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서글픈 착각을 자주 한다. 평범한 보통 사람들이란 언제나 돈 앞에서 바보가 되기 싶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언제 어떻게 직장에서 밀려날지 모를 위협에 직면해 있거나 1년 단위로 자신의 노동력이 팔릴지 안 팔릴지를 걱정해야 하는 불안에 갇혀 있는 사람들, 또 큰 마음 먹고 모든 자산을 털어 작은 가게를 열었지만 인근 대형 마트에 손님을 빼앗기고 하루 하루 투자한 돈을 까먹고 있는 자영업자와 그마저도 시도해볼 수 없는 실업자, 학자금 대출까지 끼고 졸업했으나 이력서를 수십 장 뿌려도 연락 한 통 오지 않는 청년 실업자들까지. 과연 지금의 대한민국 국민 중 돈 앞에서 나약한 바보가 되지 않을 사람이 몇 이나 될까.

 

언론은 평범한 사람들의 서글픈 처지가 어디에서 비롯되었으며 무엇이 문제고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지를 밝혀내는 데 좀 더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러나 오히려 사람들의 나약한 감성을 파고 들어 그들의 '빚의 길'로 인도했다. 여기서 소개된 기사들만이 문제였겠는가. 하루가 멀다하고 포털사이트 메인화면을 장식하는 재테크 성공담들은 우리의 상식까지 근본적으로 바꿔버렸다.

 

대다수 사람들이 '돈이 돈을 번다'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당장 자신의 주머니와 통장에 들어있는 돈이 얼마나 무능한지, 자신이 얼마나 무기력한지 매순간 자각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더 큰 문제는 언론들이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는 데 있다.

 

이제 우리는 언론을 통해 전해들은 '일부의 사실'을 '유용한 정보'로 오인하면서 점점 빚에 대해 빗장을 풀기 시작한다.

 

* 다음 편에 이어서 연재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사회적기업 에듀머니 www.edu-money.co.kr에도 게재됩니다.


태그:#채무자, #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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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계부채가 심각한 수준으로 악화되고 있다. 짧은 기간 동안 금리가 급격히 상승하면서 가계발 금융부실이 크게 우려된다. 채무자 보호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현실은 수많은 채무자들을 빚독촉의 고통으로 내몰고 있다. 채무자들 스스로도 이제 국가를 향해 의무만 강요받는 것이 아니라, 권리를 보호받을 수 있는 목소리를 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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