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대학입학시험인 예비고사를 치뤘습니다. 성적이 나빠 나는 제대로 갈 학교가 없었습니다. 겨우 전문대학에 붙었지만 고등학교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은 모두 이대랑 숙대며 모두 명문대학에 입학을 했고 나만이 전문대를 진학하게 된 것입니다.

 

건물도 전공도 전혀 나와는 맞지 않은 대학을 나는 다니는 둥 마는 둥 하면서 고등학교 시절처럼 지겨워하며 학교와 집을 오갔고 아무런 비전도 없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입학을 하고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그때는 하루해가 1년 보다 길게 느껴지던 때라 나는 날짜 같은 걸 세지 않고 지냈습니다.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나와 계단을 내려오는데 갑자기 무릎이 푹 꺾이면서 나는 계단 아래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아이들이 몰려와 책을 주워 주며 나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다행히 상처는 없었고 나는 다만 창피하다는 생각을 하며 책을 들고 걷기 시작하는데 무릎만 구부리면 고꾸라지는 것이었습니다.

 

버스에서 내릴 때도 무릎이 그렇다는 걸 깜박 잊고 오른쪽 다리를 땅에 디뎠는데 그대로 버스 옆으로 나동그라져 버렸습니다. 운전기사가 잠시 내다보았지만 내가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서자 버스는 그대로 떠났고 소아마비처럼 나는 다리를 돌려가며 한 발에 의지한채 절룩거리며 집으로 왔습니다.

 

 

그날부터 7일간 오른쪽 다리에 고통이 왔습니다. 톱으로 다리를 썰어내는 듯 다리가 저리고 뭉근한 무게감이 내 다리를 짓누르는 고통이었습니다. 진통제를 한 시간에 네 알씩 먹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언니는 내 다리를 주무르며 기도를 했습니다.

 

"우리 학현이 아픈 거 모두 빠져 나가게 해주세요. 하느님!"

 

나는 일주일을 거의 낮이나 밤이나 잠들지 못한 채 보내었고 일주일이 지나자 거짓말처럼 통증이 멎었습니다. 그런데 내 다리를 보니 오른쪽 다리의 근육이 모두 빠져 왼쪽 다리하고 굵기가 현저한 차이를 드러내었습니다. 나는 끈으로 다리를 감았다가 자에 대보았습니다. 왼쪽 다리와 오른쪽 다리가 7센티미터나 차이가 났고 오른쪽 다리는 갑자기 바싹 말라 있었습니다.

 

고통은 멎었지만 나는 두 다리로 온전히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학교는 다니고 싶지도 않아서 자퇴를 해버렸습니다. 그리고 온 가족이 매달려 내 다리를 치료하는데 전념을 했습니다. 엄마는 고양이를 한 마리 사다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 고양이의 가죽을 벗기고 밤껍질을 넣어 푹 고아서 나에게 그것을 먹도록 했습니다. 누군가가 좋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내 다리는 그런 민간요법으로 나을 병이 아니었습니다. 감각은 있었습니다. 송곳으로 찌르면 아픔이 느껴졌으니 감각을 잃은 것은 아니었지만 밖으로 보여지는 병의 형태는 소아마비와 똑같았습니다. 

 

경희대의료원, 세브란스병원, 서울대병원...모두 가보았지만 모두들 고개를 저으며 병명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사람들을 붙잡고 "다 키운 자식 병신 되면 우짤꼬."를 외치며 어떻게든 내 병을 고쳐주려고 사방팔방으로 알아보고 다니다가 한 날은 정신을 깜빡 잊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 생각나지 않아 이웃 사람이 엄마를 집으로 데리고 온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엄마는 친하게 지내고 있던 교수부인 아줌마에게서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 남편 얼굴이 돌아가고 한쪽 사지도 다 돌아가서 경희대 의료원에 갔다가 7일만에 누워서 나온 걸 그 양반이 고쳐 줬다니까."

"누가요? 그 사람 누구예요?"

"한의사인데 면허증은 없어. 아버지한테 한의학을 배운 사람이고 나이를 먹었으니 시험을 칠 수가 없어서 무면허 의사지 뭐."

"무면허 한의사라구요?"

"아 무면허면 어때 내 남편이 멀쩡하게 나아서 걸어다니는데 그게 그 사람 실력이지. 면허증이 있어야 꼭 실력 있는 의사야 사람 병만 낫게 하면 그게 최고지."

 

그리고 다음날 그 한의사가 왔습니다. 자주색 빌로드 자켓에 하얀 바지를 입은 모습이 어째 신뢰가 가지 않는 인상이었습니다. 한의사는 엄마한테 말했습니다.

 

"내 치료를 받으려면 세가지를 지켜야 합니다. 첫째는 나를 믿어야 하고, 둘째는 환자가 내 치료를 이겨내야 하고, 셋째는 돈이 있어야 합니다."

"얘만 고쳐주면 못할 게 뭐 있겠어요. 선생님 부탁해요 제발 얘 좀 낫게 해주세요."

 

엄마는 머리를 조아리고 한의사는 내 다리 상태를 찬찬히 살펴보더니 말했습니다.

 

"조금만 늦었어도 영원히 못 걸을 뻔 했네요. 아마 석달 정도는 치료해야 될 것 같습니다. 보름이 지나면 무릎이 구부러져도 넘어지지 않고 한 달이 되면 조금씩 걸을 수도 있습니다. 다만 근육이 돌아오려면 몇 년 아니 평생 오른쪽 다리 운동을 해주어야 합니다."

 

그는 첫 인상과 달리 내 다리를 고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태도가 아주 신중해 보였고 자신을 믿어야한다는 말에 왠지 신뢰가 갔습니다. 그리고 치료가 시작되었습니다.

 

처음 3일간은 등과 허리 엉덩이 무릎 복사뼈 쪽에 가는 순금침을 잘라 몸 속으로 집어넣는 치료를 했고 이 치료는 견딜만 했습니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손으로 쑥을 말아 등에서부터 복사뼈 있는 데까지 130여 군데에 쑥을 모두 올려놓고 불을 붙이면 나는 벼게를 꼭 껴안고 이를 악물었습니다. 온 몸이 타는 것 같았고 방안은 쑥뜸 연기로 자욱했습니다. 나는 처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사실 당시는 성당에도 다니지 않았고 기도는 거의 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주여 당신의 손길로 이 사람을 통해 내 다리가 낫게 하여 주옵소서.'

 

나는 주문처럼 이 기도를 석달동안 치료를 받을 때마다 했습니다. 낮에는 타는 듯한 고통 으로 온 몸에 너무 힘을 주어서 밤이면 손목이며 발목, 온 몸에 열이 나며 몸살이 나서 잠을 자지 못했기 때문에 47킬로그램이던 내 몸무게가 42킬로그램으로 떨어졌고 밥도 목에 잘 넘어가지 못하고 걸릴 정도로 힘이 없었습니다.

 

쑥뜸이 끝나면 이제는 들통 가득 물을 붓고 엄마가 야외용 가스렌지를 방으로 들고 들어와서 준비가 끝나면 한의사는 펄펄 끓는 물속에 몇 개의 수건을 넣었다가 짜서 그 뜨거운 물수건으로 쑥뜸 자리에 올려놓고 주무르며 물리치료를 합니다. 그러면 밤새 조금 꾸들꾸들해졌던 쑥뜸 자리는 빨간 생살이 나도록 껍질이 떨어져 나가고 이 또한 살갖이 벗겨지는 고통이었습니다. 그러고 나면 이번에는 침을 놓았습니다. 한의사는 입담도 좋아서 나를 치료할 때 자기가 자랄 때 얘기며 이사람 저사람 치료해 준 얘기를 재미있게 했는데 그 날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이게 침 놓는 게 그 자리에 놓는다고 다 똑같은 자리가 아닙니다. 털구멍처럼 아주 작은 모공만 차이가 나도 치료가 되질 않아요. 정확히 제 혈자리에 침을 놓아야 효과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석달이 지나자 한의사 말대로 나는 무릎을 구부려도 넘어지지 않았지만 아직은 뻐정다리로 걷는 단계였습니다. 한의사의 치료는 끝났고 이번에도 엄마는 당시로는 꽤 컸던 돈을 빚을 내서 한의사에게 건네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내 몫이었습니다. 많은 운동을 해서 내 다리가 다시 정상으로 돌아오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때는 나의 전부였습니다.

 

나는 책을 읽으며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저 평범하게 살아도 좋으니 건강하게만 살고 싶다는 게 당시 내 바람이었습니다. 그때 엄마가 아니었다면 나는 영영 소아마비로 살아가야 했을 겁니다. 나는 오랜 기간 동안 엄마에게 진저리를 쳤지만 엄마가 아니었다면 누가 그렇게 정신을 잃고 길을 헤맬 정도로 나를 지켜 주었을까요. 지금도 그때도 엄마가 고맙습니다.

덧붙이는 글 |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태그:#고장난 다리, #연재동화, #최초의 거짓말, #학현이, #장다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