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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라는 게 어른들한테만 존재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유년기에도 십대 때도 이십대 삼십대...사랑의 감정은 형태만 다를 뿐 늘 나이와 상관없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나는 승희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십대 때이니 당연히 우정이라고 해야 하는 게 옳겠지만 그때 우린 분명히 우정이 아닌 연애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승희는 전교회장이었습니다. 가을이었을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내가 다니던 학교의 음악실은 본관에서 밖이 훤하게 보이는 개방식 복도를 지나서 가는 별관에 있었습니다. 나는 그 복도 아래 있었고 승희는 그 복도에 서 있다가 복도에 떨어진 낙엽을 주워드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리고 한 순간에 승희란 아이가 내 가슴 속으로 파고 들어왔습니다. 승희는 전교회장이었기 때문에 몇 반인지 물어 승희를 찾아갔습니다.

"나 학현이라고 하는데 너랑 알고 지내고 싶어."
"나는 승희야. 그런데 나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어?"
"넌 전교회장이니 당연히 알지."
"전교회장이어서 나랑 사귀고 싶다는 거니?"
"아니. 널 복도에서 봤어 그리고..."
"알았어 친하게 지내자."

승희와의 첫 만남은 이렇게 짧았습니다. 그때는 교련시간이라는 것도 있었고 학도호국단이라는 게 있어서 키 큰 아이들은 앞에 서고 키가 작은 아이들은 뒤에 서서 정렬을 하고 깃발을 든 아이들은 맨 앞에 서서 교단 앞을 지나 운동장을 한바퀴 돌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있었습니다. 교단 앞을 지날 때면 연대장은 교단 앞에서 크게 소리쳐 외쳤습니다.

"모두 경롓!"

그러면 전교생들은 경례를 붙인채 교단 앞을 지나갔고 연대장 옆에는 회장인 승희가 서 있었고 교장선생님은 교단에 선생님들은 교단 옆에 일렬로 서 있었습니다. 나는 뒷줄에 서서 경례를 붙이며 교단 앞을 지나가는 게 싫었습니다. 승희 때문이 아니라 이따위 것들을 뭐하러 하나 싶은 구속감과 뒷줄에 서서 쫄병처럼 쫓아가는 것도 내 열등감을 자극했습니다.

나는 쉬는 시간이면 승희를 찾아가 승희와 잠깐이라도 시간을 보내고 종이 울리면 다시 교실로 향했습니다. 승희는 키가 컸고 여러 남매 중 맏이였고 말소리는 묵직했습니다. 나는 그런 승희에게서 남자아이한테나 느껴야 할 감정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렇다쳐도 승희는 어째서 나와 같은 감정에 빠졌을까요. 아마 학교에서 받는 스트레스와 우울감이 소녀들끼리의 연애라는 출구를 마련한 것일까요. 승희네 가정은 평범했습니다. 다만 부자는 아니었고 엄마와 아버지가 모두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나는 여자가 남자의 옷을 다려 주듯 승희네 집에 찾아가 승희의 교복카라를 떼어내 빨아서 풀을 매겨 준 적도 있습니다. 밤에도 그 애가 보고 싶어 경인선 기차에서 1호선 전철로 바뀐 전철를 타고 밤 늦게 승희를 찾아가 거기서 자고 학교로 가는 날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승희와 나는 둘도 없이 친하게 지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소녀들의 연애감정
 소녀들의 연애감정
ⓒ 장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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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희수가 문제였습니다. 이상하게도 1학년 때도 한반이었고 3학년 때도 한반이 된 희수도 나를 우정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승희와만 어울려 다니는 내게 희수는 말했습니다.

"나, 너 너무도 좋아해 그런데 왜 요즘 나랑 어울리지 않는거니?"
"난 너에 대한 우정 변함 없어."
"아니야 넌 달라졌어. 요즘 전교회장이라는 아이랑만 어울려 다니잖아."
"나 승희랑 친해. 하지만 너랑도 친한 거 너도 잘 알잖아."

쉬는 시간이 지나 수업시간이 됐는데도 희수는 내 옆에 쪼그리고 앉아 계속 하소연을 했습니다. 선생님이 제자리로 돌아가라고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이런 희수한테 내가 할 말은 별로 없었습니다.

희수는 집으로까지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내 일기장에 쓰인 희수에 대한 감정 승희에 대한 내 감정을 적은 글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며칠 후 희수는 갑자기 하혈을 하기 시작해 한달이나 학교를 쉬어야 했습니다. 나중에야 희수에게서 내 일기를 읽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나는 병문안을 갈 때도 희수가 내 일기를 읽었다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승희와 함께였습니다. 그게 희수에게는 말할 수 없는 상처였습니다. 희수는 내게 악다구니치듯 말했습니다.

"나가. 난 너랑 다시는 말하고 싶지 않아. 우리 형부가 언젠가는 네가 나한테 무릎을 꿇고 사과할 날이 올거라고 했어."

난 희수가 왜 그런 말을 하는 지 이해할 수 없었고 승희에게 빠져버린 나는 희수의 그런 말들은 곧 잊어버렸습니다.

하루는 승희가 우리 집에 와서 잠을 자고 다음 날 학교로 가기로 했지만 우리 둘은 학교를 가지 않고 결석을 했습니다. 그리고 둘이 산으로 올라 갔습니다. 겨울에서 봄으로 바뀐 산에는 진달래가 지천이었습니다. 우리는 지치도록 진달래 꽃을 땄습니다. 그리고 승희가 내 머리에 진달래를 꽂아주며 장난을 치다가 갑자기 내 눈을 빤히 들여다 보았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자기의 입술을 내 입술에 포갰다가 떼었습니다. 순간 난 당황했습니디. 난 승희와 연애감정을 가진 것은 틀림없지만 여자애들끼리의 입맞춤은 왠지 해서는 안될 것 같고 좋은 느낌도 아니었습니다.

"이상해."
"뭐가 이상해. 난 나중에 남자로 태어나면 너랑 결혼할거야."
"......"

철우가 내 이마에 입을 맞췄을 때는 희열이 있었는데 승희의 입맞춤은 내게 그런 감정이 아니라 미묘한 감정에서도 이거는 아니다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3학년이 되자 승희는 인문계 반에서 취업반으로 옮겼습니다. 사실 성적이 나빴던 내가 취업반으로 가야 했지만 나는 인문계 반을 고수했습니다. 왜냐하면 취업반 아이들은 취업반 아이들끼리만 어울렸고 나는 모자원 아이 산동네 아이 취업반 아이라는 정상적인 무리에서 이탈한 무리속에 또 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인문계반을 고집했습니다. 하지만 승희는 가족을 위해 공부를 잘하면서도 취업반을 선택한 것입니다.

졸업을 할 무렵 승희는 내게 졸업을 하면 다시는 찾지 않겠다고 했고 실제로 우리는 연인들이 헤어지는 것처럼 졸업을 하자 절교를 했습니다. 그리고 승희는 사회에 나가 직장 생활을 하면서 시를 쓰는 남자와 사랑에 빠졌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나 역시 어른이 되어 가면서 여러 남자들과 사귀었습니다.

승희와 나는 레즈비언이었을까요. 결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나는 여자에게 이성을 느낄 수 없으니까요. 그건 승희도 마찬가지였으니 남자와 사랑에 빠졌겠지요. 그렇다면 그때의 연애감정은 무엇일까요. 십대에만 가질 수 있는 그런 감정 중 하나였을까요. 정말이지 승희와는 연인이었으니 헤어졌고 희수는 십대때만 느꼈을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 한 남자와 결혼을 했고 지금까지 나와는 우정을 나누는 친구로서 연락을 주고 받습니다.

덧붙이는 글 |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태그:#소녀들의 연애감정, #연재동화, #최초의 거짓말, #학현이, #장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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