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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여덟 살이 되자 나는 휘경국민학교에 입학을 했습니다. 그때는 지금처럼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크레용으로 '네모 그리기'랑 '동그라미 그리기' '줄긋기'같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런데 내 짝 이름이 '고조선'이었습니다. 아이들이 내 짝 이름을 가지고 놀리면 나는 언제나 내 짝 편을 들어주었습니다. 사실 나는 '고조선'이라는 이름이 특이하고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는 게 이상했습니다.

 

"오빠 고조선이 이상한 이름이야?"

"왜 니 짝 이름이 고조선이야? 특이하긴 특이하다. 고조선은 우리나라 최초의 이름이거든."

"그럼 멋있는데 왜 놀려?"

"이름이 자기들하고 틀리니까 괜히 그러는 거야."

 

고조선은 내가 자기 편을 들어주니까 나만 졸졸 따라 다녔습니다. 고무줄 놀이를 할 때도 남자아이였지만 고무줄을 잡아주기도 해서 또 남자애들한테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나는 실내화가 없었습니다. 내 실내화는 엄마가 외국에 수출하고 남은 못쓰게 된 스타킹을 가져다가 그걸 가위로 실처럼 길게 오려서 실내화 대신 짜주었습니다. 빨간색 바닥에 파란색을 위에 덧댄 실내화는 땅바닥에서 몇 번만 고무줄 놀이를 하고 나면 구멍이 났습니다. 그때마다 엄마는 언제나 스타킹으로 내 실내화를 만들어주고는 했습니다.

 

하루는 선생님께서 내 짝이랑 내게 학교 바로 옆에 있는 선생님 댁에 가서 서류를 받아 오라는 심부름를 시켰습니다. 선생님 집은 멋졌습니다. 창문이 빙 둘러쳐진 한옥 한 가운데 연못이 있었고 그 속에서 잉어가 유유히 놀고 있는 것입니다. 온갖 꽃과 풀이며 나무들도 많았고 동그랗게 손질이 잘 된 나무들은 벽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습니다. 아주머니 한 분이 서류를 우리 손에 쥐어주고 맛있는 주스도 주었습니다. 선생님 댁 주스는 집 만큼이나 고급스럽고 맛있었습니다.

 

"학현아."

 

내가 고개를 돌리자 갑자기 고조선이 내 볼에 입을 쭉 맞추는 것입니다.

 

"에이 뭐야!"

 

나는 그때부터 내 짝 '고조선'이 싫어졌습니다. 그 후로는 '조선'이가 따라다녀도 모른 채 하고 다른 아이들하고만 놀자 내 짝 '고조선'도 그만 토라져 버렸습니다.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켜서 나는 선생님을 특별히 좋아하고 있었는데 시험을 보는 날 선생님이 싫어진 사건이 생겼습니다. 그날은 첫 시험을 보는 날이었는데 내가 답안지를 다 쓰고 내 짝은 어떻게 썼는 지 그냥 궁굼해서 들여다 봤는데 선생님이 자로 내 머리를 '톡'하고 때렸습니다.

 

"컨닝하면 못써!"

 

나는 컨닝이라는 말의 뜻은 잘 몰랐지만 내가 남의 답안지를 몰래 들여다보고 베껴 쓰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오해를 받은 게 무척 싫었습니다. 나는 정말 억울했습니다. 

 

내가 입학할 무렵 언니는 중학교 입학 시험을 준비하고 있었고 오빠는 대광중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시험을 보러 갈 때 엄마는 캬톡릭신자였기 때문인지 물에 손가락을 적셔 언니의 이마와 양옆 가슴과 가운데 가슴에 성호를 그어주고 손가락만한 엿을 입에 넣어주었습니다. 언니는 영훈중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초등학교 처음 입학했을 때의 기억은 희미합니다. 내 짝 이름이 특이했다는 것 말고는요.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내가 입학을 하고 얼마되지 않아 학교에 다닐 수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삼 남매는 커가고 셋방살이마저 하기 힘들어진 엄마가 새로운 곳으로 이사할 준비를 그동안 해 온 것입니다. 사방팔방으로 알아 본 결과 엄마는 잃었던 일자리를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엄마가 구한 일자리는 지금의 한국전력의 전신이었던 경성전력 부장댁 손자아이를 봐주는 일이었고 다행히 그 집 문간방에서 우리는 새로운 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동네 이름이 어디였는지는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다만 학교에서 너무 멀어 내가 학교를 못 다니게 되었고 엄마도 시간이 나질 않아서였는지 무슨 이유에서인지 나를 전학시키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 다니지 않게 되자 내 생활은 지루해졌습니다. 그래도 청량리에 살 때는 '앙아'도 영철이 아버지도 '양복이'네랑 '발라 김'아저씨가 있었지만 이곳에서는 어울려 놀 사람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우리 삼 남매가 안채 쪽에는 들어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그래도 그집 할머니가 나를 시장에 데리고 가서 노란색 줄이 쳐진 원피스를 사서 주셨고 그 옷을 입는 것은 황홀했습니다. 웬지 그 집 딸이 된 기분이었습니다.

 

엄마는 하루종일 안채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몰래 엄마를 보러 안채에 들어가는 날이 많았습니다. 할머니는 그냥 두라고 했지만 엄마는 나를 늘 좁은 문간방으로 내 몰았습니다. 

 

하루는 그런 엄마가 밉기도 하고 화가 나기도 해서 세살박이 할머니의 손자 배를 꽉 물어버렸습니다. 그때 마침 밥을 입에 물고 있었기 때문에 밥알이 세 살배기 손자의 배꼽에 박혀 버렸습니다. 엄마는 너무도 당황을 한 나머지 나를 막 때렸고 할머니의 얼굴도 화가 나 있었습니다.

 

"상처가 났으면 어떻해 아유 야무지게도 물었네. 우리 손자 뱃 속에서 밥알이 튀어 나았네. 학현이 이제 큰일났다."

 

엄마가 나를 때리자 할머니가 화를 풀고 농담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정말 그 아기 뱃 속에서 밥알이 튀어나온 줄 알고 화들짝 놀랐습니다.

 

"죄송합니다."

 

"얘들이 그럴 수도 있지 뭐. 학현이 이제 이 방에 못 들어온다."

 

가끔 경성부장 댁 할아버지의 고명딸이 오는 날은 기분이 좋았습니다. '태옥이 엄마'라고만 기억되는 그 아줌마는 정말 멋지게 생겼지만 올 때마다 내게 용돈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태옥이 엄마'는 이화여대를 다니다가 1학년 때 재벌 집 아들 눈에 띄어 학교를 그만두고 바로 그 집으로 시집을 간 어마어마한 부자였습니다. 할아버지가 고명 딸 '태옥이 엄마'를 얼마나 예뻐하고 아꼈는지 머리에 꼽는 삔도 금으로 만들어주고 옷은 최고급으로만 입혔다는 것입니다,

 

나이가 엄마보다 조금 젊었지만 '태옥이 엄마'는 엄마를 보모가 아닌 친구처럼 대해주었습니다. 그리고 위로도 잊지 않았습니다.

 

"가현이 엄마는 애들이 말을 잘 들으니까 애들 크면 고생도 끝날 거에요."

 

멋진 모습 만큼이나 마음씨도 고와 보이는 내 눈에 '태옥이 엄마'는 그야말로 귀족 중의 귀족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나 그 집에서도 얼마 있지 못했습니다. 경성부장 할아버지의 아들이 외국으로 발령이 나서 멀리 갔기 때문에 더 이상 엄마가 그 집에서 할 일이 없어진 것이었습니다. 엄마는 또 우리가 살 곳을 찾아 헤매야 했습니다. 이제 우리 네 식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걸까요. 나는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답답한 문간방에서 벗어나 친구들이 많은 곳으로 이사를 갔으면 하는 게 당시 내 바람이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태그:#고조선과 짝이 되다, #성장에피소드, #학현이, #단짝, #장다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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