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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기억 속에는 나쁜 기억과 좋은 추억이 공존한 것 같습니다. 엄마가 어린 시절의 얘기를 들려 줄 때는 행복한 얼굴이었지만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말할 때는 "내가 죽어서도 네 아버지 곁에는 안 묻힐란다"라는 말을 자주 했으니까요.

 

엄마의 기억 저편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엄마의 어린 시절은 부유한 가정에서 아무 걱정없이 자랐지만 몸은 약한 편이었습니다. 엄마는 어른이 되어서도 40킬로그램의 몸무게를 가진 가녀리고 가녀린 몸이어서 나는 항상 "엄마가 죽으면 어떡하지?"하는 걱정을 그 나이에도 했을 정도니까요. 

 

"내가 학교에서 집에 올 힘이 없으면 항상 아줌마가 날 업어주러 왔었지. 그런데 한 날은 우리집 작은 일꾼 대용이가 왔잖니."

"엄마네 작은 일꾼? 큰 일꾼은 뭐고 작은 일꾼은 뭐야?"

"작은 일꾼은 나이가 어렸다는 뜻이지. 그때는 먹고 사는 게 힘들어서 밥만 먹여줘도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는 사람이 태반이었어, 그런데 내가 대용이한테 아줌마 보내라고 재촉하면 대용이는 등을 내밀고 아줌마는 바쁘다고 했지. 난 대용이한테 업히는 게 창피했거든."

 

우리 친 외할머니는 서울 안국동에서 태어나 안동 양반댁으로 시집을 오게 되었는데 그 일로 항상 외할머니의 아버지 그러니까 우리 외증조할아버지를 원망했다고 합니다. 엄마의 기억 속 외할머니는 항상 단정하게 치마의 주름을 촉촉 접어 그 위에 길고 하얀 앞치마를 입고 일을 하며 머슴들을 다스렸다고 합니다. 엄마에게도 친할머니가 있어서 엄마 말에 의하면 외할머니는 시어머니를 항상 공경했다는 것입니다.

 

"노인들은 자주 배가 고프거든. 그걸 알고 엄마는 삼시 세끼 외에도 중간 중간에 홍시 감 같은 것을 단정하게 차려서 할머니께 같다드리고 했지. 우리 할머니는 평생 손에 물을 안 묻히고 살 정도로 부자였는데 별명이 부처 할머니였어, 인심이 좋았거든."

 

할머니 말을 할 때도 엄마의 얼굴은 행복해 보였습니다.

 

"내가 할머니한테 옛날 얘기를 해달라고 조르면 항상 똑같은 얘기만 들려주셨는데도 그게 그렇게 재미있는거야."

"무슨 얘긴데?"

 

이번에도 언니가 묻습니다.

 

"'수양대와 양산봉' 얘기였지. 그런데 내가 심청전 같은 걸 읽어 드리면 할머니가 슬퍼서 눈물을 뚝뚝 흘리면 할머니가 피우던 담배대까지 눈물이 떨어져서 눈물에 담배 젖는 소리가 치잉치익하고 들리는데 나는 그게 또 그렇게 재미있었단다."

 

우리 외할머니도 외증조할머니도 인심이 후한 편이어서 할머니의 집 앞에는 언제나 밥을 얻으러 오는 사람이 줄을 섰다고 합니다.

 

"마루에 서서 내려다보면 글쎄, 밥 담아갈 바가지가 없어서 옷섶을 뒤집어 거기다 밥을 담아갈 만큼 가난한 사람이 많았지. 우리 엄마가 돌아가셨을 때 선비들이랑 우리 집에서 일하다 시집간 선심이까지 내려와서 울며 불며 우리 동네 큰 대문이 무너졌다고 통곡을 했단다."

 

 

 

엄마의 행복한 어린 시절은 외할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끝난 것 같았습니다. 중앙고보 야구선수였던 오빠와 올케까지 병으로 줄줄이 돌아가신 것입니다. 소녀로 성장해 서울로 유학을 왔던 엄마는 좋아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외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학교를 그만두고 집에 있어야 했다고 합니다. 새 외할머니가 집에 있다가 좋은 사람 있으니까 시집을 가라고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게 바로 우리 아버지였던 것이지요. 아버지도 일본 명치대학을 나왔지만 사진 찍기를 좋아해 사진학교까지 다닌 당시 '인텔리'라고 불릴 만큼 좋은 가정의 혜택을 받은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다만 엄마하고 나이 차이가 아홉 살이나 났고 엄마가 좋아한 사람은 따로 있었기 때문에 엄마에게는 아버지와의 결혼이 불행이 아닐 수 없었다고 합니다.

 

"너희 아버지도 아편을 하기 전까지는 자상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성질은 불같이 급했지. 그런데 그 눔의 김가인지 이가인지 눔을 만나면서 아편을 한 게 이 모양까지 온 게지."

 

엄마의 얼굴은 일그러진 표정이었습니다. 엄마의 새끼손가락 한 개는 약간 비뚤어져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편을 하면서 약기운이 떨어져 정신이 없을 때면 엄마를 때리고 구둣발로 밟아 손가락이 그렇게 되었던 겁니다. 그때부터 어린 내 마음에는 '아편'이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무척이나 무섭게 느껴졌습니다.    

 

"한 날은 경찰이 들이닥친다는 얘기를 듣고 나를 끌고 큰 봉투에 든 아편가루를 들고 한 밤중에 아편가루를 강에 뿌리러 끌려 간 적도 있었다. 재산도 아편마냥 그렇게 다 흘러가 없어지고 나랑 너희들을 이렇게 거지꼴로 만들어놓고 재산은 다 그 눔한테 넘어가고..."

 

엄마의 눈이 발갛게 충혈됩니다. 우리 삼 남매는 숙연하게 엄마의 말을 듣고만 있었습니다. 그때 오빠도 한마디 했습니다.

 

"나도 기억나요. 내가 아버지 방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노란 고무줄로 팔을 묶고 주사를 찌르다가 나를 보고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던거요."

"니는 그런 거 다 잊어뿌리라."

 

부자집 딸로 남부럽지 않게 크다가 아버지한테 시집 와 얼마 안되어 병에 걸린 아버지한테 시달림을 받고 아버지가 죽은 후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막막했을까요. 엄마는 언제나 어린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했습니다.

 

"지금도 엄마가 보고 싶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그렇게 물을 먹고 싶다고 했는데 물만 먹으면 설사를 하니 아무도 물을 안주고 나도 그렇게 해야 되는 줄 알고 엄마만 달랬다. 그래도 돌아 가실 걸 모르고...물이라도 실컷 드릴 걸 싶은 생각이 아직도 난다. "

 

나는 엄마는 처음부터 엄마로 태어나는 줄만 알았지 엄마의 엄마도 있고 할머니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엄마는 내가 태어나 며칠도 친정에 있지 못하자 그 후로 친정에 발길을 끊고 살았기 때문에 나는 외할머니도 외할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버지에 대한 기억도 없습니다. 다만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버지가 대학교 때 교복을 입고 머리카락은 구불구불 기른 곱상하게 생긴 사진 속 얼굴 뿐이었습니다.

 

엄마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가끔 했지만 말 끝에 하는 말은 항상 같았습니다.

 

"너희는 막되어 먹은 집안의 아이들이 아이다. 우리가 이렇게 몰락을 했어도 너희는 뼈대 있는 집안의 아이들이라는 걸 잊지 말아야 한데이."

 

엄마가 들려주는 엄마의 기억은 우리 삼 남매를 엄마가 풍족하게 해주지는 못했지만 마음 속에는 항상 '우리는 막 된 집안의 아이들이 아니다'라는 말이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기 때문에 '함부로 살아서는 안된다'는 자부심을 우리에게 알게 모르게 심어준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이 있었으니>


태그:#엄마의 기억 저편엔, #학현이의 성장에피소드, #최초의 거짓말, #장다혜, #학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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