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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난 너를 못잊어, J~ 난 너를 사랑해~.'
'뭐야? 이건 내 이야기잖아.'

살다 보면 들려오는 노래들이 온통 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을 때가 있다. 특히 사랑의 열병을 뜨겁게 앓을 때면 대중가요의 노랫말과 멜로디는 오히려 아릿한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히곤 한다. 10대 시절, 내게는 이선희의 'J에게(1984)'가 그랬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이던 1989년 어느날 불렀던 노래 한 곡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다. 묘한 추억과 함께.

고3의 피곤함을 잠시나마 잊고자 친구들 10여 명이 모여 청춘을 꽃피우던 어느 날. 모임이 끝나갈 무렵 돌아가며 노래 한 곡씩을 부르던 그 때 나는 당시 최고의 유행가였던 태진아의 '옥경이'를 불렀다. '옥경이'를 친구가 데리고 온 유일한 여자 친구 이름으로 살짝 바꿔서. 그 여자 친구는 나름 감동을 받았던지 그 이후 내게 많은 호의를 베풀었다. 친구 녀석이 내게 도끼 눈을 떴던 것은 당연했고, 나는 괜한 오해라며 식은 땀을 꽤나 흘려야 했다.

소녀는 술집 여종업원, 소년은 작사가가 되어 만난 이야기 '옥경이'

트로트와 함께 살아온 40년 작곡 인생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의 트로트가 더욱 소중해진다.
 트로트와 함께 살아온 40년 작곡 인생이야기를 듣다 보면 우리의 트로트가 더욱 소중해진다.
ⓒ 동방의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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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불빛 아래 마주 앉은 당신은, 언젠가 어디선가 본 듯한 얼굴인데, 고향을 물어보고 이름을 물어봐도, 잃어버린 이야긴가 대답하지 않네요~'

그날 이후 한동안 즐겨 부르던 '옥경이' 가사의 일부이다. 이 가사는 실제 상황을 바탕으로 쓰여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지난 2008년 3월, 이 곡을 쓴 임종수 작곡가를 만난 자리에서였다.

임종수 작곡가는 그가 작곡한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1976년)'가 크게 히트를 친 뒤, 1970년대 후반 조운파 작사가와 함께 서울 서대문구의 어느 맥주홀에 술을 마시러 간다. 임종수 작곡가 일행은 맥주홀이 처음이라 어색했는데, 술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온 한 여종업원은 더욱 어색해 했다. 급기야 그녀는 어깨를 들썩이며 울기까지 하더라는 것.

알고 보니 그녀는 조운파 작사가와 함께 어린 시절 소꿉놀이를 하던 동네 소녀였다. 조운파 작사가가 7~8살, 그녀가 5살 무렵이었으니까 30여 년이 흐른 뒤의 일이다. 유명해진 조운파 작사가를 알아 본 그녀가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울음을 터뜨린 것이다.

조운파 작사가는 유행가보다 더 유행가 같은 이 사연을 그날 밤 노랫말로 풀어낸다. 그렇게 탄생한 노래 제목이 바로 '고향 여자'다. 임종수 작곡가는 여기에 곡을 붙여 나훈아에게 준다. 하지만 이 노래는 나훈아에 의해 불리지 않고, 8년 여의 시간이 흐른 1989년 태진아에게 운명처럼 맡겨진다. 태진아의 부인 이름인 '옥형이'를 부르기 쉽게 바꾼 '옥경이'로 빅히트를 치며.

어느 노랜들 사연이 없을까마는 '옥경이'에 얽힌 이야기를 들여다보면, 작곡가와 작사가, 가수는 어떤 운명처럼 엮이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올해 칠순을 맞은 임종수 작곡가가 '작곡인생 40년 트로트 야사'라는 부제를 달아 펴낸 <너희가 트로트를 아느냐?>를 보면 그러한 생각이 더욱 강해진다.

고향역(나훈아, 1972),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하수영, 1976), 옥경이(태진아, 1989), 착한여자(인순이, 1992), 남자라는 이유로(조항조, 1997), 모르리(남진, 2002), 가져가(최진희, 2002), 사랑이 남아 있을 때(문희옥, 2006), 사랑해 말도 못하는(이창용, 2006) 애가 타(장윤정, 2008), 벤치(서주경, 2009), 사랑하며 살 테요(남진, 2010) 등.

임종수 작곡가를 거쳐 탄생한 주옥같은 명곡들이다. 노래를 향한 임종수 작곡가의 운명같은 이끌림은 40여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 넘는다. 그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그가 우리 대중가요에 담고자 했던 강인한 생명력에 주목하게 된다. 그가 만든 노래에는 운명의 날줄과 씨줄이 촘촘하게 얽혀 있다. 그래서 책장을 넘기는 재미는, 우리 부모님 세대가 <가요무대>를 보며 아련한 추억에 젖는 그런 느낌이다.

"가수 포기하고 작곡 선택한 것, 지금도 감사할 따름"

지난 2008년 3월 21일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임종수 작곡가에게 직접 받았던 사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느라 이 사인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약 30분 정도가 걸렸다.
 지난 2008년 3월 21일 여의도 한 음식점에서 임종수 작곡가에게 직접 받았던 사인.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시느라 이 사인을 마무리하는 데에는 약 30분 정도가 걸렸다.
ⓒ 최육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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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수 작곡가는 원래 가수가 되는 것이 꿈이었다. 임종수 작곡가는 순창초등학교와 이리(익산) 남성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실제로 광주와 전주 방송국 전속 가수로 활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가 활동하던 1960년대는 미8군 무대에서 부르던 팝송 풍의 노래가 유행했다. 그는 이런 흐름이 자신의 음색과 창법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 자신을 데뷔시켜 준 나화랑 작곡가에게 가수를 포기한다고 말씀드린다. 그러자 돌아온 대답은 뜻밖이었다.

"야, 임종수는 정말 현명하다. 그런데 노래를 잘하느냐, 못하느냐, 두 가지로 놓고만 얘기한다면, 너는 노래 잘한다. 진짜 잘한다. 나는 신인한테는 곡을 안 주는 사람이다. 그런데 너한테는 곡을 주지 않았느냐. 지금 네 설명을 들어 보니까 정말 맞다. 시대 흐름에는 안 맞는다. 그러면 너 오늘부터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이건 선생님의 명령이다. 오늘부터 너는 작곡을 해."

작곡가의 길은 그렇게 가수의 꿈을 포기한 뒤 걷게 됐다. 작곡의 작자도 모른 채, 더욱이 남들보다 한참 뒤처진 채. 임종수 작곡가는 그 당시 자신을 판단을 이렇게 고백한다.

"제 음색이 시대에 뒤떨어졌다는 것, 호감이 가는 인물이 아니라는 것 때문에 가수를 그만뒀지만, 그 나이에 스스로 그렇게 주제 파악을 했다는 게 지금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지금도 저한테 가수 테스트 받으러 오는 사람이 많아요. 1년에 30~40명쯤. 내 생각에 노래하면 정말 안 된다고 생각하면 '내가 노래할 테니 잘 들어 봐' 이렇게 얘기하고는 내가 노래해요. 그런 다음 '가수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라. 가수가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데' 이렇게 말해요."

임종수 작곡가는 그 이후 독학으로 피아노를 배운다. 말이 독학이지, 남들은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도 시원찮은데 그는 20대 중반이 넘어 오직 작곡을 위해 홀로 피아노를 친 것이다. 그렇게 고생고생한 뒤, 그는 무명 작곡가가 이름을 알리는 유일한 길인, 유명 가수에게 곡을 줘 히트시키는 것을 선택한다.

1970년 1월, 그는 서울에 올라와 온갖 고생을 한 자신의 삶을 빗대 만든 곡 '차창에 어린 모습'을 두 손에 들고 무작정 오아시스레코드사를 찾아간다. 나훈아를 만나기 위해서였는데, 나훈아는커녕 사장을 만나는 데만도 15일 동안 발걸음을 놓아야 했다. 그리고 언제 올지도 모를 나훈아를 만나기 위해 다시 3개월을 출근하다시피 했다.

드디어 나훈아가 사무실에 모습을 드러내던 날. 임종수 작곡가는 다짜고짜 나훈아 앞으로 가 이렇게 말한다.

"가서 딱 손을, 딱 잡았죠. 그랬더니 모르는 사람이니까 '와예?' 딱 그러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이렇게 얘기했어요. 공손하게. '저 무명 작곡간데요. 나훈아씨를 만나서 곡을 주고 싶어서 두 곡을 적어 가지고 왔는데. 지금 뭐 정확하게 하면은 석 달 가까이 돼요. 그런데 두 곡을 다 2절까지 들으면 시간이 걸리니까, 한 곡을 1절씩만 들으시고, 내가 얘기 좀 몇 마디 하고, 딱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나훈아는 임종수 작곡가가 피아노를 치며 부르는 노래를 들었다. 나훈아는 그 자리에서 직접 감정을 실어서 부르면서 "캬, 키찹니더, 선생님! 아, 선생님, 감사합니더"라고 오히려 악수를 청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1970년 5월초 나훈아가 취입해 세번 째곡으로 나온 '차창에 어린 모습'은 방송불가 판정을 받는다. 서슬퍼런 군사독재가 퇴폐풍조 운운했기 때문이었다.

군사독재 퇴폐풍조 딛고 되살아난 불후의 명곡 '고향역'

1971년 12월 말, 오아시스레코드사에서 우연히 다시 만난 나훈아는 임종수 작곡가에게 뜻밖에 제안을 한다.

"선생님, <차창에 어린 모습>, 멜로디가 기가 막힌데, 너무 아깝심니더. 어차피 방송도 안 되었으니 슬픈 가사를 띠고 정서적으로 우리나라 사람 정서에 맞고, 남녀노소 다 좋아할 수 있는 노래, 그리고 뭔가 향수도 느낄 수 있고, 사람들이 항상 기뻐하면서 즐겁게 들을 수 있는 그런 노래로 바꿉시더."

임종수 작곡가는 고심 끝에 자신이 중학교 시절 황등역에서 익산(이리)역으로 통학하던 기억을 떠올려 다시 노랫말을 쓰고 곡을 다듬었다. 그렇게 탄생한 노래가 바로 임종수 작곡가를 일약 유명 작곡가 반열에 올려 놓은 '고향역'이었다(관련기사 : 그는 아내에게 왜 하필 트로트를 바쳤을까).

'코스모스 피어있는 정든 고향역, 이쁜이 꽃분이 모두 나와 반겨 주겠지~.'

책 속에는 <KBS 전국노래자랑> '딩동댕동~' 심사위원으로서 밝힌 심사기준이 웃음을 머금게 하고, 선배 작곡가에 대한 예의를 갖추기 위해 최고 가수의 작곡 요청을 거절하던 미덕, 칠순의 나이에도 '국내최초 트로트가요학과 교수(충청대학)'로 손자뻘 학생들과 함께 공부하는 즐거움 등이 가득해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끝으로 부록으로 딸린 CD를 통해 노래에 담긴 사연을 직접 육성으로 듣어보시길. 임종수 작곡가의 입담, 상상을 초월한다.


너희가 트로트를 아느냐? - 작곡인생 40년 트로트 야사(:뒷이야기)

임종수 지음, 동방의빛(2011)


태그:#임종수, #너희가 트로트를 아느냐, #트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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