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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군 노동면에 있는 명봉역
 보성군 노동면에 있는 명봉역
ⓒ 서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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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이 기다려졌다. 도심에서 살던 나에게 외할머니 집은 낙원이었다. 토끼 잡으러 산으로 들로 뛰어다녔고 방죽에서 여름이면 물장구치고 겨울이면 썰매를 탔다. 호롱불 아래서 고구마를 먹으며 듣던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 얘기가 귀에 쏘옥 들어오던 깊은 산골.

외할머니는 방학이 끝나갈 무렵에는 새벽에 일어나 30리 밖에 있는 장으로 나가셨다. 그리고 사 오신 것은 김과 과자 몇 개. 다음날 새벽, 집으로 가기 위해 책가방을 챙기던 우리들 옆에서 외할머니는 김밥을 쌌다. 맨밥에 소금을 뿌리고 김을 둘둘 말아 김밥을 만들고 다시 서너 개를 헝겊으로 묶었다.

재 하나를 넘었다. 그리고 또 하나를 넘었다. 마지막 재를 넘기 전 할머니는 개울가에서 헝겊에 싼 김밥을 펼쳐놓으셨다. 할머니는 "고수레"하며 음식을 산에 던졌다. "산신 먼저 자시고 우리 손주들 집에 잘 가게 해 주십시오"라고 비는 것도 잊지 않으셨다. 그렇게 재 세 개를 넘어 도착한 곳이 '명봉역'이다.

명봉역은 2005년부터 무인 간이역이 됐다.
 명봉역은 2005년부터 무인 간이역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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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남도 보성군 노동면에 가면 외딴 산골에 '명봉'이라는 기차역이 있다. 1930년 12월 25일 영업을 시작했고 2005년 6월 16일 무인역사 간이역이 됐다. 조용하고 평온한 역답게 드라마나 영화 촬영장으로 각광받고 있다. 2003년에는 '여름향기'를, 최근에는 '신데렐라 언니'를 촬영했다.

역사는 붉은 벽돌로 단단하게 지어져 있다. 고목나무 예닐곱 그루가 입구에 가지런히 도열해있고 파르스름하게 낀 이끼는 긴 세월의 흐름을 말해주고 있다. 문을 열고 들어서면 긴 목재의자가 사각 가지런한 창문 아래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다.

옛날 외할머니와 함께 기차를 기다리던 대합실에는 난로가 있었다. 목이 긴 연통은 출구쪽 유리창을 반쯤 깨고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할머니는 '송정리'까지 반표 두 장을 끊었었다. 중학교 1학년인 형을 국민학생이라고 한사코 우기면서 승차권을 받으셨다. 그리고 아낀 돈으로 굳이 '입장권'을 사서 나무로 얼금얼금 짠 문을 지나 플랫폼까지 따라 나오셨다.

명봉역 플랫폼은 방문자 모두에게 열려있다
 명봉역 플랫폼은 방문자 모두에게 열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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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도 훨씬 넘은 세월인데 오늘 갑자기 명봉역이 그리웠다. 표를 사는 곳은 판자로 굳게 막혀있다. 그 위로는 열차시각표와 요금표가 붙어있는데 하루 몇 차례 오간다는 무궁화호, 송정까지 요금을 보니 3,700원이다. 할머니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여전히 반표를 달라고 역무원과 승강이 하셨을까?

30분을 서성여도 적막감만이 흐르는 대합실, 이제는 기차가 와도 결코 안내방송 같은 것은 없을 것 같은 고요함속에 타는 곳이라 적힌 문을 열고 홀로 플랫폼으로 나갔다. 긴 철로가 이어지다가 역으로 들어오는 순간 둘로 나눠진다.

그 철길을 지나니 우산같이 생긴 나무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줄을 서 있고 그 사이사이 명봉역임을 알리는 표시판과 함께 앉아 기다릴 수 있는 콘크리트 의자가 놓여있다. 아직 기차가 도착할 시간이 안 된 것 같다. 왼쪽을 봐도 오른쪽을 봐도 철로만이 외롭다.

아무도 없는 대합실 긴 의자에서 책을 읽었다
 아무도 없는 대합실 긴 의자에서 책을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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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대합실로 들어왔다. 옛날에 외할머니는 우리를 광주(송정리)로 보내기 위해 한손에는 김밥을 들고 한 손에는 '입장권'을 들고 플랫폼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지금 할머니를 기다리는 나는 빈손이다. 입장권이 없어도 들어갈 수 있고 재를 넘어야 할 필요도 없기에 김밥도 없다.

손님도 없고 역무원도 없고 언제 도착할지도 모를 기차, 시간은 그대로 멈추고 말았다. 대합실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책을 절반쯤 읽었을 때 힘겹게 기적을 울리며 기차가 들어왔다. 그리고 이내 플랫폼을 벗어난 기차 뒤로 외할머니가 보따리를 이고 서 계셨다. 그 보따리 속에는 여전히 맨밥에 소금만 뿌린 통김밥도 있었다. 할머니는 당신의 집으로 가기 위해 세 개의 재를 또다시 넘으려 하셨나 보다. 허기진 배를 그 통김밥으로 채우려하셨나 보다. 허나 세 재를 넘어야 하는 고된 길을 굳이 걷지 않아도 되기에, 이제는 손자가 그 길을 함께 하기에 그 김밥은 보따리 안에서만 머물러야 했다.

명봉역에서 외할머니 동네인 미력면 장골마을까지 가는 길
 명봉역에서 외할머니 동네인 미력면 장골마을까지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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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를 바이크 뒤에 모시고 길을 달렸다. 명봉역에서 외할머니집이 있는 미력면 장골마을까지 바이크로 달려도 20분 넘게 걸리는데 당신은 옛날부터 높은 산길 세 개를 넘어 우리를 보내고 또 쓸쓸히 그 길을 걸어 가셨겠구나. 우리에게 전부 김밥을 나눠주고 당신은 집으로 돌아가실 때 허기진 배를 무엇으로 달래셨을까?

장골마을이 가까워졌다. 마을로 들어서는 입구는 논과 밭이지만 마을은 산을 병풍처럼 도열시켜놓고 있다. 어렸을 때 봤던 마을 우측 언덕위의 고목은 여전히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다. 하지만 가까이 가 보니 늙고 병든 듯 힘이 없어 보였다.

외할머니 집 앞에서 바이크를 세우고 대문을 열었다. 그런데 낯선 사람들이다. 여전히 바이크 뒷좌석에 앉아계시던 외할머니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다시 바이크의 시동을 걸어 마을 앞 야산으로 향했다.

최근 외할머니 묘를 이장해 외할아버지와 나란히 모셨다
 최근 외할머니 묘를 이장해 외할아버지와 나란히 모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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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는 35년 전, 내가 초등학생일 때 돌아가셨다. 광주에 오셨다가 명봉으로 돌아가는 할머니를 위해 입장권을 사서 플랫폼에서 배웅해 드린 적도 없고 명봉역에 내려 재를 넘어 당신 집으로 돌아가실 때 허기진 배를 채우시라고 통김밥을 싸 드린 적도 없다.

평생 혼자 사시다시피 한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대신해 의지할 곳은 오로지 외동딸이었던 필자의 엄마지만 딸에게 짐이 된다며 한사코 깊은 산골 이곳 미력면에서 평생 사셨다. 그렇게 외롭게 지낸 분이셨기에 최근에 묘를 이장해 외할아버지와 나란히 모셨다. 명봉역은 나에게 그런 추억과 향기가 있는 곳이다.

보성군 노동면에 있는 '명봉역', 그때 그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어줘서 고맙다. 이렇게 30년의 세월이 지났어도 문득 누군가가 그리워지면 이곳을 찾는다. 책을 읽다가 플랫폼에 나가 그 누군가를 회상할 수 있게 해 준 명복역, 고맙다.

덧붙이는 글 | 남도TV에도 실렸습니다



태그:#바이크올레꾼, #보성군, #명봉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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