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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쾨벤하운)은 덴마크어로 '상인의 항구'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적어도 지난 12일 만큼은 눈앞의 이익을 좇는 상인들의 항구가 아니었다. 이날 코펜하겐 시내는 멀리 보는 눈으로 인류의 미래를 우려하는 '깨어 있는 시민'들과 '행동하는 양심'들의 함성으로 가득 찼다.

 

개인의 이익이 아닌 인류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전세계에서 온 수만 명의 세계시민들은 이날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 총회(UNFCCC COP15, 이하 COP15)가 열리고 있는 코펜하겐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야외활동을 위축시키는 쌀쌀한 날씨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인구 130만 명을 웃도는 코펜하겐에서 수만 명의 시위는 좀처럼 보기 드문 일이다.

 

비정부기구(NGO)와 노조, 정당 등 전 세계 60여 개 국, 500여 개 단체는 이른바 당사국 각료들의 코펜하겐 도착에 맞춰 이날을 '기후변화 국제행동의 날'로 선포했다. 이들은 시내 크리스티안 지역의 국회의사당 광장에 모여 집회를 가진 뒤 6㎞쯤 떨어진 벨라 센터 회의장까지 행진을 벌였다.

 

코펜하겐으로 몰려든 전세계 '깨어 있는 시민'과 '행동하는 양심'

 

이날 시위는 '기후변화 국제행동의 날'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덴마크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호주,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 전세계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열렸다. 주최 측은 이번 코펜하겐 시위에 모두 10만 명이 참가했다고 밝혔으나, 덴마크 경찰은 시위 인원을 3~4만 명으로 추산했다.

 

10만 명이든 3만 명이든 이들이 '기후변화 국제행동의 날'에 전세계에 전하려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하나는 97년에 합의한 교토의정서 체제를 대신할 '코펜하겐의정서'에 합의하라는 협상 타결용 압력이고, 다른 하나는 선진국들에게 가난한 나라들에 대한 지원을 촉구하는 압박시위였다.

 

메시지는 이들이 광장에서 외친 구호와 함성 속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가장 자주 눈에 띄는 구호는 '두 번째 지구는 없다'(There is no Planet B)는 차분한 것이었다. 그 뒤를 '기후 정의'(Climate Justice)와 '당장 행동하라'(Act now) 같은 구호가 블라송(BLA BLA BLA)과 함께 울려 퍼졌다.

 

행동하는 환경운동가들의 맏형격인 '그린피스'(Greenpeace)는 지구와 인류가 직면한 현실을 기후변화로 녹아내리는 눈사람 인형과 '빅 브라더'에 의해 조종되는 주요국 정상들을 꼭두각시 인형으로 희화한 가장행렬을 벌였다. 과격한 행동과는 거리가 먼 차분한 행진이었다.

 

아바즈(Avaaz), 야생동물보호기금(WWF) 같은 세계적인 환경 NGO들 역시 특유의 가장행렬을 통해 COP15에 참석하는 각국 정부와 기업들에게 기후변화와 온실가스 해결 노력에 적극 나설 것을 촉구했다.

 

이날 행진에는 우리나라 환경운동의 허브인 환경재단과 환경운동연합, 녹색연합 외에 민주노총, 한국노총, 전국농민회총연맹, 에너지기후정책연구소 등이 주축이 된 COP15 공동대응단, 진보신당 등 60여명도 어깨를 함께 결었다.

 

부자 나라들이 기후정의 전쟁에 참전해 빚을 갚아야

 

산업혁명과 화석연료를 태운 대가인 온실가스와 기후변화는 전지구적으로 나타나지만, 그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가장 먼저 겪는 것은 늘 그렇듯이 가난한 자들의 몫이다. 이런 부조리한 현실 앞에서 분출된 또 다른 중요한 흐름은 부자 나라들이 이 기후정의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전해 빚을 갚을 것을 촉구하는 양심의 호소다.

 

굳이 산업혁명 시절부터 시작된 기후변화의 어두운 과거를 따질 것도 없다. 여전히 잘사는 나라의 사람들은 못사는 나라 사람들보다 20배나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40배나 많은 천연자원을 쓴다는 불편한 현실 앞에서, 밴드와 함께 울려 퍼진 '부자 나라들은 기후변화의 빚을 갚아라'(Rich countries pay your climate debt!)는 함성은 정의로운 울림이다.

 

기후변화의 문제가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초(秒)를 다투는 사안임을 뜻하는 '시계소리(tck tck tck) 캠페인'은 인류가 기후변화의 책임 소재를 따질 여지가 없이 결정의 순간이 '째깍째깍' 긴박하게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한다. 'tck tck tck 캠페인'에 동참을 호소한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은 이렇게 말한다.

 

"현재 우리를 이끄는 리더들이 이 문제에 관한 책임을 받아들이도록 하기 위한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 위협은 지금까지 인류가 부딪힌 가장 큰 도전이기 때문이다." 

 

일단의 여성들은 '성(젠더) 정의 없는 기후 정의는 없다'는 펼침막을 들고 행진했다. 많은 젊은 부부들이 추운 날씨에도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우고 행진했다. '난장'에는 늘 끼어들기가 있기 마련인데 이런 '국제적인 난장'에 끼어들기가 없을 리 없다. '그린'으로 넘실거리는 코펜하겐 거리는 반자본주의신당(NPA)와 공산당의 붉은 깃발이 있어 오히려 조화로웠다.

 

'기후가 아닌 정치를 변화시켜라'

 

사실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거나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희망봉을 지나지 않고서도 얼음이 녹아내린 북극에서 태평양까지 바로 갈 수 있는 현실 앞에서 기후정의는 이제 더는 진보 혹은 좌파 정당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COP15'는 남북과 좌우에 관계없이 전세계 정치인들에게 구체적인 기후변화 대책에 대한 압력을 가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기후변화 국제행동의 날'에 등장한 수많은 선전과 선동 중에서 '기후가 아닌 정치를 변화시켜라'(Change the Politics, Not the Climate)는 구호가 가장 눈길을 끄는 것도 그 때문이다.

 

COP15를 앞두고 덴마크 정부는 '코펜하겐'(Copenhagen) 앞에 희망(Hope)을 조합한 '호펜하겐'(Hopenhagen)으로 표기한 포스터를 시내 전역에 붙여 이 중차대한 회의에 거는 인류의 기대감에 무게를 싣고 있다. COP15에 참석하는 당사국들에게는 그 기대를 배반하지 않을 책임과 의무가 있다.

 

일요일인 13일 저녁 코펜하겐 클리마 포럼(Klima Forum) 행사장에서 한국의 행위예술가 유진규씨가 공연한 'We are the CO2 WORLD!'라는 제목의 1인극은 기대와 우려가 교차하는 현실을 우화적으로 보여준다. 한국 환경재단(고건 이사장, 최열 대표)의 예술인 파트너로 참가한 유씨는 아프리카 난민 구호를 위해 미국의 팝 가수들이 모여 부른 'We are the world!'를 차용한 판토마임에서 미국과 중국 등 핵심 5개국 정상의 가면을 쓰고 나와 기후변화의 희생자인 다섯 마리의 북극곰을 기름통에 빠뜨려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하는 씻김굿을 벌였다.

 

결국, COP15의 성공 여부는 당사국들, 특히 그중에서도 유씨의 판토마임 우화가 보여준 것처럼 미국과 유럽연합 그리고 중국․인도 같은 핵심국의 정치적 의지에 달려 있다. 이 정치인들을 움직일 수 있는 힘은 '깨어있는 시민'과 '행동하는 양심'뿐이다. 코펜하겐이 '희망의 항구'가 될 수 있을지도 여기에 달려 있다.


태그:#코펜하겐, #기후변화, #CO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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