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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미실.
 <선덕여왕> 미실.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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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드라마 <선덕여왕>에선 정적인 덕만공주(이요원 분)를 제거하기 위한 미실(고현정 분)의 작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다. 미실은 덕만을 제거하기 위해 상대편에게 술을 먹이고 속임수를 쓰고 군대를 동원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포정치를 시행하고 있다. 정적 한 명을 제거하기 위해 판을 크게 벌려 온갖 술수를 다 동원하고 있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미실은 때로는 '명분과 합법'을 내세우고 때로는 '야비하고 치사한 수단'을 동원하고 있다. 이 중에서 미실이 더 중시하는 쪽은 전자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진평왕(조민기 분)과 옥새를 확보한 것도 명분과 합법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

이처럼, 드라마 속의 미실은 정적 하나를 제거하기 위해 가지가지의 술수를 다 동원하는 한편 명분과 합법을 존중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럼, 실제의 미실도 과연 그러했을까? 역사 속의 미실은 정적을 제거할 때에 어떤 수단을 동원했을까?

실제 미실은 어떤 방법으로 정적을 제거했을까

필사본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이 제거한 주요 정적은 2명이었다. 제24대 진흥왕(재위 540~576년)의 장남인 동륜태자가 하나요, 진흥왕의 차남인 제25대 진지왕(금륜왕자, 재위 576~579년)이 또 하나였다. 진흥왕의 아들들이자 미실의 연인들이었던 동륜과 금륜이 모두 미실에 의해 제거된 것이다.

여기서 진지왕 제거는 미실이 단독으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도태후(진흥왕의 왕후)와 함께 벌인 일이었다. 그리고 사도태후-미실 연대의 주도권은 사도태후 쪽에 있었다. 두 사람이 공동으로 벌인 데다 사도태후가 주도하는 일인지라, 진지왕 제거의 경우에는 미실 특유의 일처리 방식이 드러나기 힘들었다.

이에 비해 동륜태자 제거는 미실의 '단독범행'이었다. 미실이 자기 수하들을 동원해서 단독으로 벌인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건의 경우에는 미실의 일처리 방식이 잘 부각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륜태자는 드라마 속 덕만처럼 국정을 사실상 총괄하는 후계자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실제의 미실이 후계자 동륜태자를 제거한 방식과 드라마 속의 미실이 후계자 덕만을 제거하는 방식을 비교해보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그럼, 미실은 동륜태자를 어떻게 제거했을까?

'태자' 살해하고도 별다른 타격 받지 않은 미실

<화랑세기> 제6세 풍월주 세종 편에서는 "홍제 원년(572) 3월에 동태자(동륜태자)가 보명궁의 맹견사건 때문에 죽었다"고 기록했다. 연로한 진흥왕에 이어 조만간 차기 국왕에 오를 것이 확실시되던 동륜태자가 엉뚱하게도 개에 물려 사망한 것이다. 경호원들이 얼마든지 태자를 보호할 수 있었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경호원들은 무사하고 경호원들 틈에 있던 태자만 죽음을 당했다.    

이상하다 싶어서, 진흥왕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위해 수사를 지휘했다. 알고 보니, 이 사건의 범인은 후궁인 미실이었다. 진흥왕이 미실을 범인으로 판단한 것은 태자의 경호원들 중에 미실의 부하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미실의 명령을 받은 경호원들이 일부러 경호를 소홀히 하는 틈을 타서 누군가가 맹견을 태자 쪽으로 풀어놓았던 것으로 판단되는 사건이었다. 

태자를 살해했는데도 불구하고 미실은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미실이 화랑도의 원화(源花) 자리에서 물러나고 풍월주 자리가 다시 설치되었지만, 새로운 풍월주의 자리는 미실의 측근인 설원랑에게 돌아갔다. 미실 입장에서는 아무 손실 없는 정변이었던 것이다.

미실이 개를 풀어 동륜태자를 제거했다는 점을 염두에 두고, 미실이 왜 그를 살해했으며 미실이 그러고도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는지를 일단 추적해 보기로 하자.

미실과 동륜태자가 과거에 진흥왕 몰래 밀애를 즐긴 적이 있기 때문에 '혹시 치정 때문에 미실이 동륜태자를 살해한 게 아닌가?'라는 의문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동륜태자와의 관계가 들통 날 것을 우려한 미실이 태자에게 미인들을 많이 소개해줬고 태자 역시 새로운 여자들에게 마음을 주며 미실과의 관계를 이미 정리했기 때문에, 사건 당시에는 두 사람의 애정관계가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미실이 동륜태자를 살해한 본질적 동기는 <삼국사기> 권4의 진흥왕본기·진지왕본기·진평왕본기 속에서 규명될 수 있다. '동륜왕자가 태자가 된 시점'과 '동륜태자가 살해된 시점'의 전후에 어떤 정치적 변화가 있었는지를 추적해보면, 그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불교문화 수입해 왕권 강화하려 했던 진흥왕과 태자

진흥왕~진평왕 시대의 조공 기록은 동륜태자 살해사건이 대외관계의 노선과 관계 있음을 보여준다.
 진흥왕~진평왕 시대의 조공 기록은 동륜태자 살해사건이 대외관계의 노선과 관계 있음을 보여준다.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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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흥왕·진지왕·진평왕 시대의 조공 기록을 보여주는 위의 표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진흥왕은 재위 25년(564)에 가서야 중국에 조공을 하기 시작했다. 조공의 본질은 외교와 무역이었다. 따라서 진흥왕은 재위 25년에 가서야 대(對)중국 외교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 것이다. 재위 25년 이전까지 진흥왕이 외교에 신경을 쓰지 못한 이유는 간단하다. 고구려·백제와의 전쟁에 온 신경을 다 기울였기 때문이다.

진흥왕이 접촉을 시도할 당시의 중국은 남북조 분열기(4~6세기)의 막바지에 처해 있었다. 북중국 즉 북조(北朝)에는 북주(557~581년)와 북제(550~577년)가 있었고, 남중국 즉 남조(南朝)에는 진(陳, 557~589년)이 있었다. 당시 남조와 북조는 서로 정통성 경쟁을 벌였다. 여기서 신라가 접근하기 쉬운 나라는 북제와 진이었다. 지도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북주는 북제보다 서쪽에 있었기 때문에 신라가 접근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다. 

동륜태자 피살 당시의 중국 정세. 지도 속의 글씨는 편집의 결과임.
 동륜태자 피살 당시의 중국 정세. 지도 속의 글씨는 편집의 결과임.
ⓒ 중국사회과학원, <간명중국역사지도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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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제와 진 가운데에서 누구와 손을 잡을 것인가를 놓고 처음에 진흥왕은 외교적 혼선을 빚었다. 앞의 표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564년에 북조의 북제에 조공을 한 진흥왕은 2년 뒤인 566년에 조공의 대상을 바꾸었다. 남조의 진으로 바꾼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 시점에서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다. 진에게 조공을 하기 직전에 동륜왕자가 태자로 책봉된 것이다. 말년의 진흥왕이 현실정치와 거리를 둔 채 승복을 입고 살았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놓고 볼 때, 이 시기의 신라 정국은 실질적으로 동륜태자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따라서 진과의 외교관계는 실질적으로 동륜태자에 의해 추진되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진흥왕과 동륜태자가 북제 대신에 진을 선택한 이유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 신라의 왕권강화에 기여하는 불교문화가 주로 진에서 들어왔기 때문이다. 정복전쟁을 통해 영토를 확장한 진흥왕과 동륜태자는 외교력 강화와 불교문화 수입을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을 누르려 했던 것이다. 

이런 왕권강화 시도를 귀족들이 그냥 묵과할 리는 없다. 그 점은 어느 시대건 간에 다 마찬가지다. 진과의 외교관계가 한창 강화될 때에 동륜태자는 갑자기 죽었고, 그의 죽음과 더불어 진과의 관계도 중단되고 말았다. 표에서 알 수 있듯이, 동륜태자가 죽자마자 신라의 외교 파트너는 갑자기 진에서 북제로 바뀌고 말았다.

미실이 개를 풀어 태자를 죽인 이유

이와 같이 <화랑세기>와 <삼국사기>를 종합해보면, 미실이 개를 풀어 동륜태자를 죽인 것은 진흥왕과 동륜태자가 주도하는 외교사업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미실은 왕권강화를 반대하는 귀족들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여 그렇게 했던 것이다. 자기 아들을 죽인 미실을 진흥왕이 처벌하지 못한 것은, 진흥왕이 미실을 좋아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미실 배후에 귀족세력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선덕여왕> 속 진지왕(왼쪽)
 <선덕여왕> 속 진지왕(왼쪽)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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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것은, 동륜태자의 동생인 진지왕 역시 북제와의 관계를 끊고 다시 진과 관계를 열려고 하다가 그 이듬해에 폐위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화랑세기>에서는 복잡한 여성관계가 진지왕 폐위의 원인이라고 했지만, 여성관계와 함께 외교관계 역시 주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렇게 외교문제로 진통을 겪은 신라는 진지왕 폐위 이후로 근 20년 동안 중국과 외교관계를 갖지 않았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589년)하고도 7년이나 지난 596년에 가서야 신라는 비로소 수나라에 조공을 하기 시작했고, 수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당나라에 조공을 하기 시작했다. 남북조의 대결을 묵묵히 지켜보다가 최종 승자에게 줄을 댄 것이다. 이는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의 동아시아 격변기 때에 신라 지배층이 대외관계에 상당히 신중한 동시에 소극적이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누구와 외교관계를 체결한 것인가를 놓고 신라 지배층 내부에서 갈등이 발생했고 그 와중에 미실이 귀족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여 동륜태자를 살해했음을 알려주는 동륜태자 살해사건은 드라마 <선덕여왕>을 시청하는 사람들에게 미실에 관한 또 하나의 정보를 알려주고 있다.

어떤 정보일까? 그것은 미실이 단독으로 정적을 제거할 때에는 판을 그렇게 복잡하게 벌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명분과 합법을 그다지 존중하지도 않았다는 점이다.

드라마 속의 미실은 정적 한 명을 제거하기 위해 상대편에게 술을 먹이고 속임수를 쓰고 군대를 동원하고 계엄령을 선포하고 공포정치를 실시하는 등의 갖가지 상황을 연출하고 있지만, 실제의 미실은 아주 '명쾌'하게 문제를 해결했다. 그냥 개를 풀어서 정적을 단번에 죽여 버린 것이다.

그리고 실제의 미실은 자신의 행동을 명분과 합법으로 치장하지도 않았다. 그는 자신이 살인을 저질렀음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대담하게 행동했다. 귀족세력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한편으로는 명분과 합법을 중시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온갖 '야비하고 치사한 방법'으로 정적을 제거하려는 드라마 속의 미실과 달리, 실제의 미실은 아주 '명쾌'하면서도 대담한 방법으로 정적을 제거했다. 그는 판을 복잡하게 벌이지 않았다. 아주 노골적이고도 직접적으로, 그는 사나운 개를 풀어 정적에게 달려들도록 했다.


태그:#선덕여왕, #미실, #동륜태자, #덕만공주, #진흥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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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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