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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에서 미실역을 맡은 고현정.
 <선덕여왕>에서 미실역을 맡은 고현정.
ⓒ M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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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덕여왕> 미실(고현정 분)의 쿠데타가 중대 고비에 직면했다. 덕만공주(이요원 분)에 대한 공개재판을 계기로 중소 귀족들과 화랑들이 덕만 쪽으로 기울면서 상황은 미실에게 불리한 방향으로 돌아가고 있다.

하지만, 이런 가운데에도 현재까지는 미실이 신라의 국정을 주도하고 있다. 지난 2일 방영된 드라마 <선덕여왕> 제 47부에서는 미실이 국정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 나왔다. 미실이 당나라 사신을 직접 접견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국정장악력을 대내외적으로 과시하기 위한 제스처였다. 

당나라 사신을 접견하는 자리에서 미실은 자신의 외교 스타일을 보여주었다. 당나라 사신들이 쿠데타의 불법성을 운운하며 황금 1천관을 무상으로 조공할 것을 요구하자, 미실은 "당나라에서도 (이세민의) 찬탈이 있었지 않느냐?"며 강경태도로 응수했다. 그는 "이세민을 내 앞에 데려오라"는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조공에 대해서는 조공 물량 이상의 반대급부가 제공되는 것이 관행인데도 당나라 측이 미실의 약점(쿠데타)을 잡아 대가성 없는 조공을 요구하니, 이런 요구가 '우리의 미실'에게 통할 리 없었던 것이다. 결국 당나라 사신들은 미실의 당당한 기세 앞에서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실제 미실의 대중국 외교는 어땠을까

그럼, 실제의 미실은 어땠을까? 역사 속의 미실은 대(對)중국 외교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했을까? 미실이 권력을 잡은 시기에 신라의 대중국 외교가 어떤 노선을 취했는지를 살펴보면, 대중국 외교에 관한 미실의 스타일을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신라의 대중국 외교는 철저한 사대외교가 아니냐?"며 "그것은 뻔한 게 아니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게 있다. 그것은 우리가 알고 있는 신라의 대중국 외교라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김춘추 시대의 그것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김춘추 이전과 이후에는 신라의 대중국 외교가 어떠했는지를 우리는 잘 모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래서 이 논의는 필요하다.

미실(546~549년 출생, 610년대 중반 이후 사망)이 살았던 시대, 즉 진흥왕·진지왕·진평왕 시대의 대중국 외교를 정리한 아래의 표는 <삼국사기> 권4와 필사본 <화랑세기>에 근거한 것이다. 이 표를 보면, 미실의 시대는 중국이 남북조 분열기에서 수·당 통일기로 이행한 시기였다. 이 같은 격변기에 신라와 미실이 대중국 외교에서 어떤 전략을 취했는지 파악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삼국사기> 권4 및 필사본 <화랑세기>를 토대로 정리한 미실 시대의 대(對)중국 외교.
 <삼국사기> 권4 및 필사본 <화랑세기>를 토대로 정리한 미실 시대의 대(對)중국 외교.
ⓒ 김종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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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미실 시대의 대중국 외교는 크게 10기로 구분된다. 그중에서 제5기 이후 즉 노란색 부분은 미실의 집권기에 해당한다. 여기서 제5기·제6기는 미실이 진흥왕 사후에 진지왕 옹립(576년)을 계기로 사도태후 등과 함께 권력을 공동 장악한 '제1차 미실 집권기'에 해당하고, 제7기 이후는 미실이 진지왕 폐위 및 진평왕 옹립(579년)을 계기로 공동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한 '제2차 미실 집권기'에 해당한다.

표에서 세 번째 항목인 '동맹국' 부분은 각 시기에 신라의 중국 측 동맹국을 보여주고 있다. 이 항목에서 녹색 부분은, 동맹국 선택과정에서 미실의 의중이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 시기를 보여주고 있다. 

표를 보면, 남북조 분열기의 막판에 신라 위정자들이 어느 나라와 동맹을 할 것인가를 놓고 전략을 여러 차례 수정했음을 알 수 있다. 남조(남중국)와 북조(북중국)의 정통성 경쟁이 거의 막판에 다다라 중국 전체에 통일 바람이 불던 이 시기에, 신라 입장에서는 누구와 손을 잡느냐가 국운을 좌우하는 중대 문제였다.

왕권강화 용 외교를 지향한 진흥왕과 동륜태자

한강유역 확보와 대가야 점령을 이룩한 뒤에 진흥왕이 처음으로 손을 잡은 대상은 북조의 북제였다(제2기). 그런데 진흥왕은 불과 2년만인 566년에 동맹국을 북제에서 진(陳)으로 바꾸었다(제3기). 이때 진과의 동맹은 동륜태자에 의해 주도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중국 정세의 주도권이 북조에 있었으므로, 남조와의 동맹은 신라 전체적으로 볼 때 그리 유익한 게 아니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진흥왕과 동륜태자가 진과 동맹을 맺은 주된 목적은 진으로부터 불교문화를 수입해서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을 억누르기 위함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왕권강화용 외교를 귀족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그런 귀족들의 정서를 반영한 사건이 미실의 동륜태자 암살(573년)이었다. 이때 미실은 맹견을 풀어 동륜태자를 죽이는데 성공했다.

동륜태자 피살과 동시에 신라의 동맹국은 다시 북제로 바뀌었다(제4기). 이때는 제1차 미실 집권기가 시작되기 3년 전이었다. 제1차 집권이 시작되기 3년 전부터 미실은 이미 신라의 대중국 외교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시작된 신라-북제 동맹은 진흥왕이 죽고 진지왕이 옹립된 이후인 제1차 미실 집권기에도 계속 이어졌다(제5기).

그런데 진지왕 3년(578)에 신라의 동맹국은 다시 진으로 바뀌었다(제6기). 진지왕이 귀족세력을 따돌리고 아버지와 형의 외교노선을 따랐던 모양이다. 왕권강화용 외교노선을 다시 회복한 것이다.

그러나 이 동맹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듬해인 579년에 진지왕이 폐위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신라는 오랫동안 어느 나라에도 조공단을 파견하지 않았다(제7기). 

정권안보용 외교에 반대했던 미실

동륜태자 암살 이후와 제1차 집권기 때에 나타난 미실의 대중국 외교노선은 왕권강화용, 즉 정권안보용 외교를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그럼, 어린 진평왕과 잠자리를 같이하면서 공동권력의 주도권을 장악한 제2차 집권기 때 나타난 미실의 외교 스타일은 어떠했을까?

미실이 579년에 제2차 집권에 성공한 이후, 중국에서는 581년에 양견(수문제)이 북중국을 장악하고 수나라를 건국했으며, 이 수나라가 589년에 남중국의 진을 멸망시키고 중국 통일에 성공하는 등의 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 시기에 신라는 중국의 어느 나라와도 동맹을 체결하지 않았다. 수나라를 중심으로 중국 통일의 기운이 부는 상황 속에서도 신라는 그렇게 했다. 웬만한 나라 같으면, '조만간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할 것'이라는 기대 하에 수나라에 미리 줄을 댔을 법도 하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을 보면, 신라가 '상황이 확실해질 때까지 관망하겠다'는 방침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후에도 신라는 한동안 수나라와 동맹을 체결하지 않았다. 신라가 수나라에 조공단을 보낸 것은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지 7년이 경과한 596년이었다(제8기). 수나라의 지위가 확실해지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수나라와 손을 잡은 것이다.

<화랑세기>에 따르면 미실은 610년대 중반 이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이므로, 제9기와 제10기에는 미실이 살아 있었을 수도 있고 이미 죽은 사람이었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제8기까지의 외교 패턴이 제9기와 제10기에도 여전히 이어졌다는 점이다. 신라는 당나라가 중국을 통일한 618년으로부터 처음 3년간은 당나라에 조공단을 보내지 않았다(제9기). 신라는 당나라의 지위가 확실해지는 것을 지켜본 뒤인 621년에 가서야 비로소 당나라와 동맹관계를 열었다(제10기).

위와 같은 제2차 집권기에 나타난 미실의 외교 스타일은 '확실하지 않으면 동맹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좋은 나라' '나쁜 나라' '이상한 나라'도 다 필요없었다. 미실에게는 오로지 '확실한 나라'뿐이었다.

미국 제일주의 외교, 정권 안보 위한 것에 불과

<선덕여왕>에서 진지왕 역을 맡은 임호.
 <선덕여왕>에서 진지왕 역을 맡은 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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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륜태자 암살과 두 차례의 집권에서 나타난 미실의 외교 스타일을 종합하면, 미실은 왕권강화용 즉 정권안보용 외교에 반대하는 한편 '확실한 나라와만 동맹을 한다'는 외교 방침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드라마에서처럼 강대국 사신 앞에서 "너희 나라 황제를 데려오라"며 큰소리를 뻥뻥 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역사 속의 미실은 '확실한 나라와 동맹을 체결하여 군주의 이익이 아닌 나라의 이익을 도모한다'는 외교 독트린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른 바 '미실 독트린'이라 할 만한 것이었다.

그런 독트린을 가진 미실이 오늘날 환생한다면, 그는 분명히 지금의 대한민국 외교에 대해 분통을 터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오늘날 한국은 핵심 동맹국을 선택할 때에 진흥왕과 동륜태자의 노선 즉 '정권안보용 외교노선'을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정통성이 취약한 박정희·전두환 정권의 사례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듯이, 한국 정부가 미국 제일주의 외교를 취하는 목적은 본질적으로 정권안보를 위한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아프가니스탄 재파병 문제에서 또다시 나타났듯이, 미국 제일주의 외교가 과연 한국에게 이익이 되는지 여부는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될 문제다. 한국에게 확실한 이익을 준다면 또 모르겠지만, 한국의 젊은이들과 한국의 돈을 공짜로 끌어다가 자국의 세계전략을 수행하려는 '힘 없는 미국'이 과연 한국에게 '확실한 나라'라고 할 수 있을까? 중동과 중앙아시아의 '피라미'들을 상대로 그처럼 버거운 싸움을 하는 미국을 보면서, 미실은 아마 '미국도 이제 볼짱 다 봤구만'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세계 각지에서 미국의 영향력이 현저히 퇴조하는 상황 속에서 자국에게 이익은커녕 손해만 안겨주는 미국을 여전히 최고로 떠받드는 나라는 아마 한국밖에 없을 것이다. 최근의 중의원 총선에서도 나타났듯이, 미국을 맹종하던 일본마저도 요즘은 서서히 태도를 바꾸고 있지 않은가. 국익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미국 제일주의를 신봉하는 한국의 외교는, 미실이 그토록 싫어하던 '정권안보용 외교'라고밖에 볼 수 없을 것이다.


태그:#선덕여왕, #미실, #남북조, #동맹국, #한미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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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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