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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구 게이트볼 시무식 시구식 때 고사를 지냈습니다
▲ 고삿상. 우리 구 게이트볼 시무식 시구식 때 고사를 지냈습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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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가 웃고 있네, 거 자알 생겼다아"
"해마다 웃는 거였는데 뭘." 

웃고 있는 모양새가 그럴 수 없이 착하고 편안해 보입니다. 돼지머리에 자꾸 고삿돈이 꽂히고 있습니다.

"어쩐지 올해는 내가 선수로 좀 날릴 거 같은 생각이 드는데…."
"고삿돈 꼽구 절을 하면서 빌어야 그렇게 되지."

우스갯소리지만 남편은 못들은 체 합니다. 고삿상 앞에서 절을 올릴 남편이 아닙니다. 실은 나도 절을 하고 싶지가 않습니다. 종교적인 문제도 있고 고사를 풍습으로 행사로만 받아들이면서 구경할 뿐입니다.    

해마다 삼 월이 되면 우리 구 게이트볼 협회에서는 한강 둔치 구장에서 시무식과 시구식을 합니다. 돼지머리와 시루떡을 놓고 고사도 지냅니다.

대회 임원들은 물론이고 일반 회원들이 절을 올리는 모습은 얼마나 정중한지 모릅니다. 그들이 고삿상 앞에서 올리는 기원은 해마다 똑같을 것입니다. 우리 구 전체 게이트볼 회원들의 건강과 행운 친목 발전 기타등등을 기원하고는 하였을 것입니다.

나는 속으로 이번엔 건너 동네 게이트볼 회장이 절을 하네, 아 고수나 다름없는 저 어르신도, 저 형님도 하면서 한참을 바라보고 있는데 누군가가 와서 가만히 팔짱을 꼈습니다. 그리고 낮은 소리로 말했습니다.   

"형님은 절 안 올리세요?"
"알면서 뭘 그래"

"난 아까 우리 동네 회장이 절 올릴 때 속으로 내 기원을 실었어요." 
"그런 방법도 있었네, 근데 자네 하느님이 섭섭해 하시지 않을까"
"요즘 남편 다니는 회사가 보통 어려워야 말이죠. 언제 짤릴지 모른대요. 불안해 죽겠어요. 온 천지에 대고 일 빨리 풀리게 해달라구 빌고 싶은 심정이라구요"

뭐라고 위로를 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요즘은 실물 경기까지 침체해서 너 나 없이 사정이 어렵습니다. 우리 집에도 실직자가 생겼습니다. 나는 나대로 재작년에 남편 모르게 투자한 펀드가 반토막이 났습니다. 어제 보니까 반토막도 못 건지게 생겼습니다. 그런데다가 환율이 치솟아서 잔뜩 마음 먹고 있던 남편의 희수기념 크루즈여행도 미루고 있는 중입니다. 나 역시 사방 팔방에 대고 두 손 모아서 이 어려운 시기가 빨리 지나가게 해달라고 빌고 싶은 심정입니다.

"근데 형님, 참 묘해요. 그렇게 기원을 실어보내고 나니까 글쎄 탁 털어버린 것 같이 속이 시원해져요. 나 오늘 경기 아주 잘 할 거 같아요. 형님도 선수로 뛰죠?" 
"엉. 잘해보자구."

"어쩌면 3, 4회 전 쯤에서 형님네 팀이랑 붙게될지도 모르겄네. 사정 안 봐줄거예요"
"나도 마찬가지라구" 

게이트볼은 혼자서 하는 경기가 아닙니다. 혼자 아무리 플레이를 잘 한다 해도 단체 경기라 승부는 모르는 법인데 3, 4회전까지 올라갈 의욕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니까 고삿상이 활력소 구실을 단단히 한 모양입니다. 그러고 보면 올해 고삿상은 예삿 고삿상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 친구는 자전거에 둔 스틱을 가지러 자전거들이 모여 있는 쪽으로 갑니다. 내 시선은 나도 모르게 고삿상으로 돌려졌습니다. 나도 그 친구처럼 절을 올리는 누군가의 어깨 위에라도 내 기원을 싣고 싶어졌습니다. 

아까 보다 고삿돈이 더 많이 꽂혀져 있습니다. 고삿돈이 아니라 그 자리에 와 있는 어떤 보이지 않는 신에게 올리는 간절하고도 애절한 기원문만 같아 보입니다. 그래선지 돼지머리가 이상하게도 정겨워 보입니다. 재앙을 막고 복을 불러다 주는 이 세상 최고의 제물다워 보이는 것입니다. 

마침 한 남자회원이 절을 올리려고 신발을 벗고 돗자리에 들어서고 있습니다. 그 모습이 정중합니다. 단정하게 코트를 여미고 양 손을 모아 잡은 그 예절 바른 모습을 보자 이때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옆에 남편이 산통을 깼습니다.

"가만, 건너 동네 어르신이잖아 여전히 건강하시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달걀을 떨어트린 기분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더 기가막힌 것은 더는 절을 올릴 사람이 없는지 돗자리를 걷고 있습니다.

나는 한강을 바라보았습니다. 바람이 조금 있습니다. 한강 물이 유난히 푸르러 보입니다. 으슬으슬 춥습니다. 남편도 으슬으슬 추웠던지 현수막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아마 따근한 커피를 뽑아 먹을 모양입니다. 그런데 산통을 깨고 가는 그 뒷 모습이 왜 그리 야속하고 미운지를 모르겠습니다.

그런 내 속을 들여다 보기라도 한 듯이 우리동네 건너편에 사는 어르신이 와서 내 손에 커피잔을 들려 주었습니다. 팔순이 지난 어르신입니다. 어르신은 게이트볼 실력도 고수 중에 고수지만 자전거를 아주 잘 탑니다. 바람을 가르며 자전거를 타는 뒷 모습에서는 전혀 나이를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오늘도 자전거를 타고 왔습니다. 

"제가 뽑아 드려야 하는데, 고맙습니다"
"추워 보여서. 올해도 건강하라구"
"형님도 건강하세요."

어르신은 언제 만나도 덕담부터 합니다. 마음이 그렇게 따뜻해서인지 얼굴 표정이 늘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경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 모습이 달라집니다. 스틱으로 게이트나 볼을 겨누는 눈빛이 무섭고도 날카롭습니다. 아들 딸 모두 분가시키고 방 몇 개를 세놓아 혼자서 사는 어르신에게도 경제가 요즘 같을 때는 방셋 돈이 제대로 들어오지를 않아 힘이 들텐데 그런 내색이 하나도 없습니다.

커피를 마시고 나서 보니까 사방 분위기가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입니다. 그새 복을 부르는 돼지머리가 사라졌습니다. 돼지머릿고기로 변해서 여러개의 접시에 가지런히 아주 먹음직하게 담겨져 있습니다.

시루떡들을 돌리고 소줏잔들이 오가고 덕담들도 오가고 웃음꽃들이 만발을 하였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작년 12월10일 송년 동호인 대회를 보내고 나서 처음 만나는 얼굴들입니다.   

고사가 끝나고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게이트볼 경기는 활력소입니다
▲ 시무식 날에 게이트볼 경기 고사가 끝나고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게이트볼 경기는 활력소입니다
ⓒ 김관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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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가 시작된다는 마이크 소리가 났습니다. 나는 내 자전거로 가서 스틱을 꺼냅니다. 나는 2회전 경기에 들어가지만 그래도 준비는 해 두어야 합니다. 스틱에 헤드를 끼워 바짝 조이고 있는데 아까 그 친구가 제 4 구장으로 뛰어 가다가 말고 소리쳐 말했습니다.

"형님 우리팀은 1회전에 걸렸어요"

웃는 모습이 예쁩니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은 괜한 말이 아닌 모양입니다. 그 웃는 모습이 복을 품고 있는 듯이 보이었습니다. 복을 품고 있으면 부자나 다름이 없습니다. 나는 그 친구가 이 어려운 시기를 잘 넘기고 언젠가는 부자가 되기를 바라면서 사람들 사이로 크게 말했습니다.

"꼭 이기라구우---"
"형님도 파이팅---"

씩씩합니다. 그 모습이 내게는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나도 경기를 아주 잘 할 것만 같았습니다. 아니 아주 잘 해 볼 생각입니다.


태그:#게이트볼 , #고삿상 , #기원, #활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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