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친구들 점심 모임에 가려고 밖에 나왔습니다. 전광판에 내가 승차할 버스의 번호와 '5분' 숫자가 떴습니다. 두 정류장만 가면 모임 장소가 있는 빌딩이 나옵니다. 걷기 운동 겸 그냥 걸어갈까 하다가 시선을 돌려 건너편 아파트단지 위 하늘을 바라봅니다. 구름 한 점 없는 청자 빛입니다.

문득 그 옛날에 푸른 고추밭과 청자 빛 하늘이 생각났습니다. 흰 수건을 머리에 쓴 키 작고 등 굽은 할머니가 자잘한 조림 풋고추를 한 바구니 따가지고 고추 밭에서 나오면서 말했습니다.

"어쩜 하늘이 저리 좋은가 몰라. 올해도 온갖 것들이 풍년일 게야."

할머니의 그때 그 말을 생각하면서 속으로 중얼거려봅니다.

'어쩜 하늘이 저리도 청자 빛일까 오늘도 기분 좋은 날이 될거야'

서너 명이던 사람들이 그새 많아 졌습니다. 내가 타야 할 저상 버스가 왔습니다. 그 버스를 탈 사람들이 버스 앞문 앞에 줄을 섭니다. 청자 빛 하늘에 팔려있던 나는 맨 꽁무니에 가서 섰습니다. 그런데 앞문으로 내리는 사람들 때문에 긴 줄이 흐트러졌습니다. 앞문이 복잡해지자 일부의 사람들은 뒷문으로 몰려가서 빨려들어 가듯이 승차를 하고 있습니다. 기분이 좀 상합니다.

나는 맨 마지막에 굼뜨게 버스에 올랐습니다. 승차 태그를 하려고 코트 주머니에서 버스 카드를 꺼내드는데 입가에 팔자 주름이 있는 흰 와이셔츠의 운전기사가 미소를 머금고 목례를 합니다. 순간 나도 모르게 환하게 웃으면서 운전기사보다 더 깊은 목례를 했습니다. 운전기사에 눈빛이 의례적인 게 아닌 집안 어르신을 모시는 따듯한 눈빛이었기 때문입니다.

운전기사는 동작이 굼뜬 흰머리의 나를 배려해서 내가 승차태그를 하고 몸을 돌려 누군가가 앉아있는 의자의 등받이를 붙잡자 그제야 천천히 출발을 했습니다.

그런데 빈 자리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미 뒷문으로 승차한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머리를 숙이고 스마트 폰에 열중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긴 뒷문으로 승차하면 자리 잡기가 쉽습니다. 줄 서서 제대로 앞문으로 승차하면 손해일 경우도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합니다. 나는 옆에 서있는 중년 여자처럼 팔을 올려 손잡이를 꽉 잡고 섰습니다.

한 정류장을 막 지나갔을 때 내 앞에 앉았던 할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납니다.

"여기 앉으세요. 전 이번에 내려요."
"저도 이번에 내려요."

그러자 손잡이를 잡고 섰던 내 옆에 중년여자가 냉큼 그 자리에 앉습니다. 할아버지가 창가에 하차 벨을 누르고 의자 등받이들을 하나씩 짚어가면서 느릿느릿 뒷문을 향해 가더니 하차 태그를 합니다.

버스가 정류장에 멈춤니다. 뒷문이 열리고 할아버지가 가뿐히 내립니다. 할아버지가 젊은 사람처럼 가뿐히 내리는 모습이 이상합니다. 그런데 하차 태그를 하고 보니까 버스가 보도 경계석 아주 가까이에 멈춰 있습니다.

그래서 할아버지는 버스에서 바로 보도에 발을 내디뎠던 것입니다. 운전기사의 배려가 느껴졌습니다. 물론 나도 하차 때마다 의지 삼아 잡고는 하던 뒷문을 붙잡지 않고 바로 보도에 발을 내디뎠습니다.

버스가 보도 경계석에서 많이 떨어져서 멈추면 교통약자들은 열린 버스 뒷문을 한 손으로 꽉 붙잡고 조심해서 깊어 보이는 차도에 발을 내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한두 걸음을 걸어서 보도에 올라갑니다.

그 저상 버스가 청자 빛 하늘을 이고 저만큼 멀어져 가고 있습니다. 운전기사의 도리 또는 의무일지는 모르지만 힘들고 고된 업무 중에도 그런 배려들을 해주는 운전기사가 얼마나 고마운지 모릅니다.

아까 내가 청자 빛 하늘을 보면서 '오늘도 기분 좋은 날이 될거야'라고 생각한 대로 지금 나는 기분이 참 좋습니다. 친구들 모임에 가면 즐거운 이야기들을 많이 듣게 될 것 같은 예감도 들었습니다.


태그:#청자빛 하늘, #운전기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쓰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