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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 스타 배용준이 출연해 화제를 모은 <태왕사신기>(MBC 수·목 밤 9시 55분) 를 필두로, 사극에서 좀처럼 다루어지지 않았던 내시를 내세운 <왕과 나>(SBS 월·화 밤 9시 55분) , 그리고 조선 시대 개혁 군주로 꼽히는 정조를 다룬 <이산>(MBC 월·화 밤 9시 55분)까지 '텔레비전만 켜면 사극'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학창 시절 시험을 위해 외우던 딱딱한 역사를 소재로 했음에도 세 사극 모두 눈부신 선전을 하고 있다. 드라마가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것은 드라마를 만드는 입장에서는 기쁜 일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사극이 높은 시청률을 기록할 때는 제작진을 괴롭히는 문제가 꼭 하나 따라오기 마련이다.

 

바로 역사 왜곡 논란! 사극도 '극'이다 보니 역사서를 그대로 참고해 옮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아무리 사극이라지만 이 역시 드라마 아니던가. 그러다 보니 야사나 역사서에 기록된 단 한 줄을 갖고 온갖 상상력을 발휘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심지어는 역사와 명백히 다른 사실마저도 극적인 재미를 위해 허용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태왕사신기>에서 광개토대왕 시절까지 다섯 개 부족이 왕권을 위협했다고 다루어지는 내용이나 <왕과 나>에서 내관 김처선의 사랑을 다루기 위해 나이를 한참 아래로 낮춘 것 등이 바로 그러하다.(이는 역사서뿐 아니라 여러 매체에서 기사화된 바 있으므로 다시 언급하지 않겠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레 '역사 왜곡 논란'이 거세지고 사극 드라마에 대해 비판하는 이들도 나오기 마련이다. 또 그 비판에 맞서 드라마를 옹호하는 이들이 나온다. 얼마 전 한 신문을 보니 ‘아쉬운 왜곡 논란, 우리는 왜 역사에 관대하지 못할까’라는 소제목이 보였다.

 

이 기사에서 기자가 주장한 내용의 핵심은 "역사를 '다양성'의 시각에서 보자"는 것이었다. 맞는 얘기다. <왕과 나>가 표현한 예종 독살 사건에 대해 이 기자는 시청자들의 호된 비판이 아쉽다고 했다. 독살 가능성을 충분히 의심할 수 있다는 역사적 의견도 있다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이덕일씨가 쓴 <조선왕 독살 사건>을 읽어 보면 예종뿐 아니라 드라마 <이산>의 정조 등 조선 왕조 내내 독살설에 연루된 임금이 여러 명이라고 나온다.

 

이 기자의 말처럼 역사는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고 더욱이 사극 드라마는 '사'보다 '극'에 방점이 찍히는 만큼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역사적 진실과 다른 내용을 그려주는 경우도 발생할 수도 있다. 맞다. 다 맞는 얘기다.

 

사극을 대중들은 과연 '극'으로만 받아들이는가

 

그런데 이런 논란 중에 정말 중요한 것이 하나 빠져 있다. '역사 왜곡이다', '사극도 극이다'라는 팽팽한 의견 대립보다 중요한 문제가 있다. 바로 이 의견 대립을 피하기 위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사실은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다.

 

'사극'도 '극'이기에 어느 정도의 상상력이 발휘되는 것은 어쩔 수 없겠으나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는 경우 그 파괴력이 대단하다는 점에서는 분명히 신중을 기할 필요가 있다. 나이 어린 청소년이나 역사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이들은 사극에서 보여주는 내용이 다 진실이라고 믿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무식한 사람이 어디 있겠냐고? 이 얘기를 한 번 들어보시라.

 

"백제 마지막 왕이 누구였지?"

 

난 예전에 중국에 있는 한 보습 학원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그때 같이 일하던 영어 선생이 들려준 얘기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백제 마지막 왕이 누구냐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을 못하더라는 것이었다. 워낙 장난기가 많은데다가 아이들이 당연한 질문에 멍한 표정을 짓자 분위기를 바꾸고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의자왕이잖아. 의자왕. 그리고 그 아들이 걸상왕이었는데. 걸상왕."

 

이 선생은 '걸상'이라는 얘기까지 나오면 아이들이 모두 다 웃고 장난이라고 여길 줄 알았다고 한다. 그래서 웃으며 했는데 다들 열심히 듣더라는 것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중국에서 얼마간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난 그 얘기가 당연한 결과라고도 생각하게 됐다.

 

중국에서 나고 자라거나, 어린 시절에 온 아이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배울 기회가 별로 없다. 어려서부터 중국 학교에 다니는 등 한국과 교육 상황이 다르다 보니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6·25가 무슨 날이야?"
"그것도 모를까 봐요. 남한이랑 북한이랑 전쟁한 날이잖아요."
"그럼 그게 언제 일어난 건데?"
"그게 6월 언제지?"

 

그러다 보니 이런 믿기지 않는 대화도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선생에게서 들은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이다. 그것도 초등학생도 아닌 중학생이 이런 대화를 할 정도였다. 그만큼 중국에서 자란 우리나라 아이들은 역사에 무지한 경우가 많다. 한 번은 국어 수업 대신 한 고등학생이 원해서 역사 수업을 해준 적도 있다.

 

텔레비전에 나왔어요!

 

그런데 그런 아이들이 가끔 자신만만하게 말할 때가 있다. 바로 이 사극들이 높은 인기를 얻을 때다. 간혹 사극을 보면서 역사적 사실을 알고자 하는 아이들도 있으나 대부분 사극에서 나온 내용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많다. 다소 잘못 알거나 다르게 생각할 여지가 있는데 주장이 강하다 싶어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꼭 나오는 말이 있다.

 

"텔레비전에 나왔어요!"

 

다시 말해 사극에서 봤다는 것이다. 이것이 꼭 외국에 나와 있는 우리나라 학생들만의 이야기일까? 중국에 있는 아이들보다 한국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은 우리나라 역사를 접할 기회가 많으니 덜하겠지만 사극을 보면서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경우도 충분히 있지 않겠는가.

 

옆에서 부모가 지도를 해주면 모를까 그렇지 않다면 더 큰 문제가 아닐까. '몇 세 이상 관람가'라고 표시가 되어 있지만 사실 누군가가 일일이 집을 돌아다니며 10살짜리가 <이산>을 보고 있는데 "부모님이랑 같이 볼 때까지 볼 수 없어"라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니던가. 또한, 부모와 같이 시청한다고 해도 역사 공부에서 멀어진 부모들이 자식들에게 역사를 다양하게 바라볼 수 있는 조정자 역할을 해 줄 수 있는가도 의문이다.

 

오래도록 보지 않다 보면 자연스레 망각하게 되는 것이 사람이고 역사 역시 마찬가지인 법. 어른이라고 해서 다 역사에 정통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당장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라. 고조선부터 조선 시대에 이르기까지 왕의 이름을 쭉 나열하고 중요했던 사건들을 막힘없이 이야기할 수 있는지. 생각보다 쉽지 않은 일이다.

 

이렇게 되면 자연스레 아이들이 사극에서 전해주는 사실들을 별다른 비판 의식 없이 받아들이는 경우가 발생할 수 있다. 그러니 사극들의 '역사 왜곡'을 걱정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괜한 걱정인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고민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역사에 관심이 없거나 어린이·청소년층이 극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예상해서, 역사를 '책에 나온 그대로만 그려라'고 한다면 사극도 '극'인데 너무하다는 반발이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는 드라마를 제작하는 입장에서는 당연한 불만이다.

 

특집 방송을 만들어 보다 의미 있게 쓰자

 

그렇다면 이제는 대안을 찾아볼 때다. 그래서 이런 제안을 하고 싶다. <왕과 나>, <이산>, <태왕사신기> 모두 막을 내리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남았다.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 드라마들의 경우 종종 마지막에 특집 방송을 만들어 보내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이 특집 방송을 좀 더 의미 있게 쓰자는 것이다. 사극이 방영되는 동안 지적되었던 역사 왜곡 논란이 일었던 문제에 대해 깊이 있게 다루거나 토론을 해보는 시간을 마련해보는 것이다. 사극을 재미있게 보다 보면 사극과 관련된 책이라도 사보고 싶은 것이 사람 마음이다.

 

책 읽는 것을 싫어해도 사극을 재미있게 보았으면 그와 관련된 여러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다. 그런 마음을 잘 살펴 출연진들과 제작진이 보다 흥미롭게 사극에서 역사 왜곡 논란이 일었거나 독특한 시선으로 역사를 해석한 부분에 대해 재미있게 설명해주고, 그 당시 시대 상황에 대해 보다 흥미롭게 보여줄 수 있는 특집 편을 만들어 주면 어떨까.

 

특집 방송을 통해 어떤 장면에서 어떤 에피소드가 있었다거나 '최고 명장면 베스트 5'를 선정하는 것도 좋다. 그렇지만 그 드라마를 사랑해준 시청자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은 사극이 '극'이라는 이유로 허구성과 다양성을 너그럽게 보아준 시청자들에게 역사에 대해 정말 진지하게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을 갖게 해주는 것은 아닐까?

 

<태왕사신기>, <이산>, <왕과 나> 등 세 사극이 모두 많은 이들에게 인기를 얻고 있다. 오랜만에 재미있는 사극 덕분에 불고 있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역사'에 대한 진지한 성찰로 옮겨갈 수 있는 디딤돌이 되도록 사극 제작진들이 고민해주었으면 좋겠다.

 

이 제안들이 실현되어 세 사극 모두 멋진 유종의 미를 거둘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태그:#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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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넓게 보고 싶어 시민기자 활동 하고 있습니다. 영화와 여행 책 등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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