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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섬진강변 평사리공원에 위안부 할머니 추모탑이 세워질 계획이다. 사진은 평사리 공원.
ⓒ 이성오
정서운(일본군 위안부) 할머니의 기일이 2월 말(2월 26일)인지라, 나는 이맘때면 항상 섬진강변 평사리공원을 찾는다.

올해는 제법 찾는 사람도, 차린 음식도 많다. 평사리에 사는 강동오씨(할머니의 의아들)가 음식을 장만했는데, 추모비 건립에 동의하는 몇몇이 오기로 해서다.

무엇보다 할머니에게 추모비 소식을 전해줄 수 있어 기쁘다. 어머니를 비롯하여 할머니들의 역사가 여기 기록되고 기념될 것이니.

나는 할머니의 늦둥이 아들이 되었지만 '어머니'라고 불러 드린 건 병실에서 맞이한 생일날 딱 한번 뿐이어서, 아직도 어머니라 부르는 것이 어색하다. 듣는 사람도 어색할 것 같아 할머니라 부르련다.

벚꽃은 겨우 꽃망울이 갓 생기기 시작하는 정도고 매화는 제법 드문드문 폈다. 차창 밖으로 유유히 흐르는 섬진강을 바라보며 정서운 할머니와 나의 인연을 생각해 본다.

자식 없는 '위안부' 할머니들... 아파도 돌봐줄 이조차 없어

▲ 2월 26일 할머니 기일에 맞춰 제사에 참가한 사람들. 가운데가 의아들인 채수영씨.
ⓒ 이성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오."

성경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할머니의 인생 전반부는 애통함의 연속이었고 후반부에서는 위로를 받았다.

14살에 일제에 의해 '위안부'로 끌려가서 8년 뒤 해방을 맞아 돌아오기까지는 말할 것도 없고, 돌아와서도 일본군이 억지로 가르친 아편을 끊기 위해 사투를 해야 했다. 자기를 좋아했던 동네총각과 우여곡절 끝에 결혼했지만 이내 사별하는 슬픔을 맛봐야 했다.

옛날 청나라에 끌려갔다 돌아온 여자들이 '화냥년'으로 불리며 멸시받았듯이 할머니 또한 똑같은 고난을 겪었다. 할머니는 마흔 중반에 한 살 작은 중년의 김철균 할아버지를 만나 결혼했다. 이때부터 할머니는 이전의 애통함을 위로받기 시작했다.

김 할아버지 역시 징용으로 끌려가서 겪은 고역과 구타로 육체적 정신적 상처를 가지고 계신 분이었기에 서로가 상처를 어루만지며 위로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1991년 김학순 할머니를 필두로 할머니들의 공개 증언이 나오고 서울에서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가 주최하는 수요집회가 시작되었다.

정서운 할머니 역시 1992년 '위안부'라는 사실을 공개한 뒤, 국내외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미국에서 강연도 하고 다큐멘터리도 찍었다.

할머니들의 위안부 생활은 가장 말하고 싶지 않은 과거이면서 동시에 가장 풀고 싶은 한(恨)이다. 공개증언을 하기까지 정말 많이 망설였겠지만 용기를 내어 말하고 난 뒤엔 꽉 막혔던 가슴을 쓸어내리는 후련함도 느꼈으리라!

할머니가 다쳐서 입원한 뒤에는 아들이 된 나에게 위로를 받으셨다. 할머니는 2004년 늦가을 침대에서 떨어져 대퇴부 골절을 입고 입원하셨다. 할머니는 위안부로 끌려가서 고초를 겪은 탓에 자식을 낳을 수 없었다. 그래서 할머니 병문안을 갔을 때 할아버지만 병실을 지키고 계셨다. 문제는 할아버지도 간병을 받아야 될 정도로 건강이 좋지 않으셨다는 거다.

결국 그 다음날부터 내가 병실을 지켰다. 병실을 지킨 지 열흘 쯤 되던 날 할머니는 할아버지와 의논하고 나를 아들로 삼아 주셨다. 할머니는 다리를 고정시킨 채 옴짝달싹 하지 못하고 누워 있었다.

등에 있는 욕창이 가려울 때나 대·소변을 봤을 때, 잠이 오지 않을 때도 항상 나를 찾았고 나는 기꺼이 그에 응했다. 할머니는 뒤늦게 나의 위로를 받게 됐지만, 만약 내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이것은 제도적인 문제다. 위안부 할머니의 대부분이 가난하고 자식이 없으시다. 이 말은 사소한 사고나 병에도 결국 곁에서 보살펴 줄 사람이 없어 비참하게 돌아가시는 일이 생긴다는 뜻이다.

위안부 할머니의 입원에 대해서는 입원비 면제라는 최소한의 지원이 아니라 원하면 언제든 간병인을 둘 수 있도록 지원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

할머니들을 마지막 위로하는 길, 과거를 역사로 기록하는 일

할머니는 2004년 2월 26일 돌아가셨다. 나는 할머니의 유해를 섬진강에 뿌리고 난 뒤 해방감을 느꼈다. 이유야 어떠하든 난 할머니 곁에 끝까지 있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여러 단체들의 도움으로 유료 간병인이 구해지자 나는 한 달여의 간병생활을 정리하고 그 뒤로는 한 번씩 방문을 하였다. 방문할 때마다 할머니의 건강이 조금씩 악화되어간다는 것을 느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장례식장에 가서 유해가 뿌려질 때까지 계속 울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게 꼭 나 때문인 것 같아서 죄책감에서 울었다. 그래서 할머니를 보내드리고 난 뒤에는 더 이상 할머니를 떠올리지 않으려 했다. 할머니로부터 자유롭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놓치고 있었다.

살아계신 할머니들이었다. 할머니들은 다들 연로하시고 살아 계실 날이 그리 많지 않다. 다들 돌아가시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할머니들의 역사는 그냥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도 되는 것일까!

사실 '정신대'로 알려진 일본군 위안부 문제는 남에게 으스대고 자랑할 만한 성질의 역사는 아니다. 하지만 한 나라의 역사는 항상 잘 나가고 못 나간 역사가 공존하고 그 중에서 힘들고 어려웠던 과거는 그것대로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위안부 문제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하나는 일제가 우리 민족을 지배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강제로 여성을 쾌락의 도구, 성노예로 농락한 것이다.

이에 따른 교훈도 두 가지이다. 다시는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여성이 성적 도구로 여겨지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교훈은 일본이 진정으로 제국주의 시대의 만행을 사죄하고 뉘우치지 않고 있고 또 우리나라 내에서도 다른 나라 여성에 대해서 성적 학대가 나타나고 있으므로 잊지 말아야 할 점이다.

할머니를 기억하는 것은 곧 이 두 가지 교훈을 되새기는 일이다. 섬진강변에 세우려는 '평화의 탑'(위안부 할머니 추모비)은 정서운 할머니를 비롯한 모든 위안부 할머니들의 고난에 대한 추모를 상징하고, 잊지 말아야 할 역사적 교훈의 장을 남기는 일이다.

민·관이 함께 만드는 역사의 장

▲ 평사리공원에 세워질 조형물.
ⓒ 정홍철
섬진강변 평사리 공원에 추모비를 건립하는 과정은 위안부의 역사를 알리는 활동이어야 한다. 단지 뜻있는 몇몇이 건립하고 몇몇이 기억하는 추모비여서는 안된다.

정서운 할머니의 유해가 뿌려진 공간으로서가 아니라 위안부 문제를 상기하고 교훈으로 삼아야 할 공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최대한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참여가 필수적이다.

일본은 원폭 투하지역에 엄청나게 큰 공원과 기념관을 세워서 마치 일본이 대동아전쟁에서 가해국이 아닌 피해국인 듯한 여론을 만들어 내고 있다. 역사인식을 호도하는 데 민관이 합심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제대로 된 역사인식을 세우기 위해 민·관이 함께 하는 것은 정말 보기 좋은 모습니다.

가장 많은 위안부가 끌려간 경상남도와 추모비가 건립되는 하동군이 일본의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채택한다면 어떨까. 비록 그것이 일본에 미치는 정치적 압력이 크지 않다 하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라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우리 국민들의 관심을 촉발시키는 좋은 계기가 될 것이다.

직접 관련도 없는 미국 하원에서 일본군 위안부 문제 결의안을 채택하고 상원에서 통과를 기다리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위안부 문제 해결에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해야 하는 우리나라에선 정작 국회도 지방의회도 위안부 결의안이 없다는 것은 조금 부끄러운 일이다.

하지만 늦어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는 것이 낫고, 아무리 늦어도 내일보다는 오늘이 빠르다고 하지 않든가. 미 의회에서 분위기를 만들어 줬으니 오히려 지금이 적기일 수 있다. 이번 기념비 건립에서는 들러리가 아닌 한 꼭지를 담당하는 주체가 되길 바란다.

나는 이런 상상을 해본다. 섬진강 벚꽃길을 따라 평사리 공원으로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소풍을 와서 추모비를 구경하고 기판에 새겨진 정서운 할머니와 일본군 위안부의 이야기를 읽고 기억해 준다면 벚꽃 내음 만큼이나 달콤한 모습이 아닐까.

애통함으로 한평생을 보냈을 위안부 할머니 모두에게 말하고 싶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기억해주고 있으니, 정녕 당신의 인생은 아름다웠노라고.

덧붙이는 글 | 문의 : 강동오 집행위원장(055-884-8254, 011-9339-7759, mu0hwa@hanmail.net / 채수영 실무담당(010-4552-3864, soopool21@naver.com) / www.halmuni.org / 입금계좌 : 국민은행  652702-04-045749(채영신), 우리은행 1002-133-626773(채영신), 농협 803-02-683912(채영신), 우체국 601484-02-147671(채영신)


태그:#위안부, #3.1절, #정서운, #할머니,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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