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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대통령과 부통령을 동시에 선출했는데, 왜 1960년 3월 15일 선거 때엔 4대 대통령과 5대 부통령이 함께 출마한 거죠?"

마산 3.15 의거 기념관 내부를 관람하던 한 아이가 불쑥 던진 질문이다. 미국식 '러닝메이트' 제도와 대조하며, 대통령과 부통령의 수가 다른 이유를 궁금해했다. 곁에 있던 다른 아이는 부통령이라는 직위가 생소하다며 설명해달라고 졸랐다.

순간 당황했다. 명색이 역사 교사인데, 지금껏 부통령에 대해 딱히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아는 거라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형으로 일컬어지는 이회영 가문의 일원인 이시영이 초대 부통령이었다는 것과 이승만의 최측근인 이기붕을 부통령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3.15 부정 선거를 자행했다는 정도가 고작이었다.

"6.25 전쟁 중 국민방위군 사건 등으로 이시영 부통령이 사퇴하면서 보궐 선거가 치러졌던 것으로 안다."

당장 생각나는 대로 둘러댔는데, 다행히도 엉뚱한 답변은 아니었다. 부통령직에 대한 설명을 위해 스마트폰을 꺼내 관련 자료를 서둘러 찾았다. 대통령 유고 시 권한을 승계한다는 것 외엔 별다른 역할이 없는 직위였다. 유명무실했던 부통령제는 4.19 혁명으로 전격 폐지됐다.

아이들의 스마트폰을 다루는 실력은 나보다 한 수 위였다. 설명하기도 전에 이미 역대 부통령들을 줄줄 뀄다. 그들의 행적에 대한 이면과 다양한 역사적 의미를 양념 치듯 언급하는 걸로 충분했다. 아이들이 김성수와 함태영, 장면으로 이어지는 낯선 이름의 역대 부통령 계보를 읊는 건 난생처음 보는 장면이었다.

한파주의보가 내려진 지난 주말, 기말고사를 끝낸 고1, 고2 아이들 스무 명과 함께 3.15 의거와 부마민주항쟁을 주제 삼아 경남 창원(마산)으로 답사를 다녀왔다. 사회과 동료 교사 다섯 분이 동행했다. 현대사 학습 동아리 회원도 있었지만, 대개는 답사 홍보물을 보고 자발적으로 신청한 아이들이다.

모두 영화 <서울의 봄>을 관람한 뒤 갑작스럽게 현대사에 관심이 생겼다고 했다. 예년 같으면 코스에 놀이공원 등이 들어있지 않으면 거들떠보지조차 않았는데, 추위 속에 종일 걸으며 역사 공부를 해야 하는 답사인데도 신청자가 폭주했다. 영화 한 편이 학교 교육에 미친 '나비 효과'다. 바야흐로 우리 현대사에 '봄날'이 왔다.

현대사 답사를 신청한 아이들

이곳 광주에서 마산 답사를 떠나려면 하루로는 무척 빠듯하다. 족히 왕복 5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거리인데다 요즘 같은 겨울철엔 해가 빨리 저물어 시간에 쫓겨 계획이 틀어지기에 십상이다. 볼거리야 지천이지만, 욕심부리지 않고 3.15 의거와 부마민주항쟁에만 주목한 까닭이다.

국립 3.15 민주 묘지를 시작으로, 마산상업고등학교(현 용마고등학교)와 도심의 3.15 의거 기념관, 부마민주항쟁 기념탑, 3.15 의거탑,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점을 거쳐 경남대학교에서 마무리하는 일정을 짰다.

시기만 다를 뿐, 마산에서 3.15 의거와 부마민주항쟁이 벌어진 장소는 거의 겹친다. 3.15의 위상에 부마민중항쟁의 역사적 의미가 조금 가려져 있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다.
 
국립 3.15 민주 묘지 내 김주열 열사의 묘소. 그의 묘소는 고향인 전북 남원과 서울 4.19 묘역에도 조성돼 있다.
 국립 3.15 민주 묘지 내 김주열 열사의 묘소. 그의 묘소는 고향인 전북 남원과 서울 4.19 묘역에도 조성돼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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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주열 열사의 모교에 세워진 흉상과 기념비. 뒤로 보이는 학교가 열사의 모교인 용마고등학교(옛 마산상고)다.
 김주열 열사의 모교에 세워진 흉상과 기념비. 뒤로 보이는 학교가 열사의 모교인 용마고등학교(옛 마산상고)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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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은 학습 의욕을 불러일으키고, 새롭게 알게 된 지식은 사물을 보는 눈을 틔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느낀다'고 일갈했다. 3.15 의거를 주제 삼은 건 김주열 열사의 삶을 기억하자는 취지였는데, 아이들의 시선은 당시 함께 희생된 다른 이들에게 가 있었다.

비탈진 언덕 위에 조성된 3.15 묘역에는 김주열 열사 외에도 여러 희생자가 모셔져 있다. 아이들은 그들 대부분이 교복을 입은 같은 또래의 고등학생들이었다는 점에 놀라워했다. 심지어 나이 어린 중학생도 있고, 학교에 가지 못한 17살의 노동자도 희생됐다며, 왜 죄다 10대뿐이냐며 짐짓 성을 내기도 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은 10대 학생들이 주축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자연스럽게 깨달은 것이다. 서울 북한산 자락에 자리한 4.19 묘역에 잠든 이들 역시 대부분 학생이라는 것도 머지않아 알게 될 테다. 한때 4.19 혁명이 '학생 의거'로 불렸다는 사실까지도.

김주열 열사의 모교인 용마고등학교 입구엔 그의 흉상이 세워져 있다. 등하굣길 후배들이 민주화를 위한 그의 희생을 떠올리게 될 것이다. 3.15 의거엔 시내 대부분의 중고등학교가 참여했기에 용마고등학교만의 역사는 아니다. 도심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간선 도로명이 '3.15 도로'이니, 마산 자체가 3.15의 도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3.15 의거 기념관을 찾아가는 길은 옛 골목길에 마실 가는 느낌이다. 도심 공동화로 쇠락한 곳 한가운데 높고 새뜻한 건물이어서 멀리서도 눈에 띈다. 3.15 의거 당시 민주당 마산시당이 있던 자리다. 건물 앞에는 '3.15 의거 발원지'라고 적힌 둥근 안내판이 바닥에 박혀 있다.

기실 역사적 사건의 '발원지'라는 건, 특정 장소와 단체 등이 독점할 수 없는 단어다. 사건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과 직접적인 원인을 구분해 서열을 매기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은 없다. 마치 '진짜 원조', '원조 중의 원조' 등의 팻말을 내건 식당과 비슷한 맥락이다. 굳이 3.15 의거의 '발원지'를 찾자면, 당시 마산 시민들의 분노가 끓어오르는 가슴속이다.

아이들은 3.15 의거의 정신을 기념관 밖에서 찾아냈다. 건물과 마주한 곳에 '인권, 자주, 평화의 다짐비'가 옹골차게 서 있다. 마산식 '평화의 소녀상'이다. 누군가 자신의 두툼한 패딩을 벗어 입혀놓았는데, 아이들은 이야말로 3.15 의거 정신의 구현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다짐비'를 감싸듯 에워쌌고, 자연스럽게 단체 사진을 찍었다.

'다짐비' 뒤편 오동동 문화 광장을 지나면 소담한 모습의 부마민주항쟁 기념탑이 얼굴을 내민다. 숟가락을 이어붙여 만든 새싹 모양의 탑이다. 이곳에서 민주화운동의 싹을 틔웠다는 의미다. 옛 마산의 중심 거리로, 20년 터울의 3.15 의거와 부마민주항쟁 시위대의 뜨거운 함성이 이곳에 모여 솟구쳤다.
 
오동동 문화광장에 세워진 부마민주항쟁 기념탑. 숟가락을 이어붙여 만든 새싹 형상의 조형물이다.
 오동동 문화광장에 세워진 부마민주항쟁 기념탑. 숟가락을 이어붙여 만든 새싹 형상의 조형물이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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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사의 봄' 계속 이어 나가야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김주열 열사의 시신은 유기된 지 거의 한 달만인 4월 11일 바다에 떠올랐다. 당시 마산시청(현 마산합포구청)에서 손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부둣가다. 세월이 흘러 옛 부두의 모습은 잃었지만, 시신이 인양된 곳 근처에 기념비와 동상을 세워 놓았다.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표지석. 옛 마산시청(현 마산합포구청) 인근의 부둣가로, 뒤편으로 멀리 마창대교가 보인다.
 김주열 열사 시신 인양지 표지석. 옛 마산시청(현 마산합포구청) 인근의 부둣가로, 뒤편으로 멀리 마창대교가 보인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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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속 시신 인양 당시의 참혹한 모습에 아이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들은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르고도 말단 부하에게만 책임을 전가하고 나 몰라라 한 이승만 대통령의 무책임한 행태에 더더욱 치를 떨었다. 4.19 혁명 과정에서 그의 권력욕에 수많은 이들이 희생됐지만, 그는 사임 후 하와이로 망명하는 것 외에 아무런 책임도 지지 않았다.

우뚝한 열사의 동상이 바다에서 불어오는 엄동설한의 칼바람을 막아주었다. 그곳에서 아이들과 함께 '민주주의라는 나무는 피를 먹고 자란다'는 경구를 떠올렸다. 열여섯 살 김주열 열사의 희생이 열두 해 동안 지속된 이승만 독재정권을 붕괴시켰다. 그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경남대학교에 다다랐을 땐 이미 해가 서산으로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경남대의 정문은 공식적인 사적지로 지정되진 않았지만 부마민주항쟁을 상징하는 사진의 배경으로 우뚝하다. 10월 16일 부산대학교에서 시작된 항쟁의 불씨가 이틀 뒤인 18일 이곳에 옮겨붙어 경남대생들이 어깨 겯고 시내로 진출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모름지기 대학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길을 인도하는 등대여야 한다. 시대를 초월하여 대학을 '상아탑'이라고 부르는 이유다. 기본적 인권조차 짓밟히던 엄혹한 유신정권 시절, 대학은 부패하고 폭압적인 권력에 맞서 결연히 싸웠다. 대학생들은 그것을 지성인으로서 소명으로 여겼고, 시민들은 그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지금의 대학은 어떠한가. 아이들은 교정을 거닐며 당시의 경남대와 지금의 경남대를 자꾸만 비교하려고 했다. 몇몇은 "부마민주항쟁의 성지이면 뭐해요. 한낱 '시골의 지방대'일 뿐인데"라며 비꼬기도 했다. 자랑스러운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학벌 구조에 조롱당하는 형국이다.
 
경남대학교 내 부마민주항쟁 시원석. 오가는 이 거의 없는 외진 곳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경남대학교 내 부마민주항쟁 시원석. 오가는 이 거의 없는 외진 곳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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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정에 설치된 기념물의 처지가 꼭 그렇다. '부마민주항쟁 시원석'이 대학의 중심인 본관이나 중앙 도서관 주변이 아닌, 오가는 사람 거의 없는 궁벽한 연못가에 덩그러니 세워져 있다. 그마저도 항쟁이 일어난 지 30년이 지난 2009년 졸업생들이 십시일반 뜻을 모아 마련한 것이라고 한다.

당시 항쟁의 시위대가 뚫고 지나간 정문 주변엔 대기업 취업과 고시 합격을 축하하는 현수막들로 요란하다. 이제 대학은 무한경쟁과 각자도생의 사회가 세워둔 등대를 향해 맹목적으로 치달리는 청년들의 전쟁터로 전락했다. 어쩌면 '시골의 지방대'에 부마민주항쟁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거추장스러운 역사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당시의 대학생들이 '서울의 봄'을 불러왔듯, 지금 예비 대학생들은 혹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산까지 와서 '현대사의 봄'을 싹틔우고 있다. 불의한 권력에 맞선 3.15 의거와 부마민주항쟁의 정신은 세파에 부침을 겪을지언정 사라질 리 없다. 영화 <서울의 봄>이 천만 관객을 앞둔 지금이야말로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할 순간이다.

태그:#서울의봄, #315의거, #부마민주항쟁, #김주열, #경남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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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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