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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은 통치체제가 전혀 다르고 그에 따라 사회가 수용하는 미술의 방향도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구조입니다."    

27일 서울 강서구 통일부 남북통합문화센터가 지난 4일부터 오는 12월 31일까지 특별전시 중인 <표현의 조건형식>에서 탈북민 오성철 화가(46)가 남북한 미술에 대해 이 같이 말했다. "북한은 미술가 개인을 중요시하는 개인적 사유가 존재할 수 없어 '예술가'나 '화가'의 의미와 본질을 찾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11년 전 북한을 탈출한 오 작가는 "여기 우리나라에서는 무엇보다 자기 생각과 느낌을 캔버스에 담아낼 수 있다"며 예술의 행복함을 강조했다.
 
오성철 화가
 오성철 화가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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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 남포 출신인 오 작가는 어려서부터 그림에 소질을 인정받아 군부대 '직관원'으로 복무했다. 직관원은 북에서 선전선동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는 직종이다. 북한은 기관마다 직관원을 두고 있다. 과거 극장영화 간판을 전문적으로 그렸던 직업과 유사하다.
     
그는 직관원을 발판으로 제대 후 화학공업성 화학단과 대학을 다녔다. 미대를 졸업하고 잠시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2009년 탈출을 감행했다. 오래전부터 북한에서의 삶은 자신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행동으로 옮긴 것이다.
       
급기야 탈북의사를 유선으로 전하고 심양의 우리 총영사관으로 뛰어들어갔다. 하지만 거기서 3년을 체류해야 했다. 보통 치외법권지역에 머물 때 일주일이면 입국조치가 이뤄지는 것에 비하면 극히 이례적이다. 3년은 그에게 북에 체포되지 않을까 매일 노심초사하는 두려운 시간이었다.  
    
그는 체류하면서 드로잉이나 초상화를 그리며 탈북하는 날만을 기다렸다. 2012년 어느 날 한국에 들어간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비행기로 바로 입국했다. 오랜 기다림 속에 그의 탈북과 대한민국 입국은 그야말로 전광석화같이 진행됐다.
     
4년 후에는 누나가 그를 따라 한국에 들어왔다. 그에게 유일한 피붙이이자 버팀목인 누나와 근 17년 만의 해우였다. 북에서 이미 돌아가신 부모를 대신해 한국에서는 양부모를 얻었다. 양부모들은 그를 자식처럼 여기며 격려와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고 한다.
     
오씨는 남한에서 처음 미술활동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의 질타를 받아 매우 힘들었다고 한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무지하고 생각이 강해서 비롯된 것이지만 그 이후 상대를 이해하고 연구하면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오 작가는 "북에는 개인의 작품이 없으며 따라서 작가가 추구하는 가치가 자리할 수 없다"라고 누누이 강조했다. 그러면서 그는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예술과 창조의 소중함과 아름다움을 사랑한다"고 했다.
 
오성철 작가 작품
 오성철 작가 작품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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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철 작가 작품
 오성철 작가 작품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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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특별전시작품은 모두 16점이다. 유화 4점, 오일활용 작품 2점, 사진 2점, 혼합재료 작품 8점 등이다. 연작 시리즈가 많다. 가로 5M 되는 대작도 있다. 그는 지금까지 총 46점의 작품을 전시 판매했다.
     
그는 이른바 '수저 작가'로 불리고 있다. 그의 작품 속에 수저가 자주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숟가락은 단순히 음식을 먹기 위한 도구이지만 욕망을 해소하기 위한 수단을 의미하고 있다.  
 
오성철 작가의 수저연작
 오성철 작가의 수저연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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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철 작가 작품
 오성철 작가 작품
ⓒ 이혁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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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작가는 '개념미술'을 추구한다. 개념미술은 기존 작품의 미학적인 것보다 개념을 재료로 하는 미술사조이다. 대중에 아첨하지 않고 자신만의 생각과 관념을 표현하는 미술이 자신의 예술관과 맞다는 것이다. 수저 연작을 비롯한 대부분의 작품이 개념미술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그는 틈틈이 미술 작업을 하고 있다. 전업작가가 아니기에 막일을 하면서 생계를 잇고 있다. 대학 다닐 때부터 속칭 '막일'을 한 그는 스스로 돈 벌어 미술 작업하는 것이 이제는 생활이 됐다고 한다. 그는 힘들고 배고픈 예술 직업에 대해 이렇게 피력했다.

"쪼들리지 않으면 자신을 처절하게 보지 않는다. 먹는 것이 중요하지만 억만장자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먹는 건 다 비슷하다. 어딜 가서도 이제는 내 예술을 꿋꿋하게 할 것 같다."  
   
그의 삶을 들어보면 '미술 하기' 위해 탈북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또한 성공한 탈북민들처럼 남한사회에 적응하는데 수많은 난관을 극복했다.

인터뷰 말미, 그가 지난 2일 득남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함께 기뻐했다. 아내는 레스토랑 셰프로 일했다. 오 작가의 예술과 꿈이 자신의 희망대로 나래를 펴기를 기대한다. 아래는 그와의 일문일답이다.
     
- 전시 제목 <표현의 조건형식>이 다소 추상적인데?
"말 그대로 표현에 대한 조건과 그 형식입니다. 화가는 캔버스 위에 형상을 새기는 형식으로 자기 사유를 표현합니다. 미술품을 창작할 때 표현할 수 있거나, 또는 없거나 혹은 가능하거나 절제하거나의 조건들을 형식화하면서 미술의 본질을 파악하게 됩니다."  
    
- 전시회의 대표적인 작품을 설명한다면?
"미술작품에 대한 설명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는 것만큼 보인다'라는 말이 있듯이 미술작품 감상을 작가의 상세한 이야기로 이해한다면 이는 올바른 정신활동이 아니라 작가의 일방적인 사유가 강제로 이입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감상자가 자기 사유의 주체로서 감상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미술은 어떻게 배웠는지 궁금하다.
"북한에서는 군 선임 직관원으로부터 1년 동안 교육받았고 직관원으로서 만수대창작사(평양의 미술제작소), 인민군선물전시관, 민예전시관 등에서 근무했습니다. 탈북 후에는 대전 한남대학 미대 회화과 4년. 홍대 대학원 1년을 다녔습니다. 작품활동을 하며 수많은 갤러리와 미술관을 두루 방문했습니다."  
    
- 그간 여러 전시하면서 인상적인 장면이나 추억이 있다면?
"미국의 마이애미에 있는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가졌을 때 세계적 아트패어인 '마이애미 바젤'을 관람한 것이 인상 깊은 추억입니다, 또 외국 갤러리들에 있는 세계적인 명화들을 보면서 우리나라와 세계의 미술을 비교하고 차이도 발견했습니다."
    
- 북한 미술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북한미술은 현재의 세계의 흐름과는 전혀 다른 미술입니다. 형식으로는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며, 생각컨대 개인보다는 집단, 즉 권력자의 권력유지에 얽매인 미술입니다."  
   
- 관람객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탈북해 남한에 현재 살고 있는 사람이 보고 듣고 느끼면서 작업한 창작물을 전시하고 있는데 환경의 변화에 따른 작가의 시선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남과 북의 경계에서 조금이나마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시간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 앞으로 계획은?
"예술가에게 열심히 공부하고 작업하는 것이 유일한 최선의 계획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을 배우고 연구하는 과정을 통해 나와 타자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세계를 만드는데 작게나마 도움 되는 창작활동을 하려고 합니다."

덧붙이는 글 | 이 내용은 <브런치스토리>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태그:#오성철화가, #개념미술, #탈북민화가, #남북통합문화센터, #표현의조건형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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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메모와 기록으로 남기고 있습니다. 기존 언론과 다른 오마이뉴스를 통해 새로운 시각과 영감을 얻고 있습니다. 주요 관심사는 남북한 이산가족과 탈북민 등 사회적 약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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