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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남양주시 사능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하는 내내 김상기씨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 썼다.
 경기도 남양주시 사능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하는 내내 김상기씨는 주변의 시선을 신경 썼다.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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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기씨는 1971년 납북되었다가 1972년 귀환한 승운호의 선원이었다. 납북 당시 나이가 17살이었던 그는 현재 전기설비시공업을 하고 있다. 인터뷰 당시 그는 팬데믹 상황으로 밀렸던 전기 작업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20대에 고향 강원도를 떠나 서울로 올라온 그는, 20년간 서울에서 생활하다가 10년 전 경기도 남양주시 사능으로 이사했다.

사능의 한 카페에서 만난 그는, 50년 만에 외부인에게 납북귀환 사실을 털어놓는다며 굉장히 긴장하는 눈치였다. 그런 그의 모습에서 다른 납북귀환어부 피해자들과 마찬가지로 오랜 사회생활 동안 정보기관의 감시로 인해 주눅 든 모습이 보였다.

카페 1층 옆 테이블에 사람들이 앉아있는 것을 신경 쓴 탓에 사람이 적은 다른 층으로 옮겨가며 인터뷰 할 정도로 그는 주위 시선에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부당한 일을 당해도 아무 소리 못 하고 살았던 그가 자신의 피해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은 같은 승운호 선원들의 권유였다고 했다. 

납북되었다가 1972년 9월 7일 속초항으로 돌아온 배는 모두 7척(160명)이었다. 이 중 한 척이었던 '승운호'의 경우, 선원 23명이 전원 돌아왔다. 50년이 지난 후 23명 중 21명의 피해자(또는 유족)가 진실규명과 재심을 시도하고 있다. 이들의 재심 시도에는 같은 피해를 경험했던 동료 선원들의 용기와 응원이 있었다.
     
그가 자신의 피해를 공개적으로 이야기하기로 마음먹은 또 하나의 원동력은 아내의 응원이었다. 김상기씨의 피해사실을 이해하고 남편이 국가기관으로부터 겪었던 피해를 함께 싸우며 이겨냈던 아내가 지금까지 버텨낸 힘이었다고 한다. 김상기씨는 묵묵히 견뎌내며 함께 싸워준 아내가 그저 고마울 뿐이라고 했다.
 
"(북한에서) 13개월을 보내던 중 이후락이 7.4공동성명을 발표하면서 우리도 한국으로 내려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겼던 것 같아요. 그때는 그 일이 얼마나 고마웠는지 몰라요. 그런데 한국으로 딱 넘어오니까 그게 아니었어요. 속초항에 도착하니까 우리를 남 대하듯 하는 거야. 우리 가족들이나 우리를 반가워하지, 수사기관이나 정보기관에서는 죄인 취급을 해도 그런 죄인 취급이 없어요.

내가 현행범으로 잡혀간 것도 아니고... 납북되었던 사람 중에는 나보다 어린애들도 많았는데. 그 어린애들을...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을 끌고 가서 죄인 취급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우리에게 죄를 뒤집어씌우고 억울하게 50년 동안 말도 못 하고 살았어요. 50년 동안 감춰왔던 것이지만 너무 생생해요."

"북한 배에 붉은 글씨의 플래카드"

김상기씨가 태어난 곳은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으로 지금은 '덕구온천'으로 유명해 진 곳이다. 그곳에서 서너 살 되던 때에 고성 아야진으로 올라왔다. 다른 동료 선원들과 마찬가지로 김상기씨 역시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학업 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나는 아야진에 있는 천진초등학교를 졸업했어요. 그때는 돈이 없어서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할 때예요. 가난한 아이들은 사납금을 받지 않는 비인가 학교인 '숭실중학교'나 '경동중학교' 같은 곳을 다녔는데, 저 역시 경동중학교를 다녔어요. 그 학교는 사납금이 없는 대신 졸업장도 없어요. 아무리 비인가 중학교라도 학교를 다니려면 역시 돈이 들잖아요. 그러니 학교를 다니면서도 오징어 배를 타야 했죠. 당시에는 우리 친구들이 거의 전부 다 그렇게 공부를 했어요. 나도 처음 오징어 배 탈 때 나이가 15살이었으니까요."

당시 뱃일하는 친구 중에는 13살부터 뱃일을 시작한 사람도 있다고 했다. 뱃일에는 나이제한도 경력제한도 없었다. 서류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가장 쉽게 돈을 벌 수 있는 일이었다고 한다.
 
"보통 나이 어린아이들은 혼자 다니지 않고 아버지나 형하고 같이 다녀요. 같이 승운호 타고 납북되었던 2년 후배 김성대는 나보다 더 어렸어요. 그런 애들이 뭘 알아요."

나이 어린 선원들은 정식 선원이 아니라, 뱃사람들 말로 '가고쟁이'(임시로 고용된 선원)였다. 학교에 다니는 어린 학생들은 주로 주말이나 방학을 이용해 배를 타야 했다. 그래서 학기 중에는 연안에서 당일치기 뱃일을 하고, 방학 때는 먼 바다로 나가는 배를 타곤 했다.
 
"계절마다 다 잡히는 고기가 다르잖아요. 여름 가을에는 오징어, 겨울에는 명태, 다 달라요. 그중 주로 타러 다니는 배는 오징어 배였어요. 6월부터 10월까지는 일을 할 수 있으니까 주로 오징어 배를 타는 거죠. 생선을 잡으면 5대5, 4대6 이런 식으로 선주와 이익을 나눌 때니까요. 나도 가고쟁이로 다녔어요."

1971년 그해도 여름 방학을 이용해 친구들과 같이 승운호를 타고 오징어를 잡으러 나갔다. 조업을 끝내고 돌아오던 길에 북한의 쾌속정(일명 '까질이')에 붙잡혔다.
 
"우리가 조업을 끝내고 돌아가자고 해서 출발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뭐 저쪽에서 고속경비정 같은 것이 물살을 가르면서 다가와요. 워낙 배가 빠르니까 금세 우리 배를 따라오더라고요. 우리는 북한 배라는 생각은 하지도 않고 한국 해경 배라고 생각했어요. 우리를 안내하려고 왔나보다 했죠. 배가 가까이 오는데 이상하더라고. 한 백 미터 정도 앞에서 서더니 공포탄을 막 난사해서 깜짝 놀랐죠. 더군다나 북한 배에 붉은 글씨의 플래카드가 보이는데 '위대한' 어쩌구저쩌구하는 문구가 쓰여 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대번에 질려버린 거지. 그때부터 공포가 엄습해 오더라고."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납북되었던 선원 161명이 동해안으로 귀환했다는 <경향신문> 1972년 9월 7일 자 기사
 납북되었던 선원 161명이 동해안으로 귀환했다는 <경향신문> 1972년 9월 7일 자 기사
ⓒ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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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그의 13개월의 북한 억류 생활이 시작되었다. 원하지 않는 교양교육, 관광이 계속되었다. 기약 없는 13개월이었다.
 
"갑자기 어느 날 원산으로 간다고 각 개인 사물들 다 챙기라고 해. 그래서 우리는 또 관광시켜 주려나 보다 생각했죠. (남한으로 보내준다는 사실은) 원산에 도착해서 알았어요. 이야기를 해주더라고. 동무들 내일 남쪽으로 출발한다고 하더라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소식에 승운호 선원들은 더욱 서로를 챙겼다.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야 했기 때문이다. 이튿날 원산에 정박해 있던 승운호에 23명 전원이 승선한 것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납북된 지 1년여 만에 귀환했다.
 
"'아바이' 마을 지나서 오는데 보니까 항구에 가족들이 전부 다 나와 있더라고요. 그런데 배에서 내리자마자 바로 버스로 타라고 해서 가족들하고는 눈인사 정도밖에 못 했어요. 버스가 미리 다 와 있고, 배에서 버스까지 양쪽으로 경찰들이 도열해 있어서 버스로 태웠기 때문에 누구와도 접촉을 못 했어요. 버스를 타고 속초시청 2층 대회의실로 갔던 것으로 기억해요. 그냥 시멘트 바닥이었던 것 같아요. 그날 7척이 같이 귀환해서 넘어왔는데 그 사람들이 다 거기 있었어요"

속초에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지옥 같은 조사였다.
 
"시청에 들어가던 날부터 조사가 시작됐어요. 늦은 오후부터였어요. 시청 건너편 '해동여인숙'이라는 곳에서 조사를 받았는데 방이 좁은 쪽방이었어요. 두 사람 누울 정도 크기밖에 안 돼요. 호명이 되면 시청을 나와서 해동여인숙라는 곳으로 갔는데 그 여인숙을 통째로 빌려서 조사를 했던 거 같아요."

김상기씨가 조사받았던 해동여인숙은 동보극장 옆에 위치해 있었다. 평소 영화를 좋아해 동보극장에 자주 갔던 그였기 때문에 해동여인숙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여인숙에 들어가는데 비명소리가 막 들리더라고요.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들어가는데 완전히 공포 분위기잖아요. 윽박지르기만 하면 되는데 한쪽에서 '죽겠다, 나 죽는다, 아이고 아이고' 하는 데 공포를 느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방에 들어가니까 수사관 2명이 와이셔츠 바람에 고문을 해요. 쪼개진 삼각형 모양의 장작을 오금 사이에 끼우고 꿇어앉힌 다음에 발로 허벅지를 밟는 고문을 했어요.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그거는 때리는 것보다 더 아프니까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어요. 그 고문이 안 통하면 패는 거예요. 엎드려뻗쳐 놓고 패요. 반항하거나 할 수도 없어요. 방이 좁으니까."

"아니라고 하면 또 고문할까 봐"

구타당한 엉덩이의 팬티가 피에 젖어서 상처에 붙어버릴 정도였지만 그래도 첫날 구타는 참을 만했다고 한다. 정작 문제는 그다음 날 조사부터였다고 했다.
 
"그다음 날 아픈 데를 또 때리니까 그 고통이 장난 아니었어요. 때리는 고문은 2~3일 정도였어요. 그러다가 3, 4, 5일 차 조사받을 때는 고문이 달라지더라고요. 그때부터는 물고문이 시작되었는데, 물고문을 할 때는 조금 넓은 방으로 옮겨서 했어요. 그 방에는 부엌이 달린 방이었는데 수사관이 '너가 네 속에 있는 걸 감추고, 사실대로 이야기 안 하기 때문에 방법을 달리한다' 하길래 뭔가 했는데 그게 물고문이더라고요.

물고문할 때는 3명이 들어와요. 내가 움직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는 나를 눕히고 배 위로 한 사람 올라타요. 그리고 머리를 젖히고 다리에도 하나 올라가고 하더니, 얇은 면 수건을 반에 반으로 접어서 물에 적신 다음 코와 입에 덮더라고. 그러더니 한 말 짜리 주전자 물을 수건 위에다 부어버리더라고. 수건이 입에 붙어서 숨을 못 쉬겠는 거야. 숨을 쉴라고 막 머리를 흔들어도 물을 막 부어요. 그날은 그걸로 끝났어요. 정신없지. 내가 뭐 지령을 받아온 것도 없는데 무슨 얘기를 하냐고. 수사관은 나보고 지독하대요."

정작 답답한 것은 북한에서 지령받은 것이 없는 김상기씨였다. 사실대로 모른다고 하면 맞아 죽을 것 같았고, 거짓말이라도 하려 해도 아는 것이 없으니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내가 빨갱이 사상이 물들어 온 놈이라 불지 않는다는 거예요. 또 세 놈이 나를 눕히더니 수건을 덮길래 또 물고문 하는 줄 안거에요. 그런데 주전자 물에다가 고춧가루를 탔더라고요. 물을 붓는데 코가 매워 죽겠더라고요. 호흡을 하니까 고춧가루 물이 흡입이 되니까 막 죽겠더라고요. 수사관들이 나보고 '거짓말이라도 둘러대라'고 하는 거예요. 4일째는 의자를 딱 들고 오더라고요. 의자에 손을 묶어요. 내가 '발광' 못하게 하는 거지. 그러더니 장비가 들어오는데 선을 꺼내오더라고요. 자세히 보니까 옛날 삐삐전화기(군용전화기)를 가져오더라고. 전기선을 전화기에 연결하더니 내 양쪽 손가락에 연결하더라고. 그리고는 한 놈이 전화기를 돌리더라고."

그는 살고 싶어서 결국 거짓말을 둘러댔다. '남한에 가서 가족들하고 친구들하고 내 편으로 만들고 포섭하라고 했다.' 그가 둘러댄 거짓말이었다. 그런 고문의 기억은 검찰의 조사와 법원의 재판에서도 진실을 말할 수 없게 했다.
 
"검사 앞에서 부인할 수 없었어요. 똑같은 놈들이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니라고 하면 또 고문할까 봐 엄두도 못 냈지. 검사가 묻는 대로 '네 사실입니다' 하고 끝나버린 거지. 재판받을 때도 똑같아. 재판받을 때 서류를 보고 개인적으로 묻는 것이 아니잖아요. 피고인들 전부 모아놓고 재판장이 '사실이냐, 사실이냐' 하면 '네네' 하고 끝나는 거지."

결국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일상적인 감시였다. 집에서는 경찰의 감시가 있었고, 군 복무 중에는 보안사 수사관들의 감시를 받아야 했다. 결국 김상기씨는 군에서 제대한 후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속초를 떠나야 했다.
 
"연고도 없는 서울로 무작정 올라와 청계천 8가 앞에 있는 다리 위에서 며칠간을 노숙을 했어요. 차라리 거지처럼 살더라도 배는 죽어도 타기 싫었거든요. 서울에서 막노동 일을 하면서 살기 시작했어요. 하지만 내가 어디 가더라도 수사관이 찾아오고, 회사나 집으로 와서 탐색하는 것이 끊이질 않았어요. 내 일거수일투족을 다 감시해요. 내가 이사를 하거나 회사를 옮기거나 하면 경찰에 모두 보고를 해야 해요. 그런데 보고를 하기도 하지만 이미 다 형사들이 알더라고. 이사를 하면 그 지역 담당 형사가 찾아오니까요."

"자식들에게 연좌제 피해가 있을까 봐"
 
2004년 10월 19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보안분실 담벼락 철조망에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이 매단 보라색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자료사진.
 2004년 10월 19일 서울 용산구 남영동 보안분실 담벼락 철조망에 국가보안법 피해자들이 매단 보라색 리본이 바람에 나부끼고 있다. 자료사진.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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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이유도 없이 감시를 받고 수사를 받아야 했다. 어느 기관인지, 누구인지도 모를 사람들에게 연행되어 수사를 받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그래도 그는 항의 한번 제대로 해보지 못했다. 그것이 그의 운명이라고 생각했다.
     
"1985년 가을경에 잠실 롯데월드 공사 현장에서 일할 때였어요. 퇴근하려고 나오는데 젊은 애들 2명이 있더라고. 나보고 '김상기지?'하더라고. 느낌이 딱 왔어요. 차에 태우더니 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한참을 가더라고요. 수사관이 '지금부터 아무것도 묻지 말고 보지도 말고 가'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조사실에 들어가서 보니 문이 완전히 닫는 문이 아니야. 파티션처럼 아래는 보이는 문이야. 물트랜치(물배수관)가 양쪽으로 파져 있어서 물이 내려가는 거지. 거기 안에서 비명소리도 들려서 또 누구 때려잡는구나 했지."

그곳에서 조사가 다시 시작되었다. '언제 나포되었느냐, 지령을 받았느냐'라는 과거 조사내용을 그대로 물었다. '누구와 접선을 했느냐'고 묻는 질문에 그런 적 없다고 했더니 팬티까지 벗기고는 발과 손을 묶었다. 책상 위로 올라가게 하더니 도르래처럼 생긴 기구에 그를 매달았다. 그 자세에서 여러 번의 물고문을 견뎌야 했다. 그렇게 이틀 동안 조사를 받았다. 조사가 끝나고 별다른 혐의를 찾지 못한 수사관들은 그를 내보내며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고생 많았다. 앞으로 이런 일 없을 것이다.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살아라, 이것이 마지막일 것이다.'

그를 내려준 곳은 용산역이었다. 실제 그들의 말처럼 그 뒤로는 연행되어 조사받는 경우는 없었다. 그러나 사찰은 계속되었다. 사우디 공사 열풍이 한창이던 때에 김상기씨 역시 돈을 벌기 위해 여권을 신청했으나 신원조회에서 번번이 문제가 되어 결국 사우디 공사에 가지 못했다.

김상기씨는 정작 납북귀환 사건으로 신경 쓰이고 걱정되는 것은 자식이라고 했다. 자신의 과거로 인해 혹시라도 자녀들의 미래에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신경 쓰이기 때문이다.
 
"내 자식들에게 연좌제 피해가 있을까 봐 늘 걱정하면서 살아요. 내가 겪은 고통도 고통이지만 내가 죄지은 것이 없으니까 명예라도 회복하고 아이들에게 떳떳해 보자 이거에요. 당당하게 살고 싶은 것 그것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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