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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명씨는 이발관을 운영하는 이용사로 한국전쟁 당시 북에서 내려온 '월남' 가족이다. 함경남도 단천군 출신의 부친은 전쟁을 피해 강원도 고성군 아야진으로 내려와 정착하게 되었고 종전 후 김상명씨가 그곳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이 그렇듯 연고 없는 지역에서 살아야 하는 월남 가족들은 경제적으로 매우 어려움을 겪어야 했고 김상명씨 가족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가난했던 가정 형편으로 겨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배를 탔다. 1971년 여름, 지인의 소개로 조카 김인섭과 함께 승운호를 타게 되었다고 한다.

비록 그에게는 처음이었던 오징어 뱃일이었지만, 승운호 선장 이진형씨의 배려로 큰 어려움 없이 일을 할 수 있었다. 김상명씨는 이진형씨에 대해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경험이 없는 '초보' 선원이었기에 뱃일이 능숙하지 못했음에도 한 번도 큰소리를 내거나 욕을 한 적이 없는 점잖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납북귀환 후 경찰 수사를 받을 때는 납북책임을 오롯이 선장 홀로 지려 했고,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다른 선원들이 고문을 덜 당하도록 호소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는 납북되었다가 귀환된 뒤 다시는 배를 타지 않았다고 했다. 배를 타지 않는 대신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이용' 기술을 배워 아야진 옆 동네인 '청간'에서 이발소를 열었다. 그러나 수사기관의 감시와 지속적 괴롭힘으로 그마저도 운영하기 어려워졌다. 그는 도망치듯 고향을 떠나 현재는 경기도 여주시에서 이발소를 운영하고 있다.

대한민국 함대나 해경조차도 없었다

김상명씨 기억에 의하면 1971년 여름, 납북될 당시 승운호는 조업을 끝내고 귀항하던 중이었다. 초보 선원이었던 김씨는 밤샘 작업으로 피곤해 조업이 끝나자마자 선실에 들어가 몇 시간 잠을 청한 뒤 아침 무렵 선실을 나왔다고 했다. 때마침 저 멀리서 하얀 물살이 보였고, 약 1~2분 정도 지나자 배 한 척이 승운호 곁으로 바짝 붙었다고 한다.
 
"엄청 빠른 속도의 쾌속정이었어요. 가만히 보니 배에 인공기가 걸려있고, '김일성 동지... 위대한 수령...' 뭐 이런 말이 적혀있는 붉은 글씨로 된 현수막까지 걸려있더라고. '아, 북한배구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북한군이 우리 배로 득달같이 올라오더니 총을 갖다 들이대면서 선원들 모두 뱃머리 쪽으로 모여 쪼그리고 앉으라고 했어요. 우리는 시키는 대로 했고, 그 길로 바로 우리 배를 끌고 갔죠."

공포에 질려있던 김씨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끌려갔는지 자세한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북한군이 쏜 공포탄에 놀라 철렁 내려앉은 가슴을 붙잡고 '이젠 죽었구나'라고 생각했던 공포스런 기억만은 잊을 수 없다고 했다. 나중에 나이 든 선원들로부터 승운호가 납치된 지점이 대화퇴 공해상 같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납치된 지점이 정확히 어디였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납치될 당시 지점에선 주변 사방에 육지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야간조업 당시 환하게 불을 켠 오징어 배들이 승운호 주변에 여럿 있었지만 납북되면서 둘러보니 그 많던 남한 어선은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함대나 해경조차도 없었다고 한다.

북한 배에 몇 시간 끌려가자 금강산 쪽 항구가 나타났다고 한다. 그곳 항구에서 며칠간 머문 뒤 일행은 다시 평양 근처 어느 휴양소로 이동해 귀환할 때까지 1년 1개월 머물렀고 한다. 휴양소의 정확한 명칭은 기억나지 않지만 큰 저수지가 있었고, 비탈진 산꼭대기마다 건물들이 민박집처럼 서 있었던 것만은 기억난다고 했다. 그곳에는 승운호 외에도 승해호(속초선적), 그리고 전라도와 대청도에서 납북되어 온 선원들도 함께 지냈다고 한다.

북한에서의 생활이라면, 주로 북한의 선전을 듣고 관광을 하는 것 정도였다. 어린 김상명씨는 부모님과 형제들이 보고 싶어 매일 울다시피 하며 세월을 보냈다고 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러다 영원히 못 나가는 것 아닌가'하는 걱정이 더해져 자주 인근의 산에 올라 혼자 고향을 바라보다 내려오곤 했다고 한다. 그마저도 혹시 탈출을 기도하는 것 아닌가 하는 북한 당국의 의심으로 자주 갈 수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속절없이 1년의 시간을 보내던 어느 날, 느닷없이 귀환이 결정되었다. 귀환 절차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고, 승운호를 타고 동해안을 따라 속초항으로 들어왔다. 당시 김상명씨는 다른 선원들로부터 함께 귀환되어 내려온 배가 여러 척 있었다는 말을 들었지만 주위를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고 한다.
 
"1년 만에 속초항에 돌아왔지만 보고 싶던 아무도 접촉하지 못하게 해서 가족들조차 먼발치에서나마 볼 수밖에 없었어요. 배에서 내려 버스로 타는 동안 누구와도 접촉할 수 없도록 경찰들이 양쪽으로 줄지어 서서 벽처럼 막아서 말도 못 해 봤어요. 같은 배 선원들끼리 버스에 나눠 태워서 속초시청에 우리를 내려놓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체포영장도 없이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까무러쳐야 고문이 끝났다
 
1972년 9월 7일 납북귀환된 선원들을 조사하기 위한 수사기록 중 일부. 납북귀환어부 수용과 조사를 위해 시청과 여인숙 등을 표시한 지도. 납북귀환어부 재심 기록 중 일부.
 1972년 9월 7일 납북귀환된 선원들을 조사하기 위한 수사기록 중 일부. 납북귀환어부 수용과 조사를 위해 시청과 여인숙 등을 표시한 지도. 납북귀환어부 재심 기록 중 일부.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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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명씨의 기억으로는 시청 대회의실 창문이 모두 가려져 있었고, 자율배식 형태의 식사가 이뤄졌고, 화장실은 바로 옆방에 있었다고 한다. 선원들에 대한 조사는 다음 날부터 시작되었다. 수사의 형태는 다른 납북귀환어부들과 대동소이했다. 형사가 이름을 부르면 그 뒤를 따라갔는데, 보통 한 번에 세 명 정도 불렀고, 호명된 사람들을 각각 다른 여인숙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김상명씨가 들어간 곳은 시청 건너편 동보극장 옆에 있는 해동여인숙이었다. 여인숙의 작은 골방에는 수사관이 두 명이 있었는데, 많을 때는 다섯 명까지도 들어왔다고 한다. 속초시청에 있는 동안 하루에 한 번은 끌려가 조사를 받았던 것 같다고 한다.

실제 당시 치안국과 강원도 경찰국 등의 수사계획 문서에 의하면, 이들의 수사계획은 납북되던 당일부터 1주일 집중 수사를 하기로 하고, 수사분담조, 수용계획, 집중심문내용, 처벌기준, 수사장소 등에 대한 계획을 수립해 놓았던 것으로 확인된다.     
"가장 공포스러운 것은 먼저 조사받고 나오는 사람을 보는 거였어요. 고문으로 몸이 축 처져 온 것을 보면 '차라리 가서 죽여 달라고 할까?' 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요. 그러다가 막상 여인숙 골방으로 들어가면 여기저기서 들리는 고문당하는 소리에 더 미칠 것 같이 돼버려요. 방으로 들어가면 수사관이 '너는 나이가 어리니 이북에서 지령을 줬을 것이다. 그 지령이 뭔지 말하라'고 하는 거예요. 나야 당연히 그런 건 없다고 대답했지만 수사관이 저더러 거짓말하지 말라며 정신없이 때리기 시작하는 겁니다. 막상 맞으니까 정신이 하나도 없더라고요. 그러다 그걸로 안 된다 생각했는지 물고문을 하고 그것도 모자랐는지 고춧가루 물로 바꿨어요."

까무러쳐야 고문이 끝났다. 깨어나면 시청으로 보내줬지만, 정작 회의실로 와 앉으려 하면 엉덩이가 다 터지고 똥까지 지려서 앉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김상명씨는 그렇게 고문받기를 세 차례 정도 반복했던 것으로 기억했다. 속초 시청에서 조사받는 내내 피, 똥이 묻은 옷을 갈아입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속옷은 그냥 버렸다) 씻거나 치료도 받지 못했다고 한다.

하루는 물고문으로 머리가 젖어 시청으로 건너오던 중 길가에 서 계시던 부모님을 보았다고 한다, 비록 만신창이 상태였지만 부모님 앞에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걷는 척하려 애썼다고 한다. 그때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고 한다.
 
"일주일 이상 조사받았던 것 같은데 집으로 보내주지는 않고 버스에 태우더니 또다시 고성경찰서 유치장에 가둬두더군요. 유치장에는 열세 명 정도가 수용되었는데, 함께 들어간 선원들이 하나둘 울기 시작해서 순식간에 유치장이 울음바다가 되었어요. 유치장 간수가 '조용히 해!'라며 호통을 치는데, 그런다고 흐르는 눈물이 멈추나요. 아무도 간수 말을 듣지 않았어요. 우리는 시청에서의 그 고통스러운 조사가 끝내면 집으로 보내줄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이렇게 갇히고 보니 너무 억울하고 서럽더라고요."

실제 수사 과정에서 당시 납북되었던 어부들은 구속영장도 없이 2주가량 불법 감금되어 조사받았다. 당시 이 사건을 담당하고 있던 경찰은 이들의 불법감금에 대한 우려를 나타내며 여론을 의식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수사는 적법절차를 무시하고 불법적으로 이뤄졌다.
 
당시 납북귀환어부 수사를 담당하던 경찰이 불법감금이 우려된다는 의견을 기재한 수사기록. 납북귀환어부 재심 공판 기록 중 일부.
 당시 납북귀환어부 수사를 담당하던 경찰이 불법감금이 우려된다는 의견을 기재한 수사기록. 납북귀환어부 재심 공판 기록 중 일부.
ⓒ 변상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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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죄인처럼 숨어 살지 않겠다

김상명씨는 속초지원 법정에서는 다른 승운호 선원들과 함께 재판을 받았다. 그는 검사와 판사가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도, 무슨 죄를 씌웠는지도 잘 몰랐다. 어린 나이에 뜻 모를 법률용어를 알아듣지 못해 그냥 묻는 말엔 고분고분 '네, 네'라고만 대답했다.

그저 다시 조사받아야 된다고 끌고 갈까 봐 무섭기만 했고 죽을까 봐 두렵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가 법정에서 그토록 두려움을 느낀 이유는 그를 고문했던 수사관들이 방청석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김씨는 결국 속초지법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억울한 전과자가 되어 사회에 나왔지만, 끔찍한 마음이 들어 다시는 배를 타고 싶지 않았다. 김씨는 이발소에서 일을 하며 미용 기술을 착실히 배워 열아홉 살 무렵 이용사 면허증을 취득했다. 그리고 결국 스물한 살 되던 해에 스스로의 힘으로 고향 아야진 옆 마을 청간에 '청간 이발소'를 열 수 있었다.

청간 이발소는 동네 친구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고, 김씨도 그곳에서 친구들과 자주 어울렸다. 그런데 친구 중 한 명이 모임의 회장이 김씨라는 이유로 방첩대에 신고하여 연행되는 일이 생겼다(그 친구 말로는 방첩대에서 시켜서 그렇게 했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고, 그 친구 역시 방첩대에 끌려가 고생을 많이 했다고 한다).

김씨의 혐의는 '북한에서 지령받은 대로 친구들을 모아 포섭해 지하당을 조직하려는 혐의'였다. 수사관들로부터 자백하라며 얼마나 군홧발로 맞았는지 모른다고 했다. 그는 '아니다, 억울할 뿐이다'고 항변하며 고문받는 내내 펑펑 울었다고 한다. 그렇게 방첩대에 3~4일 정도 잡혀 있다가 나왔지만, 그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감시하며 불러 조사받기도 했다.
 
"청간이 싫어지더라고요. 더는 거기서 못 살겠더군요. 이발소는 매형에게 맡기고 부산으로 도망치듯 내려갔어요. 그런데 부산에서 두 달 정도 있으니까 부산 정보과 형사가 찾아와 '내가 김상명이 담당이니 앞으로 어디를 가게 되면 내게 먼저 이야기하라'고 하는 거예요. '아, 이제는 도망 가봤자겠구나'생각이 들어 모든 걸 체념했어요. 결국 다시 고성으로 올라왔죠. 고문 후유증인지 고관절과 정강이가 너무 아픈 거예요. 결국 고관절을 수술하고. 5년간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어야 했어요. 그런데도 제 담당 수사관은 한 달에 한 번씩 꿔 준 돈 받으러 오듯이 계속 찾아왔어요. 내가 담당 수사관에게 미리 말하지 않고 어디를 다녀오면 금방 알고 찾아와, 왜 이야기 하지 않고 다녀왔느냐며 다그쳐요. 늘 우리 집 주변을 맴도는 것 같았어요."

고성으로 돌아와 5년 동안은 아무것도 못 하고 집에만 있었다. 그래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뭐라도 해야 했기에 막노동, 이발소, 운전,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러다가 지금의 아내와 결혼하였다. 결혼할 때 아내에게 자신의 과거를 미리 말하지 못했다. 그러나 결혼 후 생활하는 동안 형사들이 자꾸 집으로 찾아오자, 이상하게 여긴 아내가 집요하게 이유를 물었고, 결국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취업 준비를 하는 아이들에게도 뒤늦게 납북사건을 설명하고 공무원 시험은 포기하고 기술을 배우라고 이해시켜야 했다. 게다가 미국으로 나갈 기회가 생겼던 누나도 신원조회 문제로 여권이 나오지 않았다. 이 모든 일들이 모두 자신의 과거 때문이라는 생각 때문에 항상 가족 모두에게 죄인 같다고 한다,

최근에 '동해안 납북귀환어부 피해자 진실규명 시민모임'을 알게 되고, 납북 사건 피해자들과 연락이 닿아 용기를 얻어 재심 신청을 하기로 했다. 납북귀환 피해자가 자신만이 아니라는 것에 용기를 얻게 되었고, '전과자'가 아닌 '피해자'라는 것을 서로 이해해 주고 위로해 주는 사람들을 만나자 용기가 생겼다고 한다.

어쩌면 죽기 전에 억울함을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진 김상명씨는 이제 더 이상 죄인처럼 숨어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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