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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대표, 직선개헌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6.29선언을 머리기사로 올린 당시 <경향신문> 기사
 "노대표, 직선개헌 선언"이라는 제목으로 6.29선언을 머리기사로 올린 당시 <경향신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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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항쟁의 와중인 29일 민정당 대표 노태우가 6.29선언을 발표했다.

직선제 개헌, 김대중 등 양심수 석방이 포함되었다. 위기에 몰린 5공세력이 출구로 마련한 것이 '6.29 선언'이었다. 시민들 사이에는 '속이구 선언'이란 비아냥이 나왔다. 

놀라기는 했는데 좀 허탈했어요. 6.29선언 처음에 들을 때, 어, 이게 아닌데 하는 느낌이었어요. 왜냐하면 전두환이 항복해야 하는데, 후보로 나온 노태우가 나선 거예요. 기쁘면서도 조금 허탈하다고나 할까. 뭔가 마무리가 제대로 안 된 것 같은 거예요. '전두환이 이 문서를 내야지, 아직 대통령이 되지 않은 후보가 무슨 약속을 하냐. 이것은 어쩌면 국민을 속이는 의미가 있다. 이게 전두환의 뜻이냐, 노태우가 과연 자발적으로 한 거냐, 둘이 짜고 하는 것 아니냐' 같은 의문들… 그런데 노태우는 자기가 독자적으로 했다는 거 아니예요. 그러니까 더욱 신뢰할 수 없다고 제가 조금 비판적으로 해석했어요.

"일단은 기쁘지만 우리의 뜻이 완전히 수렴된 것은 아니다. 전두환 본인이 직접 해야 한다."

그렇게 KBS와 인터뷰했는데, 제 말은 소개도 안 되었어요. 

1987년 후반기는 개헌문제로 진행되다가 10월 12일 국회에서 직선제 개헌안이 통과되면서 연말 정국은 대통령선거로 전환되었다. 사제단은 공명선거와 야권 후보의 단일화를 추진하고자 천호동성당에 김영삼과 김대중을 차례로 초청하여 의견을 논의했으나 끝내 성사되지 않았다. 사제단 일부에서 김대중을 공개적으로 지지하였으나 함세웅은 서울교구 홍보국장이란 공직의 위치에 있어서 서명에 참여하지 않았다. (주석 1)
 
1987년 대선을 앞둔 10월 고려대에서 열린 집회에서 서로 외면한 김대중과 김영삼 당시 야당 총재.
▲ 외면한 두김씨 1987년 대선을 앞둔 10월 고려대에서 열린 집회에서 서로 외면한 김대중과 김영삼 당시 야당 총재.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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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6일 실시한 제13대 대선은 노태우가 당선되었다. 야당 두 김씨가 유효투표의 55%를 얻고도 노태우가 얻은 36.6%에 눌려 정권을 넘겨주게 된 것이다. 야권분열이 군정연장의 기회를 마련해준 꼴이 되었다. 야권의 대선패배는 민주진영에 큰 충격이고 타격이었다. 함세웅은 언론이나 정치학자들이 미처 하지 못한 분석을 내놓는다. 

양김 중 한 명이 집권했다고 하면, 군부는 두세 차례 쿠데타를 시도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아르헨티나와 필리핀, 스페인의 민주화 과정을 보면, 군부가 두어 차례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1987년 이후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가장 결정적인 점은, 군사쿠데타가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이지요. 다른 나라 학자들과 대화하면 이 점을 제일 궁금해 해요. (주석 2)

군사정권이 선거를 통해 연장되면서 천주교 내의 보수 측은 이에 힘을 받아서인지 정의구현사제단과 함세웅에 대해 박해하는 행위가 심해졌다. 새삼스럽게 정의구현사제단이 주교회의 공인을 거치지 않는 임의단체라는 비판도 나왔다. 사제단을 공격함으로써 함세웅을 겨냥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그는 원칙에는 단호한 편이다. 

우리 정의구현사제단에 대해서는, 이를 역사가 공인해주고 시대가 공인했는데, 다시 누구한테 공인을 받느냐? 독재와 맞서 싸웠던 우리들의 삶이 있고 그것을 토대로 민중이 공인했는데, 그러지도 못한 자들이 뭘 공인 운운하느냐 하면서 정면으로 이의를 제기했죠.

아직도 좀 유치한 교우들은, 정의구현사제단이 주교회의에서 인정받지 않았다고 이야기해요. 아니, 그 당시는 우리가 천주교를 대표하는 기관이었는데 누구한테 공인을 받습니까. 그래서 항상 신학적으로 부딪칩니다. (주석 3)

함세웅은 1985년 1월부터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정평위)의 중앙위원을 맡고 있었다. 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정평위는 전두환 정권을 날카롭게 비판하는 천주교의 두 날개 중 하나였다. 초기의 대표는 지학순 주교이고 그의 구속으로 한때 박상래 신부가 책임을 맡았다. 정평위의 위원에는 신자인 변호사 이돈명ㆍ유현석ㆍ황인철 등 인권변호사들이 참여하였다.  

1988년 봄 주교회의에서 느닷없이 "모든 커뮤니티의 위원장은 주교로 한다"라고 정관을 바꿨다. 왜 다른 모든 기관의 위원장은 주교인데, 정평위만 평신자냐는 이유였다. 당시 정평위 위원장은 인권변호사 이돈명이었다. 이로써 이 변호사를 비롯 민간인 위원(변호사)들은 모두 정평위를 떠나고 말았다. 

함세웅도 얼마 뒤 정평위원을 물러나면서 한마디 '증언'을 남겼다. 

일반사회 같으면 이런 일은 칼부림이 날 사건이다. 어떻게 규정도 어기며 사전에 논의도 없이 주교회의에서 정관을 바꿔버리느냐. 신자 회장 체제로 14년 이어졌으면 관습법으로 굳어진 것 아니냐. (주석 4)


주석
1> <함세웅 신부의 시대증언>, 452쪽.
2> 앞의 책, 464쪽. 
3> 앞의 책, 476쪽.
4> 앞의 책, 495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함세웅, #함세웅신부, #정의의구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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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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