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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년 6월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 규탄 범국민대회’에서 촉발된 명동성당사태는 시민과 학생 등 6백여 명의 집단 단식농성으로 이어졌고, 결국 6월 항쟁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다.
▲ 87년 6월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 규탄 범국민대회’에서 촉발된 명동성당사태는 시민과 학생 등 6백여 명의 집단 단식농성으로 이어졌고, 결국 6월 항쟁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다. 87년 6월 ‘박종철 고문치사 은폐조작사건 규탄 범국민대회’에서 촉발된 명동성당사태는 시민과 학생 등 6백여 명의 집단 단식농성으로 이어졌고, 결국 6월 항쟁을 촉발시키는 역할을 했다.
ⓒ 명동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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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동성당은 숨막히는 나날이었다.

치안당국은 첩자를 잠입시켜 갖은 유언비서로 시위자들을 분열ㆍ이간시키고 계엄령 선포, 공수부대 투입, 강제 연행한다는 따위를 퍼뜨렸다. 농성이 길어지면서 계속하느냐 일단 해산하느냐를 두고 이견이 분분했다. 결국 3차 투표 끝에 해산 결의를 하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함세웅과 사제들은 혼신의 노력을 다해 희생자가 생기지 않도록 조정하였다. 

함세웅 신부는 김수환 추기경의 지시에 따라 안기부 등 당국자들과 물밑대화를 계속했다. 그는 일찍이 서울교구 신부들의 지지선언을 이끌어내는 것으로 경찰의 강경진압 움직임을 잠재운 터였다. 그는 평화적인 해결책을 찾아내기 위해 온 힘을 쏟았다. 하지만 15일까지는 안전을 보장받았으나 농성을 해산하지 않으면 강경 진압할 수밖에 없다는 전두환의 뜻을 안기부 차장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주석 6)

함세웅은 포기하지 않았다. 농성자들을 설득하고 정부 측 인사들과 만나 설득하였다. 

성당 근처에 있는 로얄호텔 커피숍에서 만났어요. 시경국장을 주로 만나고, 이상연 안기부 차장도 만나고요. 그분들이 명동성당에 들어오기 거북해하니까요. 추기경의 뜻이기도 하고 우리 교구의 뜻은 '이분들의 안전귀가를 보장하고 성당에 공권력 투입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라는 것이었어요. 그분들은 주동자 몇 사람은 구속수사가 불가피하다고 했는데, 우리는 그건 절대로 안 된다고 강하게 대응하고 설득도 했고요. 정부쪽도 저희 뜻이 얼마나 확고한지 알았고요. (주석 7)

명동성당 농성시위는 6월항쟁의 불씨를 남기면서 5박 6일의 장정을 마쳤다.

15일 오전 10시, 농성대는 대형 태극기를 앞세우고 문화관을 나섰다. 구속된 이 한 명도 없이 5박 6일의 투쟁을 마감한 것이다. 6.10 대투쟁의 불씨를 껴안고 엿새 동안 벌인 이 농성투쟁은 이후의 6.18과 6.26 대폭발로 가는 징검다리이자, 민주주의의 폭풍을 일으킨 진앙의 구실을 했다. 한 시민이 성당에 떨어뜨리고 간, 비닐 봉투에 성금과 함께 들어 있던 쪽지는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온 국민의 마음을 이렇게 대변했다.

"당신들을 사랑합니다. 나는 자신 있게 말합니다. 당신들은 진정 우리의 희망이라고." (주석 8)


주석
6> 유시춘 외, 앞의 책, 220쪽.
7> <함세웅 신부의 시대증언>, 446쪽.
8> 유시춘 외, 앞의 책과 같음.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정의의 구도자 함세웅 신부 평전]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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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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