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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사라졌던 조성길 전 이탈리아주재 북한 대사 대리(1등 서기관)가 지난해 7월 한국에 온 것으로 알려지면서, 남북관계 등에 미칠 영향이 주목을 받고 있다. 2016년 태영호 영국주재 공사의 망명에 이은 북한 외교관의 한국 망명이어서 국제사회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북한 외교관 망명 중에서 두 사건보다 훨씬 더한 충격을 준 것은 한국전쟁 4년 뒤인 1957년 이상조(1915~1996) 소련주재 대사의 망명이다. 이 사건은 망명 자체로도 주목을 끌었지만, '특이한 정변'과 관련돼서도 이목을 집중시켰다. 특이한 정변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불가리아식 정변이다.

부산 출신 이상조, 김일성 측근이 되다
 
 KBS '한국전쟁 6부 - 또다른 전쟁' 화면 갈무리
 KBS "한국전쟁 6부 - 또다른 전쟁" 화면 갈무리
ⓒ K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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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조는 일제 강점 4년 뒤인 1915년 출생했다. 1916년에 출생했다는 기사도 있지만, 1915년으로 보도된 데가 더 많은 듯하다. 태어난 곳은 부산 동래군이고, 할아버지는 선비, 아버지는 지주 겸 기업인이었다. 그가 보통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가족을 데리고 만주로 이주해 농장과 정미소를 운영한 적이 있다. 그가 14세 되던 해에 이 정미소는 파산했고, 그는 부산 동래로 돌아왔다.

이 시기에 이상조는 항일운동에 열정을 쏟았다. 그의 투쟁은 제국주의 식민당국이 특히 위험시하는 사회주의 항일운동이었다. 이 일로 인해 1932년 체포돼 1년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그 뒤에는 중국으로 건너가 학업을 이어갔다. 식민지 조선에서 전문학교(고교급)를 다닌 그는 광둥군관학교·난징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만주 일대에서 항일운동을 전개됐다. 그런 뒤 31세 때인 해방 이듬해에 이북으로 들어갔다. 연안파(재중국 항일 진영) 지도자로서 입북한 그에 관해 1989년 9월 10일자 <조선일보> 기사 '중공군 끌어들인 김일성 측근'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상조 씨는 중국인민해방군 사령관 주덕이 이끄는 조선의용군과 인연을 맺어 김무정이 총사령관이던 조선의용군 제3지대(사단) 지대장을 맡았다. 당시 조선의용군은 총 병력 5만 규모로 입북(入北), 북한 인민군의 모체가 됐으며, 6·25도 이들 병력과 연안파로 불린 지도자들이 주역으로 치렀다고 할 수 있다."
 
이상조는 항일 경력을 발판으로 정치적 기반을 굳혀갔다. "46년 입북 후 중앙당 조직부 부부장, 간부부장, 상업성 부부장 등을 역임했다"고 위 기사는 알려준다.

항일 군인에서 당료·관료로 변신한 그는 1950년 한국전쟁 초반에 군인의 모습으로 되돌아간다. 2019년 3월호 월간 <북한>에 실린 '소련 비밀자료 속 북한 인물들 : 이상조 주소련대사의 망명'이라는 기사는 "6·25 전쟁 당시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내려왔을 때 김일성은 이상조를 호출해 인민군 총참무부 부장 겸 작전국장으로 임명했다"고 말한다.

이상조의 변신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얼마 안 있어 한번 더 변신했다. 중국군 참전 문제로 북·중 양국의 교섭에도 참여했다. 외교무대에 뛰어든 것이다. 중국 활동 경력과 중국어 실력이 감안된 조치였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패전 위기에 직면한 인민군은 이상조 씨를 중공에 보내 모택동·주은래·팽덕회 등과 4차례에 걸친 회담을 통해 중공군을 끌어들였다"고 위의 <조선일보> 기사는 설명한다.

흐루쇼프의 역사적 연설

그의 외교 활동은 계속 이어졌다. 남일 대장을 단장으로 하는 북한 정전대표단에도 참여해 휴전협상을 벌였다. 중장으로 제대한 뒤에도 외교 경력이 이어졌다. 1955년 7월 20일 그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 의해 소련주재 특명전권대사에 임명됐다. 본인은 중국 대사를 원했지만, 김일성이 강권을 했다고 한다.

토지개혁으로 김일성 정권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견고해진 북한에서는, 한국전쟁을 계기로 그의 권력이 한층 공고해지는 양상이 나타났다. 김일성은 개전 명분인 통일을 성사시키지는 못했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인해 세계 최강과 전쟁을 치르게 됐다는 사실 때문에 오히려 위상이 높아졌다. 김일성은 이를 발판으로 최대 라이벌인 박헌영과 남로당 계열을 몰락시켰다. 이런 속에서 '수령의 교시를 실천하자' 같은 구호가 나오고 김일성 중심으로 역사를 재해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런 분위기를 떠나 소련으로 가게 된 이상조는 다소 낯선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이오시프 스탈린 공산당 서기장 사망 뒤에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제1서기가 구축하던 새로운 정세를 목격하게 된 것이다. 죽은 스탈린의 격하와 흐루쇼프의 평화공존정책으로 공산진영의 역학 구도에 변화가 생기고 있을 때, 김일성 곁을 떠나 흐루쇼프 근처로 가게 된 것이 이상조와 평양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게 된다.

소련 부임 4개월 뒤인 1956년 2월 25일, 이상조는 소련공산당 제20차 당대회에서 나오는 흐루쇼프의 역사적인 연설을 접하게 된다. '개인 숭배와 그 여파에 대하여'라는 주제로 스탈린을 비난한 이 연설은 이상조의 마음속에 숨어 있었던 것들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촉매제가 됐다.

김일성과 달리 연안파의 일원인 데다가 김일성 체제 공고화에 불만을 품고 있었던 이상조의 마음은 흐루쇼프의 연설로 인해 크게 흔들렸다. 이 연설은 이상조가 흐루쇼프 및 소련공산당의 지원 하에 김일성 전복 작전에 나서도록 만들었다.

이상조가 재중국·재소련 항일투사 출신들과 함께 벌인 이 정변은 '8월 종파 사건'이란 이름으로 현대사에 기억되고 있다. 그는 공산주의 종주국의 심장부에서 평양에 영향력을 미치는 원격 방식으로 정변에 가담했다. 이들 반(反)김일성 세력은 1956년 8월말로 예정된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이용해 김일성을 끌어내리는 방안을 계획했다.

합법 절차에 의한 것이기는 하지만 최고지도자의 권력을 빼앗는 것이므로, 일종의 정변이라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들은 정형적이지 않은 방법을 구사했다. 권력을 빼앗되 완전히 빼앗지는 않는다는 방식이었다. 김일성이 보유한 노동당 중앙위원장과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직만 빼앗고 내각 수상 자리는 빼앗지 않기로 한 것이다. 최창익을 노동당 중앙위원장에, 김일성을 내각 수상에, 최용건을 인민군 최고사령관에 배치하는 3인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다.

이상조 일파가 이런 특이한 정변을 계획한 것은 이 방식이 성공을 거둔 직전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의 월간 <북한>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 계획의 모델은 같은 해 4월 벌어진 불가리아 공산당 당수이자 수상인 벌코 체르벤코프 해임 사건이었다. 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토도르 지프코프 제1비서를 비롯한 야권 세력은 스탈린주의자인 체르벤코프를 공격했다. 불가리아 공산당 전원회의는 당수로 지프코프를 선출했지만, 체르벤코프를 숙청하지 않고 수상에서 부수상으로 강등했다. 마찬가지로 북한 야권 세력의 계획도 김일성을 즉시 제거하는 것이 아니라 절대 권력만 박탈하자는 것이었다."
 
북한 정부 수립 이래 최초의 최고위층 외교관 망명
 
 부산에 방문한 이상조
 부산에 방문한 이상조
ⓒ e영상역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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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가리아에서 통했던 방식은 북한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정변 주역들은 소련 정부의 지지를 확보했지만, 김일성의 벽을 넘는 데는 실패했다. 김일성은 사전에 눈치를 채고 역공을 가해 반대파들을 숙청했다. 숙청에 대한 소련의 반대가 있었지만, 김일성은 끝까지 밀어붙여 권력을 오히려 더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 사건 이후로 반대자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파벌 단위로 김일성을 공격하는 일은 사라지게 됐다. 그래서 8월 종파 사건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정권이 승계되는 데 기여한 결정적 디딤돌이 됐다.

권력을 방어한 김일성은 소련에 있는 이상조를 처벌하기 위한 수순에 착수했다. 이에 관한 조짐이 도쿄에서 청취된 라디오 방송을 통해 한국에 전해졌다. "이곳에서 25일 청취한 평양방송에 의하면 북한 괴뢰의 주소(駐蘇)대사 이상조는 소환되었고 그의 후임으로서 이신팔이 모스크바주재대사로 임명되었다 한다"고 1956년 11월 27일자 <조선일보> 기사 '괴뢰 주소대사 경질'은 보도했다.

이상조는 김일성의 소환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일단, 핑계거리부터 찾아냈다. 탈장 치료를 해야 한다며 크렘린 병원에 입원했다. 이 상태에서 중국 정부과 교섭을 벌였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고개를 돌렸다.

결국 이상조는 소련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해서 소련에 살게 된 그는 1989년에 고향인 부산에 잠시 방문했다. 서두에 인용한 1989년 <조선일보> 기사에 그의 인생 역정이 소개된 것은 그 때문이다.

이상조 망명은 북한 정부수립 이래 최초의 최고위층 외교관 망명이었다. 이 사건은 항일투사 출신들이 흐루쇼프 정권과 연대해 김일성 체제 공고화에 도전하는 과정에서 발생했다. 이 정변에 실패한 이상조가 북한 동맹국인 소련에서 오랫동안 망명 생활을 할 수 있었던 것은, 8월 종파 사건 뒤인 1960년대부터 김일성이 주체노선을 강화하고 소련과 거리를 둔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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