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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
 무명동학농민군 위령탑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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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교단 지도부는 1893년 2월 11일 서울 광화문에서 복합상소(伏閤上疏)를 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각 포ㆍ접에서 선발한 40여 명은 과거를 보려는 유생으로 가장하고 서울로 올라가 경복궁 앞에서 사흘 동안 엎드려 상소를 하면서 교조신원ㆍ동학공인ㆍ탄압중지 등을 호소하였다. 국왕(고종)에게 보낸 상소문이다.

상소문(䟽本)

각 도의 유학 신 박광호 등은 황공하옵게 거듭 머리를 조아려 삼가 목욕재계하고 백번 절하며 통천융운하시고 조극돈륜하시고 정성광의하시고 명공대덕하시고 요준순휘하시고 우모탕경하시고 응명입기하시고 지화신렬하옵신 주상전하에게 말씀을 올립니다.

궁박하면 부모를 부르고 고통스런 처지에 호소하는 것은 사람의 보통 심정이고 자연스런 이치입니다. 지금 전하는 신 등의 천지부모이고, 신 등도 전하가 기르는 어린애입니다. 이 궁박하고 고통스런 처지에 분수를 넘는 죄를 살피지 않고, 한목소리로 먼 길을 가서 임금의 위엄이 지척인 아래에서 호소하는 것이 참담하고 두려운 줄 모르는 게 아니지만, 이처럼 내우 원통한 처지를 천지부모에게 호소하지 못한다면 하늘과 땅 사이에 다시 어디로 돌아갈 곳을 정하겠습니까?

예로부터 성스럽고 밝은 제왕과 현명하고 선량한 재상이 사방의 문을 열어 사방의 소리를 듣고, 음양을 다스리며 사시(四時)를 따라 천하를 태산처럼 편안한 데에 둔 것은 천명(天命)을 공경하고 천리를 따르며 인륜을 밝히고 기강을 세울 뿐입니다.

근래에 도를 실천하는 참된 선비는 거의 없고 공허한 글을 드러내어 겉을 꾸미는 것만 숭상합니다. 경전(經典)을 표절하고 경박하게 명성을 낚시질하는 선비가 10명 중에 8명이나 9명입니다. 선비의 풍조를 생각하면 덕성을 보족하고 학문을 묻는 것은 없다고 할만합니다. 일이 국치(國治)에 관계되어 실로 작은 일이 아니기 때문에 저희도 모르게 원통함이 하늘에 닿고 통곡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하늘의 운수는 순환해서 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이 없습니다. (중략)

또한 동학이라고 한 것은 그 학명이 본래 동학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늘에서 나와 동쪽에서 만들었고, 당시의 사람이 서학으로 잘못 배척해서 여력이 없었기 때문에 선사인 신 최제우가 제자에게 말하기를, "도가 비록 하늘의 도이지만 학문은 동학이다. 더욱이 땅이 동과 서로 나뉘었는데, 서를 어찌 동이라고 하고 동을 어찌 서라고 하겠는가? 공자가 노(魯)에서 태어나 추(鄒)에서 성행하여 노와 추의 풍조가 이 세상에 전해졌고, 우리 도는 이곳에서 받아 이곳에서 포교하는데 어찌 서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서학으로 그것을 배척하는 것은 부당하고 또한 동학으로 배제하는 것도 부당하다. 그러나 영(營)과 읍(邑)에서 속박하고 죽여서 어찌 할 수가 없으니 어찌 원통하지 않은가? 마음을 지키고 기운을 바르게 하고, 하늘을 공경하고 사람을 따르며 각자 그 바탕을 따르면 성자가 성스러워지고 현자는 현명해질 것이다. 공자의 도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어찌 조금 다르다고 하여 그것을 이단으로 지목하는가?

대개 이 도는 마음의 평화를 근본으로 삼는데, 마음이 평화로우면 기가 조화롭고 기가 조화로우면 형체가 평화롭다. 형체가 평화로우면 하늘의 마음이 바르고 사람의 도가 서게 된다"라고 하였습니다.

진실로 이와 같다면, 선사인 신 최제우가 처음으로 옛 성인이 알아내지 못한 대도를 제창하여 어리석은 보통 부부로 하여금 모두 천리의 근본을 알게 하였으니, 어찌 편협하게 동학으로 이름하겠습니까? 진실로 천하의 끝없는 대도입니다.

신 등이 어찌 감히 아부하고 왜곡하는 말로 폐하에게 아뢰어 위로는 기망하는 죄를 지고 아래로는 외설로 죽음을 재촉하겠습니까?

전하께서는 교화중의 이 어린애를 불쌍히 여기고, 신의 스승의 억울함을 시원스레 풀어주시고 이전에 유배된 도인들을 빨리 용서하여 임금의 덕스런 말씀을 널리 펴서 온화한 기운을 이끌어 맞이하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신 등은 진실로 황송하여 피눈물을 견디지 못하고 매우 두려워하며 간절히 바랍니다. (주석 8)


추운 날씨에 40여 명의 도인들이 땅바닥에 엎드린 복합상소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게 되자 정부는 해산하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회유했다. 그러나 막상 해산하자 태도를 돌변하여 주모자에 대한 체포명령을 내리는 한편, 동학에 대해 더욱 강력한 금지를 명령했다.
  
보은집회 당시 정부의 대책회의에 관한 <일성록>의 기술이 번역되어 있는 <고종시대의 재조명> 197쪽. (가)~(아)의 대화 내용 중 여왈(予曰)은 고종의 코멘트를 가리킨다.
▲ 보은집회 당시 정부의 대책회의에 관한 <일성록>의 기술이 번역되어 있는 <고종시대의 재조명> 197쪽. (가)~(아)의 대화 내용 중 여왈(予曰)은 고종의 코멘트를 가리킨다. 보은집회 당시 정부의 대책회의에 관한 <일성록>의 기술이 번역되어 있는 <고종시대의 재조명> 197쪽. (가)~(아)의 대화 내용 중 여왈(予曰)은 고종의 코멘트를 가리킨다.
ⓒ 출처: <고종시대의 재조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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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에 속았다고 판단한 교단 지도부와 도인들은 3월 11일 충청북도 보은에서 다시 집회를 가졌다. 각지에서 2만여 명의 도인이 모였다.

우리 역사상 민중집회에 이만한 사람이 모인 것은 최초의 일이었다.

보은집회의 성격은 크게 달라졌다. 삼례집회와 복합상소가 교조신원과 동학공인ㆍ탄압금지 등 교단 내부의 요구였는데 비해 보은에서는 목표가 '척왜척양' 등 시대적 주장으로 바뀌었다. 김개남도 태인의 도인들과 함꼐 참여하였다.

비슷한 시기에 전라도 금구에서는 1만여 명의 도인ㆍ농민들이 별도 집회를 열고 상경하여 탐관오리와 외국세력을 내쫓을 계획까지 세우고 있었다. 이같은 동학의 기세에 놀란 정부는 어윤중을 선무사로 파견하여 해산을 명령했다.
 
1893년 11월 말목장터 봉기를 주도한 21명의 참여자들이 각 리(里)의 집강(執綱)들에게 돌린 사발통문.
▲ 1893년 11월 말목장터 봉기를 주도한 21명의 참여자들이 각 리(里)의 집강(執綱)들에게 돌린 사발통문. 1893년 11월 말목장터 봉기를 주도한 21명의 참여자들이 각 리(里)의 집강(執綱)들에게 돌린 사발통문.
ⓒ 동학농민혁명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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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동학도에 대한 박해를 이유로 충청도와 전라감사(조병식ㆍ이경식)를 징계하는 한편, 정부군 600여 명을 보은과 금구에 파견했다. 이에 놀란 동학도인들은 해산했지만, 가슴에는 더욱 뜨거운 응어리가 불타고 있었다.

삼례집회→복합상소→보은(과 금구) 집회로 이어지는 동학의 평화로운 요구를 정부는 기만과 물리력으로 제압하려 들었고, 동학교단은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나 자신들의 역량을  충분히 시험하고 이를 과시하는 계기가 되었다.

동학의 열차가 엔진을 가동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명용사 부조.
 무명용사 부조.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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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경기도 안성, 경상도 함창, 제주도ㆍ강원도 고성, 함경도 함흥 등에서 민란이 일어나고, 일본 어민(왜구)들이 떼지어 제주도 등에 몰려와 인명살상과 재물약탈 행위가 자주 일어났다.

내외적으로 혁명의 시기가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주석
8> 『동학농민혁명 국역총서』 (11), 116~118쪽,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3.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동학혁명, #김개남장군, #동학혁명_김개남장군, #복합상소, #보은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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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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