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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왜 산티아고로 갔는가
▲ [남자찾아 산티아고] 에필로그 그녀는 왜 산티아고로 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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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마지막 이야기

<오마이뉴스>에 6개월간 연재한 '남자 찾아 산티아고'는 결혼과 연애에 대한 고민을 가진 한 여성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이야기다. 모든 원고를 마무리했을 때, <오마이뉴스> 연재를 하다가 알게 된 독자에게 페이스북 메시지가 왔다. 그분은 지난 10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는데, 그곳에서 우연히 나를 아는 사람을 만났다고 한다.

이야기는 이랬다. 길을 걷다  알게 된 한 스페인 남성이 지난 순례길에서 만난 인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그때 만난 한 여성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고... 그리고 독자분과 그 남성은 페이스북 친구를 맺었는데, '함께 아는 친구' 목록에 내가 있었다. 그렇게 해서 밝혀진 사실, 그가 잊지 못해 눈물짓던 사람은 바로 나였고, 그 남성은 라이언이었다.

산티아고에서 라이언을 만난 독자님이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 뜻밖의 메시지 산티아고에서 라이언을 만난 독자님이 메시지를 보내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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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인 스페인 친구, 작가님과는 산티아고에서부터 묵시아까지 같이 걸었던 그 친구 기억하시나요?"

난 몇 분 동안 채팅창만 바라봤다. 반갑고 놀랍기도 했고 '죄짓고 살지 말아야지'라는 생각도 들었다. 세상은 이렇게 좁으니 무슨 일이 벌어져도 하나 이상할 게 없을 것이다.

사실 우연을 넘어 인연이라 여길 법한 상황이지만, 굳이 그러고 싶지 않았다. 어느덧 마음에 드는 사람을 만나 연애를 하고 싶다는 열망은 사라지고, 내가 진정으로 원하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왜 그 길을 걷게 되었는지 되새겨보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정말 연애를 원했을까?"  

이들은 그 먼 길을 내내 손을 잡고 걸었다
▲ 늘 사이좋던 커플 이들은 그 먼 길을 내내 손을 잡고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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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혼 未婚', 아직 결혼하지 못한 자

태어날 때부터 내 운명은 결혼으로 이어졌다. 나뿐 아니라 이 땅의 모든 딸들은 늘 시집을 갈 재원으로 자라나길 당부 받는다.

"그래서 시집이나 가겠니?"
"젓가락질을 저리 못하니, 나중에 시부모한테 흉잡혀서 어째."
"여자애가 흉터가 이리 남으면, 나중에 남편한테 어떻게 보이려고."

어른이 되어서도 마찬가지였다. 결혼은 결승선이었다. 결혼한 친구들은 모임에 나와 "아, 나도 처녀 때가 부러워"라고 말하지만, 신세한탄이 서린 듯한 그 말끝에는 결승선 안에 들어갔다는 안도감이 배어있었다. 이런 엄혹한 현실 속에서 '나는 저 결승선이 별로인 듯하니, 옆길로 새겠어요'라고 말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보니 자존감을 꺾는 일화는 넘쳐난다. 나는 술 취한 후배에게 "3년 후에도 언니처럼 결혼 못하면 어쩌죠?"라는 소리를 들었고, 한 지인은 동창회에 갔는데 전혀 관심도 없는 남자동창으로부터 "내가 쟬 구제해줘 볼까?"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미혼여성은 우리 사회에서는 '불쌍한 여자' 혹은 '구제의 대상'이 되고 만다. 

뿐만 아니다. 밥 한 끼 안 사주면서 "결혼을 안 할 거면 돈은 많이 모아뒀냐?"라며 내 개인자산을 걱정하는 타입부터, 출산율 감소로 인한 대한민국의 인구 절벽을 걱정하는 '언제부터 그렇게 나라걱정을 하셨는지' 타입도 있다.

밥이라도 한 끼 사주시고 후식을 먹으면서 말씀해 주세요.
▲ 제 인생에 훈수 두고 싶다면 차라리 밥이라도 한 끼 사주시고 후식을 먹으면서 말씀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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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글들끼리의 세계도 각박하긴 마찬가지다. 한 선배는 거래처의 여자 과장 성격이 아주 깐깐하다며, "그녀가 왜 시집을 못 갔는지 알 것 같다"고 덧붙였다. 본인도 40대 중반의 싱글 남성이지만, 그 말을 하는 데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었다.

결혼을 안 한 남자동기는 내게 이런 말도 했다. "남자가 결혼을 늦게 하면 자기보다 나은 여자를 만나고, 여자가 결혼을 늦게 하면 자기보다 못한 남자를 만나는 거야." 그의 표정엔 우월감이 서려있었다.

심지어 지인과 말다툼을 하던 내 친구는 "저러니까 결혼을 못했지"라는 소리를 들었다고 한다. 그 지인은 이혼한 여성이었다. 싱글이면 싱글끼리 위해주며 살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미혼여성은 싱글 중에서도 가장 낮은 위치였다.

이렇게 미혼여성을 둘러싼 채 '아무말 대잔치'가 벌어지지만, 정작 그들의 선택에 대한 이야기는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비혼'이라는 단어는 간단히 무시되고 만다. 이것이 바로 이 땅을 살아가는 미생(未生)... 이 아니라 '미혼(未婚), 아직 결혼하지 못한 자'... 그중에서도 '미혼여성'의 삶이다.

설상가상 미혼여성에게 주어지는 또 다른 잣대가 있다. 바로 연애다. 한 지인은 술자리에서 "누나, 결혼은 안 해도 연애는 해요. 여자가 나이 들어서 연애도 안 하면 궁상맞아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결혼도, 연애도 능력으로 치환되는 세계 속에서 그 두 가지가 없는 여성은 어떤 삶을 살든 간에, 그저 '궁상'이라는 단어로 표현된다.

"그때 나는 정말 연애를 원했을까?" 

대답은 '원했다'다. 누군가를 사랑하고 누군가에게 사랑받으며, 서로를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것이 사랑을 향한 100% 순수한 열망이었다고 확신할 순 없다. 그해, 나는 '궁상'이라는 단어에 상처 받았고, 그 단어가 주는 비참함에서 도망치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비슷하게는 "미생(未生),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 혹은 "미망인( 未亡人 ),  아직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과부" 등의 단어가 있다.
▲ "미혼(未婚), 아직 결혼하지 못한 자" 비슷하게는 "미생(未生), 아직 살아있지 못한 자" 혹은 "미망인( 未亡人 ), 아직 남편을 따라 죽지 못한 과부" 등의 단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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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여행이 필요한 이유

살다 보면 궁지에 몰리기도 하고, 선택에 회의가 드는 순간이 온다. 심지어 '너는 이대로 너여서는 안 된다'는 호된 질책에 나도 모르게 '정말 그런가? 정말 내가 못난 사람인가?'라는 자기부정이 피어오르기도 한다. 하지만 자신만의 길을 가는 이들에게 세상은 잔인한 잣대를 들이댄다. 

"네가 한 선택이니 너만 당당하면 되잖아?"

이렇게 물러설 수도 없고 나아가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의 순간, 고맙게도 우리에겐 여행이 있다. 도피라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도 있지만, 도피면 좀 어떤가. 안 돌아가겠다는 것도 아니고 생각 좀 하고 돌아가겠다는 건데.

모든 여행은 경계를 넘는 것에서 시작한다. 모든 것이 당연했던 견고한 내 세계를 떠나 이방인이 되면서부터, 우리는 수많은 다름과 부딪힌다. 다름 사이에서 내 기준점을 낮추기도 하고 끌어올리기도 하며, '이것이 나'라고 생각했던 것에서 벗어나 자신의 기준점을 다시 조정하는 것이다.

이렇게 낯선 사람과 사람 사이를 떠다니며 나를 다시 증명하는 것이 여행이다. 그리고 새로운 땅을 밟고 돌아가는 이는 기존의 자신이 아니라 기준점을 다시 맞춘 확장된 자신이 된다. 경계를 넘어선 순간 나를 둘러싼 언어는 다시 써지는 것이다. 이렇게 여행은 한 인간이 사유를 지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을 제공한다. 

내 경계선을 벗어난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기준점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 여행의 이유 내 경계선을 벗어난 불확실성의 세계에서 우리는 스스로의 기준점을 다시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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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800km를 걸으며 바라본 곳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가 아니라 '내가 떠난 곳'이었다. 모두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과연 옳은지, 혹시 나만 정상의 범주에서 벗어났는지, 나와 남을 견주어보며 끊임없이 불안해하던 곳이다. 길을 걷는 내내 이 여정을 마치고 돌아가야 하는 곳을 끈질기게 바라보며 기준점을 다시 맞출 수 있길 바랐다.

그런 의미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종합선물세트 같았다. 가만히 있어도 전 세계 사람들이 눈앞에 지나다녔다. 나는 그냥 질문을 들고 서 있기만 해도 됐다.

결혼을 하기 전 가장 중요한 것은 '계산'이라고 말하는 독신주의자였던 쥬디, 미혼모로 혼자 딸을 키워왔지만 늘 행복했다는 아이린, 사랑과 결혼사이에서 방황하던 다니엘, 남자친구로부터 청혼을 받았지만 그의 11살 된 아들 때문에 고민하는 릴리, 남자에게 차여서 홧김에 이 길을 걷는다는 헬레나, 봉사자 데이비드를 만난 후 결국 산티아고에 가지않고 길 위에 정착한 수지, 사랑은 중요한 힘이기에 훈련이 필요하다는 미첼, 더이상 무언가를 이루는 삶이 아닌 온전히 존재하기 위한 삶을 살고 싶다는 도널드... 이들 모두가 길 위의 멘토였다.

내가 사는 곳에서 늘 "반드시"라고 규정되던 것들이 길에서 만난 이들에 의해 다양한 가짓수의 대답으로 흩어졌다. 그렇게 수많은 다른 대답 속에서 나는 내 기준점을 다시 조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한국으로 돌아오는 날, 나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얻을 것이 있다면 취하고, 없다면 버릴 일이다.' 

이렇게 800km를 걸으며, 나는 삶에서 "반드시"라는 단어를 지웠다. 고민이었던 연애도, 스트레스 받던 결혼도 "반드시"라는 수식어가 사라지자, 그저 인생의 수많은 요소 중 하나로 평범하게 자리매김했다. 그제야 겨우 자유롭게 숨을 쉴 수 있었다.

나를 둘러싼 현실에서 한발짝 벗어나 바라보기
▲ 여행지에서 할 수 있는 것 중의 하나 나를 둘러싼 현실에서 한발짝 벗어나 바라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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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길을 잃는 의미에 대하여 

2011년 인도 다즐링을 여행할 때였다. 지름길을 찾으려다 길을 잃었다. 사실은 다른 여행자들이 안 가는 길을 가보고 싶었다. 길을 잃었다는 것을 인정하고 되돌아오는 길, 아까 눈이 마주쳤던 아이가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동생 손을 꼭 잡고. '사탕이나 돈을 달라는 걸까...' 난감해하는데 아이가 날 불렀다.

"마담!"

뒤를 돌아보니 아이가 노란 꽃 한 송이를 내게 내밀었다. 꽃을 받고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머리에 꽂아봤다. 두 꼬맹이 모두 좋아라 웃는다. 나는 그 미소에 마음이 부서지는 것처럼 아팠다. 꼬맹이들을 한 번씩 안아주고 사진을 한 장 같이 찍었다. 그리곤 가슴이 먹먹해진 채로 천천히 왔던 길을 되짚어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인연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난다
▲ 아이들이 선물한 노란 꽃 인연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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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꽃을 선물했다
▲ 인도 다즐링에서 만난 아이들 갑자기 꽃을 선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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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던 어느 날, 아침 일찍 폰페라다를 나서다가 길을 잃었다. 어두운 중세의 골목을 헤매다가 우연히 전날 만하린에서 만났던 초르키와 똑똑한 개 린다를 만났다. 그들은 개를 받아주는 숙소에서 하루 묵고, 이제 출발하려던 참이었다. 다시 한 번 그들을 만나고 싶었기에 나는 기뻐하며 말했다.

"아저씨와 린다를 다시 만나기 위해 제가 길을 잃었나 봐요."

자전거로 여행하는 그들과 나는 이제 다시 만나지 못할 것이다. 제대로 작별인사를 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낙엽이 가득한 공원을 지나 폰페라다 시내를 벗어났다. 조금 으스스한 폐공장 지대를 지나 오르막길을 오르는데, 어디선가 미첼이 나타나 날 불렀다.

"롤라! 그쪽 길 아냐."

그도 길을 잃었다가 이제 막 바른 길을 찾아 돌아왔다고 한다. 근데 마침 똑같이 엉뚱한 길로 향하던 내가 보인 것이다.

"네가 길을 헤매지 않도록, 내가 미리 길을 잃었나 봐."

그렇게 우리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길을 잃었다.

불교에는 '시절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인연은 때가 되어 만나고 헤어진다는 뜻이다. 햇볕, 온도, 수분, 토양과 같은 조건이 갖추어져야 씨앗이 싹을 틔울 수 있듯이, 때가 무르익어 만나고 헤어지는 인연은 꽃처럼 피어나 인생에 향기를 남긴다. 그때야 나는 알게 되는 것이다. 그날 길을 잃은 이유를. 그리고 모든 헤맴에는 이유가 있었음을.

울타리를 벗어나 길을 걷는 이들 모두에게 시절인연의 향기가 다가오길 바란다.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길을 걷고 또 길을 잃기도 했다
▲ 모든 헤맴에는 이유가 있다 누군가를 만나 마음을 전하기 위해 길을 걷고 또 길을 잃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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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에 괜찮은 남자가 많다'는 말만 듣고 800km를 걸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태그:#산티아고, #카미노, #CAMINO , #순례길, #남자찾아산티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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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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