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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찾아 산티아고 21] 묵시아의 무지개 ⓒ 정효정
오라 산티아고로

그날은 멋진 날이었다. 산티아고에 입성하는 날이기도 했고, 공교롭게도 내 생일이기도 했다. 아침에 눈을 뜨자 로베르토가 내 침대발치에 와서 스페인어로 작게 노래를 불렀다.

"생일 축하합니다. 생일 축하합니다. (Cumpleaños Feliz, Cumpleaños Feliz)" 

정오 미사시간에 맞추기 위해 걷고 있는데, 에블린과 페트라가 저 뒤에서 내 이름을 소리쳐 불렀다. 기다리고 있자 둘이 숨이 턱까지 차게 뛰어 와서는 동네가게에서 산 와인과 사탕을 내민다. 깜찍한 생일축하 선물이었다. 우리는 길에서 화이트 와인을 나누어 마셨다. 병나발로... 리투아니아에서 온 에블린은 와인은 원래 이렇게 마시는 거라고 했다. 귀여운 외모와 달리 터프한 면이 있는 친구였다. 
길을 걷다가 받은 생일축하 선물은 화이트와인과 사탕이었다 ⓒ 정효정
산티아고 대성당 미사가 끝나고 우리는 순례자 오피스로 갔다. 이곳에는 순례증명서를 받기 위한 사람들로 넘쳐났다. 그동안 길에서 마주친 익숙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다시 감동에 젖어 포옹을 나눴다. 미첼은 날 보자마자 비가 오는데도 바닥에 엎드려 경배했다.

"오, 생일된 자이시여."

숙소를 잡고 우리는 술집으로 몰려갔다. 아는 얼굴들이 모두 거기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커다란 치즈 케이크가 하나 도착했다. 36이라는 빨간 초가 꽂혀있었다. 친구들이 준비해 준 생일 케이크다. 케익을 한 조각씩 나눠주면서 사람들에게 축하 인사를 받았다. 일본인 치카라가 피리로 생일축하 노래를 연주해줬다. 나는 답례로 엉터리 시를 읊었다.

"오라, 순례자들이여. 오라, 산티아고로.
와서 내 생일을 축하하라.
그렇다, 내가 바로 생일된 자로다."

기쁘고 즐거운 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점점 가라앉았다. 800km를 걸었는데 맘에 드는 남자가 없었다는 현실적인 문제도 있었지만,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에블린도 페트라도 모두 싱숭생숭해하고 있었다.  
오오 생일된 자이시여 산티아고에 도착해서 생일축하를 받았다 ⓒ 정효정
생일축하 케잌 케잌에는 정확히 36이라는 촛불이 꽂혀있었다. 굳이 그럴 필요 없었는데. ⓒ 정효정
"이 단순한 삶이 끝이라고 생각하니 너무 아쉬워."
"그러게. 그동안 정말 좋았는데."

사실 길을 걸으면서도 이 길의 끝을 두려워했다.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아침에 일어나면 걷고 저녁이면 지쳐 곯아떨어지는 하루. 이 단순한 일상, 꿈같던 날들이 이제는 끝난 것이다.

몇 명은 걷기를 계속해 피니스테라로 간다고 했다. 스페인의 서쪽 끝이라고 불리는 피니스테라는 여기서 89km를 더 간다. 순례자들은 바다에 도착해 신발이나 옷을 태운다고 했다. 철의 십자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미련이나 죄를 버리는 거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낭만이라곤 하나도 없는 나는 '차라리 기부를 하지'라고 구시렁 거렸다. 이 세상에 고급 등산화나 등산복이 필요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걸 태운단 말인가. 

내 친구들은 한 술 더 떴다. 피네스테라에 도착해 캠프파이어를 하며 할로윈 파티를 하겠단다. 대체 800km를 걸어서 가톨릭의 3대 성지인 산티아고까지 왔는데, 어째서 마무리는 이교도의 축제로 하겠다는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산티아고 시내 전경 저멀리 산티아고 성당 종탑이 보인다 ⓒ 정효정
산티아고에 남은 사람들은 알베르게의 공동 부엌에서 하루 종일 머물렀다. 요리를 하고 인터넷으로 영화를 보며, 단 1km도 걷지 않고 배짱이 같은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던 중 릴리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레온에서 헤어진 후 첫 메시지였다.

그녀는 레온에서 기차를 타고 사리아로 가 산티아고까지 홀로 걸었다고 한다. 하지만 산티아고에 도착해서도 그녀의 고민은 끝나지 않았다. 마지막엔 바르셀로나에 있는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오랜 시간 기도했다고 한다. 그녀 표현대로라면 거의 빌다시피 울면서.

그럼에도 신은 그녀에게 어떤 대답도 해주지 않았다. 결국 남자친구의 청혼에 답을 내리지 못한 채로 릴리는 미국에 도착했다. 공항에는 남자친구와 그의 아들이 마중나와 있었다고 했다. 기뻐하는 이들의 얼굴을 보는 순간 그녀는 답을 찾았다고 한다. 이미 이들을 떠나선 존재할 수 없다고. 그렇게 그녀는 청혼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는 이야기로 긴 메시지는 끝을 맺었다.

공동 부엌에 있는 다른 친구들도 이 메시지를 보면 분명 반가워할 터였다. 나는 급히 계단을 뛰어 내려가다 4층과 3층 사이에 멈춰 서서 잠시 울었다.

길을 걸으며 생각에 빠져있던 그녀의 옆얼굴이 생각나서였다. 그렇게 답을 찾지 못할까 두려웠지만 릴리는 자신만의 순례를 계속했고, 결국 심장이 뛰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을 결심했다.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 헤맸지만 그 파랑새는 결국 집에 있었다는 치르치르와 미치르의 이야기처럼 릴리는 긴 순례를 하고 집에 도착한 순간,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내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지만 누군가가 미래를 향해 한 발짝 발을 떼는 것을 보며 산티아고 순례가 끝났다. 하지만 아직 내겐 남은 이야기가 있다. 스페인 친구 라이언에 대한 이야기다. 
릴리는 답을 찾아 길을 걸었지만 답은 결국 그녀의 가슴 속에 있었다 ⓒ 정효정
묵시아의 무지개

라이언을 만난 건 파리를 여행할 때였다. 첫 인상이 '딱 봐도 자유로운 예술가'였고, 인사를 나누고 나니 역시 화가였다. 짧은 스침 후 우리는 계속 SNS을 통해 연락을 주고 받았다. 산티아고 길을 간다고 하자 '거기 한국인이 많다' 등의 정보를 전해준 것도 그였다. 그런데, 뜻밖에 그가 기차를 타고 나를 만나러 왔던 것이다.

순례자들은 순례의 마지막으로 묵시아에 가기로 했다. 묵시아는 산티아고에서 버스로 2시간 떨어진 작고 아름다운 어촌이다. 성모 마리아가 산티아고의 설교를 듣기 위해 돌배를 타고 이곳을 방문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많은 순례자들이 산티아고에서 피네스테라까지 걷고 다시 30km 떨어진 묵시아까지 걷곤 했다.
작은 어촌 마을 묵시아 이곳에도 순례자를 위한 알베르게가 있다 ⓒ 정효정
묵시아의 성당 2013년 낙뢰로 인한 화재가 있었고 복구된 모습이다 ⓒ 정효정
만하린에서 만났던 초르키는 이 길에 서려있는 성스러운 에너지가 바다와 만나는 곳이 이곳 묵시아라고 했다. 그는 육체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도전에 나서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건 깊은 영혼이라고 했다. 때문에 영적 성숙을 위해 반드시 묵시아에 가라고 했었다. 실제로 이 곳에 성스러운 에너지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섭게 몰아치는 파도의 에너지에 압도당했다.

바다를 마주하고 생각해봤다. 버릴 것이 있는가? 버릴 것은 하나도 없었다. 미련도 없었다. 남자를 찾겠다며 소풍 오듯이 와버린 순례길이었지만, 삶에서 답을 찾고자 이곳에 온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이 내 스승이었다. 원래 의도에서 많이 벗어나긴 했지만, 여행자체는 이보다 완벽할 순 없었다. 

묵시아에서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을 때였다. 창밖에 무지개가 떴다. 다들 반가워하며 카메라로  찍고 있을 때, 옆에 앉아 있던 라이언이 가만히 내 손을 잡았다.

"응?"
"저 무지개를 봐. 좋은 징조 같지 않아? 난 우리 사이가 잘될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사실 그가 날 만나기 위해 이곳까지 온다고 했을 때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싶기도 하고, 정말 이대로 좋은 건가 아리송하기도 하다. 난 대답을 기다리는 라이언을 바라봤다. 그에게 어떤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묵시아의 무지개 차창밖에 무지개가 뜬 것을 볼 수 있었다 ⓒ 정효정
마지막 이야기

산티아고 순례길을 마치고 스페인 남부를 여행했다. 그라나다의 숙소에서 한 한국남성을 만났다. 22살, 이제 막 군대를 제대하고 첫 해외여행을 왔다고 한다. 앞으로 외국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고 싶다고 하기에, 내가 몇 년간 해외에서 살고 여행하며 보고 들은 다양한 사례들을 말해줬다. 나이를 묻기에 나이도 말해줬다. 그런데 그의 표정이 애매하게 변한다.

"누나는 그럼 이제 결혼은 못하시겠네요?"

어째서 이야기가 이쪽으로 튀는 걸까. 자신은 빨리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가정을 꾸리고 싶단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해외를 다녔으니 결혼은 못하지 않겠냐는 게 그의 말이다. 그냥 웃었다. 22살 청년의 당연하다는 듯한 그 태도에서 나는 이제 여행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사는 곳은 그의 사고방식과 행동이 보통의 상식인 곳이다.

묵시아에서 내 손을 잡았던 라이언에게는 정중하게 거절을 표했다. 내 손등에 얹힌 그의 손은 작게 떨리고 있었지만, 내 가슴은 조금도 뛰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정에 대해선 재빨리 잊어버리기로 했다. 도널드의 말대로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는 없다. 그렇게 남자를 찾아 나섰던 내 여정은 미완으로 끝났다. 차라리 유니콘을 잡으러 가는 게 현실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저기 가는 저 도로 표지판도 암수 서로 정다운데 외로워라 이 내 몸은 뉘랑 함께 돌아갈꼬 ⓒ 정효정
순례길의 친구들은 잘 지내고 있는 듯하다. 다비드는 종아리에 순례길을 상징하는 문신을 했고, 카일은 아이들과 찍은 사진을 보내왔다. 물어보진 않았지만 이혼을 하진 않은 듯하다. 미첼은 여전히 여행을 계속 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연락이 닿았을 때 그는 세일링 배를 타고 카나리아 제도를 여행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가 영화 <캐스트 어웨이>처럼 조난당해도 끄떡없을 거라는 이야기를 나눴다.

엘비스 프레슬리의 <If I can dream>을 불러준 나초는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여전히 순례 중이다. 그리고 어느 날 릴리는 다시 단체 채팅방에서 사라졌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기로 했다. 릴리가 어떤 결정을 내렸던 간에 그녀가 변하지 않는다면, 삶은 그녀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갈 것이다. 

나 역시 큰 변화없이 지내고 있다. 헤어질 때 미첼은 수세미를 선물해주며 "인생은 길고 배울 건 많아. 예를 들면 요리 같은 거"라며 내게 요리를 좀 배울 것을 에둘러 권했지만, 여전히 요리에는 관심이 없다. 산티아고 순례를 마쳤지만, 삶은 변하지 않는다. 여전히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역시 결혼에 대한 압박이다. 가끔은 위장결혼이라도 해야 하나 싶을 정도다. 차라리 이미 결혼했고 남편은 원양어선에 배 타러 갔다고 할까.
산티아고를 다녀온 후 종아리에 기념 문신을 새긴 친구 ⓒ 정효정
밤나무 위에서 도 닦던 친구 지금도 여전히 어딘가에서 세상을 수행중일 것이다 ⓒ 정효정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이곳이 내가 사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남의 시선에 맞추기 위해 내 삶의 방식을 버릴 수는 없는 법이다. 아이린이 이야기한 것처럼 삶은 모두에게 같을 수 없고, 헨리에타가 이야기한 것처럼 다가오지 않는 공허를 미리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결혼도 아이도 없이 이대로 살다간 넌 불행해질거야'라는 말들에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이테로 데 라 베가에서 만났던 도널드를 떠올려본다.

그날 나는 도널드에게 '왜 꼭 사람은 늘 행복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행복하지 못하면 루저라도 되듯이 끊임없이 행복할 것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피곤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자 도널드는 내게 말했다.

"행복이라는 말에 강박을 느낄 필요 없어. 행복을 찾다가 인생 끝날 일 있어? 그냥 가슴속에서 느껴지는 순간순간의 기쁨(deep joy)에 집중해. 그리고 그때 네가 가슴 떨림을 느낀다면 너에겐 신의 심장(heart of God)이 있다는 거야. 그 신의 심장을 뛰게 해봐. 그걸 놓치지 않는 삶이 진짜 삶이야."

만약 신이 존재한다면, 그리고 그 신이 내게 무언가 메시지를 전해주고 싶었다면, 아마 그는 작은 마을 입구에서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을 것이다. 내가 낡은 레스토랑에 찾아가서 도널드를 만날 수 있도록. 아마 신은 그 생각을 하며, 그늘 하나 없는 그곳에서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맘에 드는 남자를 찾아 800km를 걸었지만 끝내 못 찾고 돌아온 불쌍하고 웃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났다.어두컴컴하던 삶의 미로에 별만 하나 띄운 채로.

- 다음주에 에필로그로 못다한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설명할 순 없지만 많은 것들이 서로 이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 정효정
"행복을 찾아 헤매기보다, 순간의 기쁨을 놓치지 않을 것" 800km를 걷고 내게 남은 건 그 말뿐이었다 ⓒ 정효정

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에 괜찮은 남자가 많다'는 말만 듣고 800km를 걸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태그:#산티아고, #까미노, #CAMINO, #순례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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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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