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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 백허그를
▲ [남자 찾아 산티아고 20] 산티아고에 백허그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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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남자와의 동침

트리아카스텔라(Triacastela)에서 길은 두 갈래로 나뉜다. 한쪽 길은 사리아로 바로 가는 길이고, 한쪽 길은 사모스를 지나는 길이다. 사모스에는 6세기에 지어진 유럽에서 가장 큰 수도원 중의 하나인 대성당이 있다. 이곳에는 매일 저녁 7시 30분 미사에서 그레고리오 성가를 들을 수 있다.

성가는 단순한 곡조였다. 하지만 성당에 울려 퍼지는 음의 여운 속에서 마음이 편안해졌다. 복화술처럼 입술을 거의 움직이지 않고 부르는 이 노래가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신앙적 확신이 주는 편안함일 것이다. 몇 년 전 부모님을 모시고 인도와 네팔의 불교 성지를 순례했을 때가 생각났다. 베트남, 미얀마, 일본, 중국 등 이국(異國)의 절에서 기도 소리를 듣고 있으면 어쩐지 세상의 진리에 한 발짝 다가선 기분이었다.

매일 오후에 성당 투어에 참여할 수 있다
▲ 사모스 대성당 매일 오후에 성당 투어에 참여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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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모스로 오게 되면서 늘 붙어 다니던 친구들 무리와 떨어졌다. 사실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남자를 찾아 걷기 시작한 길. 늘 괜찮은 남자만 생기면 더 이상 걷지 않고 손잡고 바로 바르셀로나로 가겠다고 했지만 어느새 산티아고는 100km를 앞두고 있다. 착잡하다. 어쩌다 여기까지 걷게 되었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섹시한 레깅스를 소화하지 못하고 면 원피스를 입었을 때부터였을까. 아니, 롭 아저씨가 준 발가락양말을 신기 시작했을 때부터였을까.

초반에 나 혼자 두근거렸던 다니엘, 아침저녁으로 "사랑한다" 외치기만 하고 떠났던 다비드, 내 다리를 치료해준 미첼. 다 좋은 사람들이긴 했지만 나와 인연이 닿는 사람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친구들이 늘어나면서 점점 뭉쳐서 다니기 시작하자 새로운 남자를 만날 일은 더더욱 없어졌다.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 남자를 찾아 떠나온 멀고 먼 길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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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친구들과 몰려 다니다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는 더욱 없어졌다
▲ 맨날 보는 얼굴들 이 친구들과 몰려 다니다보니 새로운 사람을 만날 기회는 더욱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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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은 산티아고를 100km 남긴 사리아부터는 새로운 순례자들이 영입된다고 해서 조금 기대를 하긴 했다. 사리아에서부터 걸어도 순례완료증서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한 달여를 걸어온 기존 순례자들과 새로운 순례자들이 어울리는 일은 잘 없었다. 일단 옷차림부터 이질감이 든다. 이쪽은 같은 옷을 한 달간 입어왔는데 뉴페이스들은 이제 막 아웃도어 잡지에서 나온 것 같기 때문이다. 

아이레헤(Airexe)라는 작은 마을의 알베르게에서 묵게 되었다. 숙소에는 2층 침대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다. 침대를 너무 가깝게 붙여놔서 옆 침대 사람과 동침하는 모양새다. 순간 머리가 복잡해진다. 옆에 여성이 아니고 남성이면 정말 어색할 거 같다. 아니면 지나치게 뚱뚱해서 침대를 넘어오는 사람이면 어쩌지. 아, 제발 아는 얼굴이면 좋겠는데. 하지만 친구들은 7km를 앞서있다.

걱정을 하며 짐정리를 하고 있는데 옆 침대에 누가 다가오는 기척이 들린다. 슬쩍 보니 스페인 순례자 로베르토 아저씨다. 그는 영어를 잘 못해 많은 이야기는 못했지만 곧잘 내게 먹을 걸 권해주곤 했다. 그를 통해 처음으로 올리브잼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만약 이 옆 침대에 그가 아니라 내 이상형의 남성이었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지금까지로 미루어보아 아마 그런 일은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나는 한숨을 쉬고 침낭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리고 잠을 청했다. 산티아고까지 이제 3일 남았다.

사모스에서 새로 유입된 순례자들은 옷차림이 다르다
▲ 옥수수 저장고에서 비를 피하는 순례자들 사모스에서 새로 유입된 순례자들은 옷차림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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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미터의 상대성 이론 

아 브레아(A Brea)라는 작은 마을을 지나는데 여기서부터 산티아고까지 100km 남았다는 석주가 나왔다. 이 석주는 500m마다 서 있었다. 처음 이 석주를 발견했을 때는 반가웠지만 곧 고통으로 다가왔다. 그동안은 정신없이 걷다 보면 마을이 나오고, 그제야 몇 km를 걸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석주가 생기고 나자 그제야 거리에 대한 감각이 생겼다. 500m는 꽤 먼 거리였다. 배낭을 메고 걷기엔.

한번은 걸으면서 옛 직장에서 있었던 일과 옛 직장상사와 그녀가 했던 심한 말과 왜 그때 제대로 받아쳐주지 못했는지에 대한 자기 환멸을 모두 떠올리며 걸었는데, 아까 봤던 석주에서 숫자는 80에서 80.5로만 바뀌어 있었다. 장장 2년의 흑역사를 다 복기했는데, 현실에선 겨우 500m 전진한 거였다. 그럼 오늘 이 흑역사를 40번은 넘게 떠올려야 23km 너머의 목적지에 닿는다는 거 아닌가. 거리를 안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었다.

아무리 걸어도 숫자는 0.5밖에 변하지 않았다
▲ 500 미터마다 남은 거리를 알려주는 석주 아무리 걸어도 숫자는 0.5밖에 변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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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겨움에 빠져서 느릿느릿 걷고 있는데, 순례 첫날 묵었던 오리손 산장에서 만났던 티에스와 마주쳤다. 그는 날 발견하고 놀란 눈치다. 

"솔직히 우린 네가 계속 걸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

겨우 7km를 걷고 파김치가 되어 도착했던 내 상태를 생각하며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꽤 빨리 걷는 편이다. 조금 함께 걷다가 먼저 가라고 하자 그는 내 스틱을 뺏었다.

"여기에 의지하니까 빨리 못 걷지. 너 빨리 걸으려고 시도해본 적은 있어?" 

당연히 없다.

"여기까지 걸어온 걸 보면 넌 할 수 있어. 날 따라와 봐."

천국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다
▲ 마음 먹기에 따라 언제든지 달라 질 수 있는 길 천국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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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 스틱을 들고 성큼성큼 앞서 걷기 시작했다. 군대가 행진하는 것처럼. 나는 별 수 없이 그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내 평소 걸음속도가 '하나- 둘- 하나- 둘-'의 리듬이라면 그와의 걸음은 '핫둘!핫둘!'이었다.

중간에 쉼터를 지났다. 쉬고 싶지만 그가 멈추지 않았기에 눈이 동그래진 사람들을 스쳐 지나갔다. 오르막길이 나왔다. 역시 티에스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오르막이 끝나고야 그는 내게 스틱을 돌려줬다. 힘든 운동을 끝냈을 때의 상쾌함이 찾아왔다.

"우리가 500m를 단숨에 주파한 거야. 것 봐. 하면 할 수 있잖아."

500m의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으로 동일하지 않았다. 흑역사를 한번 통째로 되새기고도 100m가 남는 거리기도 하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걸어서 지나쳐버릴 수 있는 거리기도 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하려면 할 수 있다는 것을. 고비가 생기면 보통은 '안 될 거야'라는 생각부터 하게 되지만 솔직히 그건 하기 싫어서였다.

500m는 내가 어떤 마음가짐을 가지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거리였던 것이다. 결국 그날 열심히 걸어서 7km 앞선 친구들을 따라잡았다. 포상은 친구들의 따뜻한 포옹과 멜리데(Melide)의 특산품인 문어요리(Polpo)였다.

그날 마음 먹고 열심히 걸어서 7km 앞선 친구들을 만났다
▲ 멜리데의 특산물 뽈뽀를 먹으며 그날 마음 먹고 열심히 걸어서 7km 앞선 친구들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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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리데의 특산품이다.
▲ 문어를 삶아 양념한 말리데의 특산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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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에 백허그를

산티아고에 도착하기 전 날, 나와 친구들은 산타 이레나(Santa Irena)에서 묵기로 했다. 슈퍼마켓도 없는 작은 마을이었다. 각자 가방에 있는 식량들을 꺼내봤다. 쌀, 바게트빵, 치즈 등이 나왔다. 미첼은 길에서 누가 버린 반쯤 썪은 호박을 들고 왔다. 그리고 체코에서 온 페트라는 산에서 야생 버섯을 따왔다. 야생버섯이라... 이거 잘못 먹고 내일 지역신문에 실리면 어쩌냐고 걱정을 하자 미첼이 나를 안심시켰다.

"걱정 마. 그녀는 동유럽에서 왔어."

동유럽에서는 버섯채취가 일상이라고 했다. 과연 저 재료로 뭐가 만들어질까 했는데 에블린은 훌륭한 버섯크림리조또를 만들어 냈다. 인근 바에서 술만 사서 우리는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이제 산티아고까지는 20km 남았다.

요리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술도 잘 마시는 소중한 친구
▲ 리투아니아에서 온 친구 요리도 잘하고 성격도 좋고 술도 잘 마시는 소중한 친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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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박, 버섯, 쌀 그리고 치즈만 가지고도 멋진 요리가 완성되었다
▲ 최후의 만찬 호박, 버섯, 쌀 그리고 치즈만 가지고도 멋진 요리가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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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로 향하는 날은 내 생일이었다. 우리는 아침 일찍 걷기 시작해 12시에 하는 정오미사에 참석하기로 했다. 출발시간은 아침 6시 반. 아직 어둡고 비가 내린다. 비가 와서 생긴 웅덩이를 피할 수 있게 서로에게 랜턴을 비춰주면서 걷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유칼립투스 숲속을 지났다. 며칠 전 티에스에게 배운 것처럼 스틱을 사용하지 않고 빠르게 걸었다. 500m를 40번만 걸으면 된다. 마지막 도전이다.

이제 12시 미사까지는 30분 정도 남은 상황. 뛰다시피 걷는데 동네 주민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며 응원해주었다. 건물들 사이로 산티아고 대성당의 뾰족한 탑들이 보였다. 감동은 미뤄두고 '정오 미사참석'이라는 미션수행을 위해 일단 달렸다. 성당으로 뛰어들어 가려는데 가방과 스틱을 맡기고야 입장이 가능하단다. 이미 12시 3분 전. 우리는 투덜거리며 보관센터에 가방과 스틱을 맡기고 다시 성당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서로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뿔뿔이 흩어졌다.

건물 사이로 산티아고 대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건물 사이로 산티아고 대성당이 보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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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대성당 11세기부터 내려온 향로의식이 있다
▲ 정오미사 산티아고 대성당 11세기부터 내려온 향로의식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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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티아고 대성당의 정오미사에 참가하고 싶었던 이유는 바로 향로 의식 때문이다. 40kg의 숯이 든 향로를 8명의 사제(보따 푸메이로)들이 줄을 잡아당기며 향로를 좌우로 이동시킨다. 큰 향로가 포물선을 그리며 성당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을 비행하는 것을 보는 것이 이 미사의 하이라이트다.

11세기부터 거행된 이 행사는 도착한 순례자들의 악취를 해소하기 위해 시작되었다고 한다. 잘 씻지도 못한 사람들이 모여 들었으니 오죽 냄새가 심했을까. 당시 성당은 악취를 없애고 전염병을 예방하기 위해 향을 피웠지만, 지금은 순례의 종결을 의미하는 상징적인 의식으로 남았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델라. 이 도시의 이름은 '산티아고(야고보)의 무덤'이라는 뜻이다. 지하 납골당에는 그의 (것으로 추정되는) 유해가 모셔져 있고, 제단 정면에는 금색으로 치장된 산티아고 상이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다.

우측으로 가면 제단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계단이 있는데 그 계단을 올라가면 산티아고상의 뒤로 올라가게 된다. 사람들은 줄을 서서 올라가 그를 뒤에서 살짝 껴안으며 순례의 완성을 알렸다.

이 많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인도하신 야고보(산티아고, jacob) 성인
▲ 이 분이시다 이 많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인도하신 야고보(산티아고, jacob)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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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게 과연 순례의 완성일까. 나는 도착은 했지만 복잡한 심정이었다. 맘에 드는 남자 손목 한번 못 잡아보고 800km를 왔는데, 이제 와서 동상이랑 백허그 하고 싶진 않았다. 아무리 산티아고 성인일지라도 말이다. 백허그 대신 무릎을 살짝 굽혀 인사하며 그에게 나의 도착을 알렸다. 아마 그도 내가 그리 반갑진 않았을 듯하다. 

성당을 나오니 빗줄기가 굵어졌다. 도시의 사람들은 우산을 쓰고, 순례자들은 판초우의를 펄럭거리며 길을 가고 있었다. 아, 내가 정말 800km를 다 걸어버렸구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망연하게 서있는데 메시지가 울렸다. 스페인 친구 라이언의 메시지다. 메시지에는 이렇게 적혀있었다.

"생일 축하해! 널 만나려 가려하는데 언제까지 산티아고에 있을 거야?"

그는 내가 순례길을 걷는 것을 보고 흥미를 느끼기 시작해서 따라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는 현재 350km 정도 떨어진 레온에 있다. 기차를 타고 이곳까지 오겠다는 문자메시지에 내 머리는 복잡해졌다. 이 친구가 대체 왜 오겠다는 거지?

이제 긴 순례는 끝이 났다
▲ 산티아고시내를 걷는 순례자들 이제 긴 순례는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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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에 괜찮은 남자가 많다'는 말만 듣고 800km를 걸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태그:#산티아고, #까미노, #순례길,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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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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