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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제1차 청문회' 사흘째인 16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 YWCA에서 열린 청문회에 세월호 실종자 수색에 참여한 김관홍(오른쪽), 전광근 잠수사가 참고인으로 출석해 선체 수색작업에서 일어난 각종 혼선과 무리수를 증언하고 있다.
▲ 세월호참사 특위 청문회 참고인으로 출석한 잠수사 '4.16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 제1차 청문회' 사흘째인 16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 YWCA에서 열린 청문회에 세월호 실종자 수색에 참여한 김관홍(오른쪽), 전광근 잠수사가 참고인으로 출석해 선체 수색작업에서 일어난 각종 혼선과 무리수를 증언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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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위 공무원들에게 묻겠습니다. 저는 (세월호 수색) 당시가 다 생각이 납니다. 잊을 수가 없고 뼈에 사무칩니다. 그런데 공무원분들은 왜 모르겠고 기억이 안 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보다 훌륭하신 분들이 그 자리에 계시는데, 저희는 일명 노가다일 뿐인데 그런 사람들보다 더 기억을 잘합니까? 비록 진실이 아닐 수는 있지만 당시 상황은 정확히 얘길 해야죠. 욕을 먹더라도."

16일 서울 명동 YWCA에서 열린 '4.16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에 관한 제1차 청문회' 방청석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세월호 실종자 수색에 참여한 김관홍 잠수사가 세월호 참사 당시의 해경 간부들과 구조책임자들의 불성실한 답변을 지적한 말이었다

이날 참고인으로 출석한 김 잠수사와 전광근 잠수사는 해경과 해군 등 정부의 초기 대응뿐 아니라 이후 장기간 민간 잠수사들이 선체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각종 혼선과 무리수를 증언했다.

"조류 흐르는데, 해경은 '장관이 유가족에 잡혀 있다, 물에 들어가라'"

이미 수색과 시신인양이 끝난 구역에서 뒤늦게 시신이 발견되는 경우에 대해 김 잠수사는 "차근차근 수색하고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을 했다면, 뒤에 재발견되는 일이 없겠지만, 갑자기 (정부 세월호 수색)TF나 해경의 요구로 3층 수색 중에 5층으로 가라는 식의 변경이 있었다"며 "중근이(단원고 안중근 학생)가 기억에 남는다. 꼭 찾고 싶었는데"라고 말하고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김 잠수사는 이어 "그 친구도 잠수사들이 여러 구를 이미 수습한 공간에서 나중에 나왔다"며 "중간에 명령에 의해 자꾸 수색구역이 변경이 돼 그런 미비점이 생겼다"고 진술했다.

해경은 민간 잠수사들의 안전보다 고위 관료들의 입장을 우선시하며 잠수사들의 강행군을 독려한 것으로 드러났다. 잠수병을 피하기 위해선 1일 1회의 잠수가 적정선임에도 민간 잠수사들이 1일 3~4회씩 잠수를 이어나간 이유를 김 잠수사는 "사고자를 발견하면 수습을 하지 않고는 올라올 수가 없는 상황이 한 가지 이유"라며 "또 하나는 해경이 일방적으로 잠수를 지시했다. 조류가 흐르고 있는데도 투입 지시를 했다"고 밝혔다.

김 잠수사는 "해경은 조류가 흐르고 있는데도 '해수부장관이 유가족에 잡혀 있다', '해경청장이 유가족에 잡혀 있다' (그래서) 들어가야 한다는 식으로 지시했다"며 "사고자를 발견하면 우리들이 알아서 들어간다. 장관이나 청장이 잡혀 있는 건 아무 상관이 없다. 그런데 목숨을 걸고 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식으로 지시를 했다"고 진술했다.

"코막힘 뚫는 약 달랬더니 '밖에서 사서 쓰라'"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이 16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 YWCA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세월호 실종자 수색에 참여한 김관홍, 전광근 잠수사의 노고에 박수 갈채를 보내고 있다.
이날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김 잠수사는 "아직까지 세월호에서 못 올라온 9구의 실종자들을 가슴에 묻어두고 있다. 마지막까지 다 수습하겠다고 약속했고 그만큼 열심히 했는데 결국 많은 유가족에게 끝까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씀드렸다"며 "추후에 이런 사고가 있을 때 저희는 또 언제든지 달려갈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은 해드리고 나서 욕을 먹든 칭찬을 듣든, 저희의 결정은 똑같을 것 같다"고 말했다.
▲ 세월호 유가족, 수색작업 벌인 잠수사들에게 박수갈채 세월호참사 유가족들이 16일 오전 서울 중구 서울 YWCA에서 열린 청문회에서 세월호 실종자 수색에 참여한 김관홍, 전광근 잠수사의 노고에 박수 갈채를 보내고 있다. 이날 청문회에 참고인으로 출석해 김 잠수사는 "아직까지 세월호에서 못 올라온 9구의 실종자들을 가슴에 묻어두고 있다. 마지막까지 다 수습하겠다고 약속했고 그만큼 열심히 했는데 결국 많은 유가족에게 끝까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씀드렸다"며 "추후에 이런 사고가 있을 때 저희는 또 언제든지 달려갈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은 해드리고 나서 욕을 먹든 칭찬을 듣든, 저희의 결정은 똑같을 것 같다"고 말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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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 참사 뒤 7월 10일까지 이어진 수색 과정에서 의료지원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고 오히려 잠수사들과 갈등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김 잠수사는 "리베로(바지선)에 5월 6일 이후 의료진이 올라왔지만 코막힘을 뚫어주는 약을 쓰는 문제로 의사를 고소할 뻔도 했다"며 "잠수사에겐 감기가 치명적이다. 코가 막혀 호흡이 되지 않으면 잠수 때 매우 고통스러운데, 코막힘 뚫어주는 약을 요구했더니 의사가 '밖에 나가서 사서 쓰라고 했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5월 10일 이후에 바지선에 올라온 물리치료사와 한방 의료사들이 큰 도움이 됐다. 그분들이 있어 7월 10일까지 버틸 수 있었다. 이 자리를 빌어 큰 감사를 드린다"고 말했다.

이후의 의료지원도 엉망이었다. 김 잠수사는 "2014년 12월 잠수사들에 대한 모든 병원 치료 지원이 끊겼고, 1월에 언론을 통해 호소하자, 2월부터 한 달만 추가로 진료를 받았다"며 "트라우마에 대한 정신과 약물치료는 7월까지 자비로 병원을 다녔다"고 밝혔다. 그는 "지난 7월경에 유가족들을 만났는데, 고맙다고, 고생했다고 하는 말을 듣는 순간 정신과 치료제를 끊었다"며 "그 한마디가 저에게는..."이라고 말하고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이 청문회에서 정부는 구조실패는 물론 희생자들 수습에 자발적으로 나선 민간 잠수사들도 제대로 지원하지 못했다는 게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하지만 잠수사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또 나서서 돕겠다는 뜻을 밝혔다.

전 잠수사는 "아직까지 세월호에서 못 올라온 9구의 실종자들을 가슴에 묻어두고 있다. 마지막까지 다 수습하겠다고 약속했고 그만큼 열심히 했는데 결국 많은 유가족에게 끝까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말씀드렸다"며 "추후에 이런 사고가 있을 때 저희는 또 언제든지 달려갈 것이다. 할 수 있는 일은 해드리고 나서 욕을 먹든 칭찬을 듣든, 저희의 결정은 똑같을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잠수사는 "저는 잠수사 이전에 국민이다. 제가 가진 기술을 통해 현장에서 일을 할 수 있는 상황이어서 간 것일 뿐, 제가 애국자나 영웅은 아니다"라며 "하지만 우리가 왜 현장에서 나와야 했는지, 왜 그렇게 쫓겨나야 했는지, 우리는 포기를 못 했는데 왜 나가야 했는지 묻고 싶다"고 말했다.

○ 편집ㅣ박정훈 기자



태그:#세월호, #잠수사, #수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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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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