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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우리는 잊지 않았습니다
▲ 15일 천호동 로데오거리 아직 우리는 잊지 않았습니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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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4월 15일. 4월 16일의 전날이다. 출근하는데 아내가 묻는다.

"오늘 올 거지?"

세월호 집회 이야기다. 서울시 강동구에는 '세월호 강동대책위'라는 시민 모임이 세월호와 관련된 활동을 주도하고 있다. 15일은 그 대책위 주도로 강동구 번화가 천호 로데오 거리에서 시위가 있는 날이다. 16일 서울광장 전체 시위에 앞서 기획한 집회다.

"가야지. 그런데 아이들은 어떻게 하려고? 시작이 저녁 7시 30분이던데?"
"데리고 가야지 뭐. 잘지도 모르니까 유모차는 가지고 가고. 아이들이 졸려서 어쩔 줄 모르면 도중에 나와야지."

아내의 참여 의지는 컸다. 마을극단 '밥상' 대표로서의 의무감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아이 셋을 키우는 엄마로서 가지는 부채의식이 더 커 보였다. 아니,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조금 더 나은 사회를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 절실해 보였다.

아이들 데리고 집회가도 될까? 언제나 드는 고민

여러분 들리십니까!
 여러분 들리십니까!
ⓒ 세월호 강동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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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문제는 언제나 그렇듯 아이들이었다. 우리 아이들의 경우 평소 취침 시간이 저녁 8시로, 이른 편이다. 그런데 하필 집회를 7시 30분에 시작하겠단다. 아이들이 집회 시간에 '진상'을 부릴 것은 안 봐도 빤했다.

게다가 또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 과연 이런 시위를 아이들이 일찍 접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였다. 언젠가 광화문인가 청계천인가, 서울광장을 지날 때였다. 갑자기 까꿍이가 반가운 듯 창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어? 나, 여기 와봤었는데. 우리 저번에 여기 와서 사람들이랑 같이 있었지?"

뜨끔했다. 아이를 낳은 이후 워낙에 많은 집회에 함께 참여한 터라 녀석이 어떤 집회를 기억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녀석에게 청계천과 광화문, 서울광장이 그렇게 인식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미안한 일이었다. 어쨌든 그곳은 본질적으로 집회를 하는 공간이 아니지 않은가. 그런데 부모가 되어서 아이에게 어떤 공간에 대한 첫인상을 그렇게 심어주고 말았다니. 이게 과연 옳다고만 할 수 있는 일일까?

잊지 않을게
 잊지 않을게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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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뿐만이 아니다. 까꿍이는 어느 날 유치원에서 돌아와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오늘 친구들하고 놀면서 구호도 외쳤어. '박근혜는 물러가라'라고."

당황스러웠다. 녀석을 데리고 그 구호를 외치는 집회는 몇 번밖에 가지 않았던 것 같은데 벌써 그것을 스펀지처럼 흡수해서 친구들에게 이야기하고 다녔단다. 물론 뜻도 모르고 외쳤을 테지만, 어쨌든 부모 입장에서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부모의 눈치도 보였고, 아이가 저 구호를 할아버지·할머니 앞에서 외칠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눈앞이 아득했다. 내가 아이를 너무 정치적으로 키우는 건 아닐까?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다음날은 4월 16일. 1년 전 꽃 같은 청춘이 스러져간 날 아니던가. 나갈 수밖에. 나가서 머릿수라도 보태 아직도 많은 이들이 세월호를 잊지 않고 있음을 보여줘야 했다.

세월호 1주년 전야... 광장에 모인 사람들

많은 분들의 협찬이 이어졌다.
▲ 역시 대세는 비타500 많은 분들의 협찬이 이어졌다.
ⓒ 세월호 강동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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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무를 마치고 아내와 아이들이 먼저 가서 시위를 하고 있는 천호동 로데오 거리로 갔다. 생각보다는 그래도 많은 이들이 함께 세월호의 진실과 인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첫째와 셋째가 그 인파 속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채, 함께 깃발을 흔들며 밤거리의 자유를 즐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유모차에 누워 곤히 자고 있는 산들이.

꺼지지 않는 촛불
▲ 촛불 꺼지지 않는 촛불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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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쓰러웠다. 아무리 까꿍이가 아내에게 일찍 자지 않고 밤에 나와 놀아서 좋다고 고백했다지만, 부모로서 이 늦은 시각까지 아이들을 거리에 세워두는 게 옳은 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어린 녀석들이 벌써부터 거리에 나와 좋은 일을 한다고 기특해 했지만 이 역시 부모로서 마냥 기꺼울 일만은 아닌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사회자가 아내를 불렀다. 마을극단 밥상의 대표로서 한 마디를 해달라는 것이었다. 안 그래도 아내는 내가 도착하자마자 자기 대신 내가 앞에 나가 마이크를 잡으라고 했었다. 사회자가 마을극단을 콕 집자 어쩔 수 없이 앞으로 나갔다.

조용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아내는 "화창한 4월 이젠 벚꽃이 피어도 마음 놓고 즐길 수 없다"는 말을 하며 자기도 울컥했는지 그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래, 요 근래 식구들과 함께 여기저기 꽃놀이를 갔을 때도 아내의 표정 한 구석이 어두웠는데, 그 때문이었던가.

4월은 잔인한 달이다
▲ 아내의 열변 4월은 잔인한 달이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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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엄마의 목소리를 들으며 까꿍이는 또 계속 묻기 시작했다.

"아빠, 엄마 지금 뭐 하는 거야? 엄마 울어? 왜 우는 거지?"
"까꿍이는 지금 여기 우리가 왜 나와 있는지 모르지?"
"응."
"작년에 언니 오빠들 배가 가라앉으면서 죽었던 거 기억나?"
"응."
"그거 때문에 사람들이 모인 거야. 정확히 1년 됐는데, 언니, 오빠들 좋은 데 가라고. 그리고 언니, 오빠들 왜 죽었는지 제대로 밝혀보자고."

아이는 이해했는지 모르는지 건성으로 알겠다며 다시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지만, 그런 까꿍이를 보고 있자니 다시 마음이 차분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그래도 이렇게 나와서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는 건 나의 몫이고, 그것을 바라보고 판단하는 것은 아이의 몫이겠지. 아무리 녀석이 어리다고 하더라도 그게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면 녀석에게 부모의 행동은 어떻게든 영향을 끼치겠지. 비록 강요가 아닐지라도.

아내는 연설을 마치고 들어왔고 우리는 그 뒤로 1시간 더 열심히 시위에 참여했다.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세월호를 잊지 말자"고 외쳤으며, 간혹 '세월호 귀신'을 운운하는 이들에게는 더 적극적으로 우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고작 1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그 생때같은 목숨을 놓아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너희가 정의롭게 컸으면 한다.
▲ 까꿍이와 복댕이 너희가 정의롭게 컸으면 한다.
ⓒ 이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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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오는 길. 아이들은 모두 지쳐 잠에 들어 있었고, 아내는 아까 자신이 한 이야기를 되씹고 있었다. 비극적이지만 매년 4월이면 이와 같은 풍경이 계속될 것 같다는 불안감이 음습해 왔다. 과연 우리는 언제까지 이 말도 안 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혼자 되뇐다. 아이들에게 보내는 바람을.

"까꿍아, 산들아, 복댕아. 아빠는 너희가 정의롭게 커줬으면 좋겠다. 물론 공부도 잘 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운동도 잘 하면 좋겠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정의로운 사람이 돼서 잘못된 거에는 아니라고 말하고, 너희보다 어려운 사람이 있으면 돕고, 많은 사람들이 함께 행복해 하는 세상을 만드는 데 일조하면 좋겠구나. 물론 아빠도, 너희에게 본보기를 보이도록 노력할게."

오늘은 4월 16일이다. 너무 아프다. 길 가는 교복 입은 학생만 봐도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은 날이다. 부디 그곳에서도 행복하길. 우리는 이곳에서 너희들의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결의를 다진다.

다시금 다지는 의지
▲ 엄마와 아빠의 생각 다시금 다지는 의지
ⓒ 세월호 강동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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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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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연재 그 엄마 육아 그 아빠 일기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역사와 사회학, 북한학을 전공한 사회학도입니다. 물류와 사회적경제 분야에서 일을 했었고, 2022년 강동구의회 의원이 되었습니다. 일상의 정치, 정치의 일상화를 꿈꾸는 17년차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서, 더 나은 사회를 위하여 제가 선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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