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현재 87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와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 편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 기자말

어느덧 10월 초순이 되었다. 산에 단풍이 들며 가을이 느껴졌다. 혈혈단신으로 해남에서 서울로 올라온 지도 어느덧 1년이 다 되었다. 세월이 참 빠르게 지나갔다. 고향에 두고 온 부모님과 형님, 누이, 조카가 몹시 그리웠다. '과연 살아계실까? 살았으면 어떻게 살고 계실까?' 하는 생각이 짙어가는 낙엽 사이로 자꾸만 떠올랐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어제 본 듯 그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가을 하늘 달밤 아래에서 홀로 보초를 서고 있으려니 처량한 생각이 들어 유난히 그리움을 탔다.

11월 하순, 갑자기 양구로 원대 복귀를 했다. 양구 원당에서 이동명령이 떨어졌다. 완전군장을 하고 행군을 시작했다. 낮에 걷기 시작했는데 오후 10시경에 이르러 양구에서 원통으로 가는 고개를 넘어 산중턱쯤 되는 곳에서 막사를 치고 숙영하게 되었다. 모두들 힘이 빠져 헉헉 대었다. 피곤한 몸에  우비로 천막을 치고 났더니 몸에 열이 나 잠을 자려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소대장이 나에게 잠이 안 오면 얘기나 하자고 했다. 선임하사 몇 사람도 합석했는데 소대장이 익살맞은 얘기를 하여 사람들을 웃겼다. 그는 나와 같은 이북 출신으로 성격이 쾌활하고 EDPS(음담패설)를 잘 했다. 낮에 힘든 행군을 한 날에도 피곤하지 않는지 밤이 새도록 재미있는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았다. 우리 모두는 피곤한 줄도 모르고 귀를 기울여 정신없이 들었다. 

11월 하순, 이틀 행군 후 새로운 병영 짓기 시작

날이 새자, 야외에서 불을 피워 밥을 해먹고 오전 9시경에 출발을 했다. 행군을 이틀째 계속하니 나보다 덩치가 크고 힘이 센 사람들도 지쳐 쓰러졌다. 나는 전우가 허덕이는 것을 보고 대신 총을 들어 주기도 했다. 저녁 늦게 원통에서 10리쯤 떨어진 아무도 없는 산 아래의 허허벌판에 도착했다. 그곳에 새로운 병영을 짓는다고 했다.

오후 8시경, 판초우비로 천막을 짓고 풀을 깐 후 하룻밤을 지냈다. 그 이튿날부터 산에 가서 좋은 나무를 잔뜩 베어 운반했다. 스리쿼터의 앞바퀴에 피대를 건 후 발동기를 돌려 전기톱으로 나뭇가지를 쳐낸 후 제재소로 옮겼다. 작업대에 통나무를 올려놓고 제재공과 함께 밀고 당기기를 하면서 목재를 자르고 널판자를 켜기도 했다.

목공 작업을 오후 11시까지 계속하기도 했고 어떤 날은 밤을 새기도 했다. 산에서 큰 통나무를 넘어뜨리다가 다치기도 하고 과로로 쓰러지는 사람도 많았다. 사고를 당해도 야전병원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달리 치료를 받지도 못했다.

임상병은 발목을 다쳤는데 입원은커녕 그대로 환자 막사에 눕혀 놓고 후송을 하지 않아 며칠 후 발목이 굳어져 결국 병신이 되고 말았다. 추운 날씨에 맨손으로 작업하다 보니 손발이 얼어 피부가 갈라져 손바닥에선 피가 줄줄 흘렀다.

나무로 기둥을 세우고 싸릿가지로 흙벽의 뼈대인 외를 엮어 흙을 발랐다. 그 후 서까래 위에 진흙을 얹기 위해 너스레를 올리고 풀을 베어다가 지붕을 삼은 뒤 방엔 온돌을 놓았다. 저녁이면 불을 때기 시작했다. 산 속 벌판에서 대대병력이 맨주먹으로 밤낮없이 건물을 지으니 천신만고의 고생 끝에 불과 열흘 만에 병영 수십 동이 새로 생겼다. 그러는 동안에 새로 짓는 막사 주변의 원시림은 모두 황폐화되고 말았다.

12월에 동계훈련을 시작하였다. 대대 주둔지 맞은편에는 소양강 물줄기가 흘렀고 건너가면 금광자리가 있었다. 우리는 그 곳을 지나 산에 올라가 1개월간 산악훈련을 받았다.

연말연시면 떠들썩했던 사회 분위기와 달리 군에서는 고된 훈련 끝에 1955년 새해를 맞았다. 나는 그간 사역과 훈련으로 몸이 쇠약해져 보육대로 가게 되었다. 보육대란 허약한 사병이 몸을 회복하며 휴양을 하는 곳이었는데 화천댐 상류에 자리 잡고 있었다.

화천댐의 물은 크고 넓어 마치 내륙의 바다를 보는 것 같았다. 물도 맑고 깨끗했으며 주위의 무성한 숲으로 호반이 더욱 아름다웠다. 산자락에는 군데군데 원두막을 지어 여름철에는 올라가 쉴 수 있도록 하였다. 보육대 처우로 급식은 일반 군부대보다 나은 것은 없었고, 다만 이곳에서는 사역이 없어 편했다. 나는 보육대에서 한 달을 푹 쉬고 건강한 몸으로 부대로 복귀했다.

연대 공민학교... 국민학교 6개년 과정 속성으로 배워

그해 나는 연대 공민학교에도 갔다. 공민학교란 2개월 동안 국민학교 6개년 과정을 배우도록 속성 과정을 운영하는 학교였다. 나는 일제강점기에 국민학교를 나와 일본어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어깨너머로 배운 한글을 다소나마 읽고 쓸 수준은 되었으나 한글 어학을 정식으로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공민학교에서 배우게 된 것이었다.

나는 공민학교에서 한글과 역사와 지리를 배웠다. 거기서 처음으로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했고 민요도 배웠다.

아침에 기상하면 주위를 청소하고 점호한 후 식사를 시작하는 것은 일반부대와 같았지만, 일과시간에는 훈련 대신 공부만 했다. 나는 기왕 배우는 것이라면 열심히 배워야겠다고 마음먹고 열심히 공부했다. 교관은 전라도 김제 사람이었는데 나이가 불과 22세 정도로 매우 어려 보였다. 엄격하고 성깔이 무척 사나웠지만, 얼굴이 희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이었다.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는 국민학교 과정이야 별 것 있겠나 싶어 두 달 동안 뭐 공부할 일이 있을까 했는데 막상 공부를 해보니 얼마나 힘든지 애를 먹었다.

어문 문법을 배우고 역사, 산수, 수신 등을 공부했고 시도 약간 배웠다. 그러나 남들은 힘든 군사훈련을 하느라고 정신이 없는데 방에 앉아 공부를 하게 되니 몹시 편하고 좋았다.

불편한 점은 두 달 전에 밤새워 속성으로 지은 집이라 여기저기에서 바람이 숭숭 들어왔다. 방안의 보온이 사람의 온기로 겨우 유지되어 숙소 방안 어디를 가나 냉기가 올라왔다. 바닥에 담요를 깔고 자도 여전히 얼음장이었다.

그렇게 두 달 동안 공부하고 4월 공부를 마치었는데 5월이 되니 나보고 또다시 양구에 있는 보육대로 가서 휴양을 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보육대로 가서 휴양하게 되었다.

나는 보육대에서 따스한 봄날을 만끽하며 몸을 수양했다. 6월 초에는 인제읍으로 파견을 나가 집을 짓는 일을 도왔다. 소양강 강변에 움막집을 짓고 산에 가서 땔감을 해오기도 하며 여러 가지 일을 했다. 한 달간 일을 끝내고 원통으로 오자 이번에는 수영교육을 하러 인제로 가게 되었다. 

수영 교관의 말이 6·25 때 화천 일대에서 국군과 중공군이 대격전을 벌였는데 중공군 수천 명이 화천 저수지로 도망가다 수영을 못해 모두 물에 빠져 몰살당했다고 했다.

전투훈련에서 수영 교육이 절실히 필요한 사례라며 우리에게 수영을 열심히 배우라고 하였다. 나는 매일 4시간씩 물에서 오리처럼 수영 연습을 했다. 마침 일본서 수영을 체계적으로 배웠다는 김 상병이 있어서 우리는 그가 시키는 대로 따라했다. 

수영을 얼마나 잘하는지 사람이 서 있기 힘들 정도로 물살이 센 물줄기를 거슬러 헤엄쳐 올라가는 수영 실력 소유자였다. 나는 거기서 '스트로그', '사이드 스트로그', '백 스트로그' 하는 구령에 맞춰 헤엄을 배웠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매일같이 물 속에서 발버둥치며 수영을 배웠지만, 사람이 잡아줄 때만 헤엄치는 시늉을 내지 사람이 손을 놓으면 바로 물속으로 가라앉아버려 운동신경이 영 없는 경우도 있었다. 교관은 그를 보고 무척 답답해하며 야단을 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휴가를 보내줘도 갈 데가 없었지만...

거기서 수영 교육을 한 달간 받고 본대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휴가를 가라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휴가를 보내줘도 갈 데가 없었다. 분대장 장 하사가 자기와 같이 휴가를 가자고 하여 8월 1일 인천시 청학동으로 함께 휴가를 가기로 했다.

휴가비로 10일간의 쌀을 배낭에 받아가지고 길을 떠났다. 쌀은 홍천읍에서 팔아 돈으로 바꾸고 때마침 서울로 가는 군인 트럭을 얻어 타고 서울에 도착했다. 서울에서 인천까지는 쌀판 돈으로 시외버스를 타고 주안에 온 후, 산을 넘고 들을 건너 저녁때 인천 청학동에 도착했다. 거기에는 부모님 두 분이 농사를 지으며 살고 계셨다. 내가 인사를 드렸더니 무척 반가워하셨다.

이튿날까지 쭉 쉬고 나서 그 다음날부터 우리는 논에 가 김을 매었다. 그리고 집안일도 도와주었다. 그러면서 날마다 마실 다녔다. 송도 해수욕장에 구경도 가고 해변에 나가 놀기도 했다. 인천은 참 살기 좋은 곳이었다. 산은 낮았고 들은 매우 기름지고 교통이 편리했다. 연안부두에는 많은 화물선들이 드나들었고 각종 수산물의 집산지였다.

우리는 모처럼 월미도에 갔다가 데모대에 막혀 제대로 둘러 볼 수가 없었다. 유엔평화휴전협정 감시위원국인 공산국가대표들의 철수를 주장하는 데모대들이 "공산감시단은 물러가라!" 하고 구호를 외쳤다. 할 수 없이 월미도 대신 인천 시내 구경을 했는데 인천상륙 작전 당시 폭격으로 파괴된 건물들이 여태 복구를 못한 채 그대로 방치된 곳도 많았고 그나마 남은 건물들도 보잘 것이 없었다.

나는 인천에 머무는 동안 가끔 송도의 교회에 나가 예배에 참석했다. 해수욕장에는 영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고사포 대공사격 연습을 하고 있었다. 매일 무인 비행기를 띄우고 사격연습을 하고 있는데 좀처럼 명중이 되지 않았다.

나는 인천만이 썰물이 될 때 드러나는 드넓은 땅을 보고 깜짝 놀랐다. 멀리 섬이 보이는데 까지 갯벌이 드러난 것을 보고 이 넓은 벌판을 논으로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장 하사의 집에서 열흘 간 휴가를 즐기고 5월 12일경 사단으로 되돌아왔는데 장 하사 어머님께서 특별히 시루떡을 배낭에다 한 가득 담아 주었다.

서울을 지나 청량리에 와서 강원도 춘천 방면으로 가는 트럭을 얻어 탔다. 춘천에 와 보니 저녁이 다 되었다. 춘천에서 저녁을 사 먹고 나서 원통리로 향하는 트럭을 탈 계획으로 양구까지 왔지만, 별이 초롱초롱한 밤이 다되도록 트럭을 못타고 헤매다가 밤늦게 겨우 차를 만나 오후 11시경 가까스로 본대로 귀대했다. 

다음날 고향에 갔다 온 선물이라고 전우들에게 떡을 대접했다. 모두 떡을 먹고 기뻐했다.

어느새 가을이 되었다. 벼이삭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는 중대 사격 선수로 뽑혀 날마다 사격연습에 열중하였다. 연대 사격 대회에 나갔으나 안타깝게도 좋은 점수를 얻진 못했다.

9월 중순, 갑자기 우리 부대는 강원도 거진 방면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다들 장거리 행군이라며 걱정을 했다. 분대장은 나보고 "송 일병, 걸을 수 있겠나?" 하고 물었다. 나는 문제없다고 대답했다.

드디어 행군 날이 왔다. 건빵을 몸에 휴대하고 완전군장을 하고 길을 떠났다. 나는 가면서 건빵을 먹으며 피로를 달랬다. 다들 나보고 덩치는 작은데 뭘 그렇게 많이 먹느냐고 힐난했다. 나는 먹어야 기운을 낼 수 있다고 하면서 동료들에게도 건빵을 먹으라고 권했다.

행군대열은 출발할 때는 빨리 가더니 20km쯤 걸어가니 더 이상 못 걷겠다는 동료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날을 맑고 따스했다. 긴 행군 대열은 몇 십 리나 이어지는지 알 수 없었으나 옆에서는 순찰차가 앞뒤로 왔다 갔다 했다.

나는 힘들어도 사방에 우거진 나무들과 바위 절벽을 바라보면서 가는 것이 즐거웠다. 주변 산의 높은 봉우리로부터 뻗어 나온 구릉과 골짜기며 우거진 나무숲과 자연을 바라보며 곳곳이 민둥산인 이 땅에도 아직 원시림이 그대로 남아있어서 기뻤다.

다시 행군... 전우들이 길바닥에 쓰러졌다

가파른 산비탈에 심은 옥수수 이삭이 큼직하게 삐져나오고 있었다. 김 하사는 "전라도에선 좋은 땅에 심고 거름을 많이 줘도 저렇게 큰 이삭은 나오지 않는데 잘 되는 것이 기후 덕택인가 보다"라고 하였다.

나도 고향에 있을 때가 생각했다. 우리 고장은 강냉이를 많이 심는 곳인데 강냉이 자루가 팔뚝처럼 큰 것이 자라는 곳도 있었다. 이것은 기후가 서늘한 탓이라 생각을 했다. 진부령을 넘어 동해로 빠져 나오는 길은 험한 편이었으나 산천은 아름다웠다.

행군에 지친 전우들이 길바닥에 여럿 쓰러졌다. 저녁 때가 되어 비실비실하는 전우들의 총을 내가 메어 주었다. 사람의 힘이 빠지면 총 한 자루도 큰 짐이 되었다.

오후에 진부령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동해 바다까지는 내리막길이고 신작로도 구불구불 꼬부라져 커브가 시작되었다. 산천이 무척 험했다. 옛날 사람들은 진부령이 힘든 인생살이와 비슷하다고 한탄하며 넘어갔다고 했다.

진부령을 넘으니 동해의 맑고 푸른 바닷물이 아름답게 보였다. 주변의 계곡과 산에서 내려오는 시원한 물줄기며 우거진 숲들의 경관과 계곡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면서 행군을 계속하여 저녁 늦게 평지에 도달했다. 하천 바닥에 천막을 치고 일개 소대에 불침번 두 사람이 교대로 보초를 섰다. 피곤한 행군 끝에 보초를 서는 탓인지 한 시간 불침번도 무척이나 지루하고 길게 느껴졌다.

그 이튿날에도 우리는 행군을 계속했다. 고성군 간성면을 지나 거진쪽으로 행군을 했다. 동해의 높은 산과 맑은 하늘 아래 계곡과 간간히 펼쳐지는 땅 좋은 평지는 옥토였다. 나는 여기가 물과 공기가 맑아 사람 살기에 참으로 좋은 곳이구나 하고 몇 번이고 탄복했다.

저녁 때가 되어 우리는 부대에 도착했다. 부대의 초가집에 각자 막사를 정하고 정착을 했다. 나는 대대본부 중대 병기소대에 배치되었다. 날마다 병기고에서 화약과 탄약을 수리하고 정비하는 게 우리의 임무였다. 나는 그곳에서도 전령 노릇을 했다.

11월 15일, 나는 상사를 따라 거진항 뒤 큰 호수에 갔다. 화약을 멀리 가지고 가서 불을 붙여 물에 던지니 폭음소리와 함께 고기가 수없이 물 위에 떠올랐다. 물고기를 손에 닿는 대로 건져 담으니 두 양동이나 되었다. 죽은 물고기를 미처 줍지 못하면 잠시 후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나중에 알고 보니 건진 물고기는 죽은 물고기의 십분의 일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만큼 물고기가 많이 죽었으나 실제로 잡은 숫자는 적었던 것이었다.

강원도 이천군에선 10월 20일경이면 완전히 낙엽이 들어 푸른 잎이라곤 볼 수 없는데 이곳은 11월 중순인데도 밤나무 잎이나 오리나무 잎이 푸르게 남아있었다. 그러나 높은 산에는 벌써 지난달에 첫눈이 내려 하얀 눈이 보이기도 했다. 평지에는 누렇게 논이 익어가고 산과 들에 푸른 나무가 그대로 있었지만 태백산맥에는 큰 눈이 많이 내렸다. 

돌아오는 길엔 넓은 논 가운데 숲으로 우거진 밭을 보았다. 만 평정도로 보이는데 나무와 잡초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무성하고 말뚝에 위험 표시가 매달려 있었다. 김 상사는 나에게 이 숲은 지뢰가 많이 매설되어 있어 개간하지 못하고 있다고 일러 주었다.

몇 달 전에도 열아홉 살 먹은 처녀가 소를 몰고 가다 소가 고삐를 채는 바람이 소고삐를 놓쳤다고 한다. 소가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이 숲으로 뛰어 들어가 소를 따라온 처녀가 지뢰를 밟아 죽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소는 멀쩡히 살아나왔다고 했다. 우리 중 누군가가 "아, 그 처녀 아깝다. 결혼도 한 번 못해보고 죽다니 …" 하고 안타까워했다.

추수 때가 되니 벼가 기가 막히게 잘 익었다. 산에선 참나무에 도토리도 아주 튼실하게 잘 달렸다. 큰 나무나 작은 나무나 잘 익은 도토리가 주렁주렁 매달렸다. 도토리를 보니 고향 생각이 절로 났다. 우리 고향에선 가을이 되면 온 식구가 자루를 몇 개씩 가지고 산에 가서 도토리를 두 가마, 세 가마씩 소달구지에 실어오곤 했었다. 가을 내내 스무 가마 이상을 주어다가 양식 보탬도 하고 돼지 먹이도 만들었던 생각이 떠올랐다.


태그:#한국전쟁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3,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논어지와 스토리를 만들어 일반인들이 논어를 쉽게 접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