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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이 글은 현재 87세인 장인어른(송관호)이 옛날 일기 형식으로 기록한 수기를 사위인 제(김종운)가 정리한 후 문장을 다듬어 썼습니다. 앞으로 게재할 내용은 인민군으로 북으로 후퇴하던 기록, 그리고 탈영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겪은 고초, 그 후 뜻하지 않게 미군 포로가 된 이야기, 부산과 거제도 수용소에서의 반공 포로 생활 이야기,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석방 조치로 전남 해남까지 피신한 이야기 그리고 다시 한국군으로 입영해 양구군 원당리 비무장지대 전초소(DMZ GP)에서 군 생활을 한 이야기와 마지막으로 미군 군무원으로 근무하면서 한국 생활에 정착하기까지의 삶의 여정을 25여 편 정도로 소개할 예정입니다. - 기자말

우리는 춘천보충대에서 배치를 기다렸다. 시간이 나면 소양강을 건너 벌판을 지나 산에 가서 나무를 해오는 작업을 했다.

춘천보충대는 소양강과 비행장 옆에 있었는데 강물은 맑고 깨끗했다. 비행장에는 전투기들이 몇 대 있었고 파괴된 트럭들과 함께 화물들이 많이 쌓여 있었다. 짐들은 주로 레이션(전투식량) 박스들이었고 주변에는 피난민촌도 있었다.

6월 20일경 어느덧 보리가 누렇게 익어갈 때 50명은 7사단, 100명은 3사단에 배속되었다. 저녁에 우리를 집합시키더니 차에 싣고 북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을도 없고 깜깜한데 트럭은 쌩쌩 잘도 달렸다.

3사단 백골부대 본부 배치

산 넘고 고개 넘어 밤 12시경, 3사단 백골부대 본부에 도착했다. 본부에서는 인사계가 나와 "귀관들 오느라 고생이 많았다"라고 하며 격려해 주고 밤참을 주었다. 이미 저녁을 먹고 출발했었지만, 출출한 탓에 밥 한 그릇을 다 비웠다.

이튿날 사단본부 앞에 모였는데 인사장교가 나오더니 종이를 주며 각자 주소와 이름을 써보라고 하였다. 각자가 써낸 종이를 보더니 필적이 좋은 사람을 골라 본부에 남기고 나머지는 공병대로 넘겼다. 공병대로 배속된 우리는 전방생활을 시작하였다.

들어간 지 며칠 안 되어 공병대장이 아침 일찍 파자마 차림으로 밖에 나와 돌아다니는 것을 발견한 사단 참모장은 '이리와! 지금 여기가 어딘데 속옷 차림으로 돌아다녀?'라며 야단치며 뺨을 후려갈겼다.

양구로 내려가는 시냇물이 있었는데 물이 맑았다. 우리는 그 옆에 사단본부 작전사령실을 짓는 작업을 했다. 날은 뜨겁고 무더운데 나무를 베어오기도 하고 땅을 파서 사령실을 구축하였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데도 쉬지 않고 작업을 했다. 나는 속으로 '이 정도 노력이면 산에 굴을 파고 호를 구축하는 것이 노력도 덜 들고 튼튼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사단장실 주변에 사과나무가 있었는데 누군가 사과를 따먹었다. 그런데 누가 사과를 따먹었느냐는 수소문이 있어 아무개 대위가 따먹었다는 보고가 들어가자 사단장은 대위를 불러 경고했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 후 대위가 사병들을 따로 집합시켜 어느 놈이 고자질했느냐고 당장 나오라고 했으나 시간이 흘러도 아무도 나서지 않자 대위는 멀쑥하여 그냥 해 본 소리라고 자리를 파했다.

우리 소 대장은 함경도 북청사람이었는데 별명이 '떼떼' 였다. 말을 할 때면 입을 더듬거리기도 하였고 성이 나면 말을 몇 마디 못하다 발동이 걸려야 겨우 말을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하루는 부대 인근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7사단 장병들을 만났다. 작업 중이라 웃옷을 벗어놓고 러닝셔츠만 입고 있으니까 계급을 알 수가 없었다. 우연히 7사단 장병들과 언쟁이 벌어졌는데 7사단 하사가 우리 소대장을 보고 뭐라 하였는데 제대로 말을 못하고 입만 씰룩거리자 '이 새끼'하고 뺨을 갈겼다.

소대장은 성미는 급하지만, 말은 안 나오니 어쩔 줄 모르다가 나에게 "송 일병! 내 모자! 내 모자!"를 외쳤다. 나는 얼른 뛰어가 모자를 가져다줬다. 소대장이 소위 계급장이 붙은 군모를 쓰고 나자 7사단 하사는 기겁하여 "소대장님, 죄송합니다. 잘 모르고 그랬습니다" 라고 사과하였다.

공병에서 보병 23연대로 전출

한 날 밤에는 비상이 걸렸다. 비가 줄기차게 쉬지 않고 내려 강물이 불어나 다리가 끊어졌다. 강둑 흙을 밀어내고 물줄기를 약하게 하려고 밤새 야단법석을 떨며 애를 썼지만, 홍수에는 속수무책이었다. 그 후 공병에서 보병 23연대로 전출되어 1대대 3중대 1소대로 배치되었다. 그동안 생사고락을 함께하던 친구들과 다시 만날 기약도 없이 뿔뿔이 헤어졌다.

나는 DMZ(비무장지대) 안에 있는 전 초소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군사분계선 밖 2km 전방에 드문드문 있는 전초였다. 여기서 보면 적군들의 모습이 눈으로도 또렷하게 보였다.

우리는 이곳에서 적들의 상황을 망원경으로 관측하고 10분에 한 번씩 보고하였다. 일개 분대가 근무했는데 소대장이 가끔 순찰을 나왔고 분대장과 분대원은 밤낮을 쉬지 않고 보초를 섰다.

산은 그리 높지 않았으나 가파른 편이었다. 바로 옆에는 미군 포병 관측소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포대경(거리측정기)이 장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가끔 그곳으로 가서 구경했다.

맞은 편에는 중공군이 배치되어 있었는데 보병과 포병들이 훈련하는 것을 종종 볼 수 있었다. 휴전된 지 일 년이 안 되어 사방에는 무기는 물론 수습되지 않은 사람들 뼈가 여기저기 있었다. 철조망 뭉치, 철모들도 있었고 포탄이 제일 많았다. 우리는 불발탄에 마음을 졸이며 가끔 폐품 수집도 했다.

여름철이 되니 높고 깊은 산중이어도 날씨가 무척 덥고 습했다. 장마가 닥쳐 큰비가 올 때 밤에 군사분계선 쪽으로 깊숙이 들어가 보초를 서면 기분이 무시무시하였다. 동료의 발걸음 소리만 들려도 등이 오싹하였고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도 겁이 바짝 났다.

하루는 밤 11시 30분경에 혼자 보초를 서는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나면서 숲 속에서 파란빛이 반짝거려 머리털이 곤두서며 등줄기에 땀이 났다. 나는 겁이 덜컥 나서 50m나 떨어진 내무반 입구까지 한걸음에 줄달음쳤다.

잠자는 대원들을 깨워 서너 명이 내가 보초 섰던 곳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그러나 아무도 없었다. 파란빛도 보이지 않고 고요한 정적만 흘렀다. 다들 나보고 헛것을 본 거라고 무안을 주었다. 어떤 사람은 반딧불이라고도 하였고 또 근방에 해골이 많으니 인산분이 날아다니면 빛으로 보일 수도 있다고 했지만, 나는 그때 본 것이 며칠이고 머리에 남아 공포로 되살아나곤 했다.

하루는 미군 흑인 병사가 전초소에 있는 우리를 찾아와 짐을 운반해달라고 사정을 했다. 그래서 다섯 명이 따라가 산 밑에서 산꼭대기까지 짐을 날라주었다. 주로 먹는 식량 보급품이었는데 도와줘서 고맙다고 레이션(전투식량)과 여러 가지 물건을 줘서 받아왔다.

미군들이 먹는 모습을 보니 우리보다 양이 굉장히 많았다. 헬멧을 벗긴 철모통에 우유와 고기 기타 여러 가지 통조림을 막 까서 담는데 큰 철모의 7할 정도 채운 후 먹는 것을 보고 먹성에 놀랐다.

하루는 중사가 "중공군 있는 데 한번 구경 가자"하여 전초소에서 북한쪽 군사분계선을 향해 슬슬 걸어갔다.

얼마쯤 갔을까? 적과의 거리가 너무 가까워 보였다. 그때였다. 바로 옆에 적병이 보였다. 깜짝 놀라서 몸을 피해 숨었다. 알고 보니 바로 코앞에 적의 초소가 있었다. 우리는 '이미 적의 경계선에 와있구나'하고 몸을 돌려 남쪽으로 달렸다.

군사분계선에 근무하면 작업은 없어 몸은 편안했으나 숲이 우거져 사람을 바로바로 볼 수 없어 항상 긴장 상태로 있어야 하는 것이 큰 애로사항이었다. 

골짜기에는 맑은 물이 한없이 흐르고 시원한 물맛이 최고였다. 냇가에도 철조망 뭉치가 한없이 설치되어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심심하면 노래도 불렀다. 나보고 고참병들은 "송 일병, 인민군 생활과 국군생활이 어때?" 하고 물어도 보고 6·25 때의 일도 물어보았다. 아마 내가 인민군 출신이라서 호기심이 발동하는 모양이었다.

분대장 장 하사는 6·25 때 강원도에서 중공군에게 포로가 되어 이북의 벽동포로수용소에서 3년간 갇혀 있다가 휴전 후 교환되어 남한으로 돌아온 후 다시 본부대로 예속되어 남은 기간을 마저 복무하는 중이었다.

그는 수용소에서 옥수수와 감자 등 잡곡을 조금씩밖에 못 먹고 주린 배와 고된 기합받으며 온갖 고생을 다했다고 했다.

장 하사는 자기가 겪은 일을 생각해서 그런지 나에 대해 동정을 무척 베풀어 주었다. 그는 나보고 당신과 나는 남과 북에서 비슷한 입장에 처해 같은 고생을 한 사람이라면서 나한테는 기합을 주거나 그런 일은 없을 테니 알아서 잘해달라고 당부를 했다. 나로선 여간 고맙고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거기서 얼마간 근무하다 벼 이삭이 필 무렵 나는 인제군 남면 관대리에 있는 3군단 사령부로 파견을 나가게 되었다. 사람들이 우리 가까이 살면서 농사를 짓는다는 게 무척 기뻤다. 3군단에서는 매일 제초작업, 도로 보수작업 등을 도왔다.

그러다가 나는 장관 식당에 나가 근무하게 되었다. 장관식당은 주로 대령급 이상과 미 고문관들이 식사하는 곳이었는데 중앙에 군단장 식탁이 놓여있다. 좌우에 부군단장, 그 옆에는 참모급들의 식탁이 두 줄로 배열되어 있었다.

식당의 모든 업무는 백 중사가 담당하고 있었고 요리사가 한 사람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잔심부름을 하며 식당 일을 하나하나 배워나갔다. 

장관 식당의 음식 종류는 특별 부식 외에는 사병과 별다른 것이 없었지만 먹고 남은 반찬은 다시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남은 음식을 맘껏 먹을 수 있었다.

식사 시간이 되어 백 중사가 미리 식기와 음식을 정돈해놓으면 다들 와서 식사했다. 특이한 것은 군단장 송요찬 장군의 젓가락은 굉장히 컸다. 다른 사람의 것은 일반인 것과 다르지 않았는데 군 단장의 저분만 유난히 길고 굵었다.

군 단장은 새벽잠이 없었다. 그는 새벽 일찍이 복장을 단정히 하고 고요히 잠든 영내를 순찰하는 것으로 일과를 시작하였다. 나는 식당 근무를 하면서 새벽에 남보다 일찍 일어났기 때문에 장군이 다니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군인들은 장군을 보고 '석두'라고 불렀다. 장군이 오면 '야, 석두 온다, 석두 온다'라고 하였다. 나는 왜 석두라고 부르냐고 물었더니 그 분은 상부에서 시키면 시키는 대로, 규칙이면 규칙대로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라 도무지 요령이 없어 그렇게 부른다고 하였다. 

송요찬 장군에게는 남다른 특색이 있었다.

첫째로 그는 어느 사병이던지 경례를 하면 반드시 거수경례로 답례했다. 결코 본체만체 하지 않았다. 웬만한 장교들은 경례를 해도 그냥 지나치거나 거수경례로 답하지 않고 고갯짓만 하는 사람이 많았는데 그는 장군임에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는 그 분을 볼 때마다 마음이 흐뭇했다.

둘째로 송요찬 장군은 식사시간이 지나면 절대로 식사를 하러 오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들도 따라서 식사시간을 엄수했다. 사병식당이나 장교식당에는 밥 시간이 지나서도 밥을 달라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장관 식당은 절대로 뒤늦게 와서 밥을 달라는 사람이 없었다.

8월, 낮에 7사단 탄약고 옆 통신소에서 큰불이 나서 갑자기 비상소집이 났다. 불길이 치솟아 3중대 전체가 화재진압에 나섰다. 송요찬 군 단장이 직접 지휘를 하니 모두 고양이 앞에 쥐로 꼼짝 못 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먼저 탄약고를 흙으로 묻은 후 통신소에 물을 뿌려 불을 껐다.

그런데 화재진압 후 불이 난 건물에서 옷에 불이 붙은 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미군을 어느 병사가 들어가 둘러 업고 나왔다고 해서 화제가 됐다. 미군 고문관이 그를 크게 칭찬하여 순식간에 영웅이 되었는데 얼굴을 보니 뜻밖에도 우리 중대에서 평소에 고문관으로 놀림을 받던 병사여서 모두 놀라 '와'하고 탄성을 질렀다. 

8월 하순, 하루는 비가 얼마나 쏟아졌는지 큰 홍수가 났다. 관대리 비행장에 물이 차 비행기를 옮기느라 법석였고 파견된 우리 중대 막사가 침수되는 바람에 야단이 났다. 나는 그때 소양강이 엄청나게 불은 걸 볼 수 있었다. 신남으로 가는 길에 있던 38교가 물에 떠내려가고 인제로 가는 다리도 부서졌다. 미군 공병이 부교를 가설하여 다시 왕래하게 되었고 군단 안에 막사를 짓고 산에 가서 풀을 베다가 짚을 바닥에 깔았다.

밤에는 신남으로 가서 놀 기회도 있어 가끔 구경을 가기도 했다.


태그:#한국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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