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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드라마틱한 경선 과정을 거쳐 대선후보로 결정된 노무현 후보를 흠집내기 위한 네거티브(negative) 선거 운동 중의 하나가 '고졸' 학력을 부각시키는 것이었다. 학벌지상주의를 지키려는 이들에게 위협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때 태어난 딸과 아내는 산후조리원에 있었다.

"고졸 출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나라 망신입니다. 부끄러워 외국에 나갈 수가 없어요."

남편이 외교관이라는 어느 산모는 귀가 따갑도록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될 이유로 '학력'을 물고 늘어졌다. 결국, 다른 산모들에 의해 그는 산호조리원에서 쫒겨났는데 모욕감을 준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내가 이런 곳에 있을 사람이 아닙니다. 강남의 산후조리원에 자리가 없어서 할 수 없이 이곳에 왔지만, 수준이 떨어져서 대화가 안되네요."

한국의 대학교 진학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왜 대학에 보내려고 하고, 가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에 (소수에 한정되는) 성공과 출세할 수도 있다는 것이 크다. 또한 그것이 아니더라도 대학 졸업장이라는 허울뿐인 간판이라도 있어야 사회에서 무시당하지 않을거라는 두려움이 오래 전부터 머릿속에 학습되었고, 마음 속에 내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벌이 안 되면 돈이라도 많아야 한다는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곧 신분상승의 사다리가 되는 것이다. 출세는 그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과 관계를 구분짓는 계급이 되기도 하고, 상황에 따라서는 자신의 존재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시시때때로 누군가에게 '모욕감'을 줄 수 있는 특권이 되기도 한다.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자기방어의 착각

2014년이 저물어가는 올해는 <지록위마>의 해로 사람들에게 깊이 각인되었다. 또한 세월호를 시작으로 아파트경비원의 분신과 땅콩회항에 이어, 굴뚝에 올라가고 오체투지의 노동자를 외면하는 그 속을 들춰보면 '모욕감'이 한국사회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극명하게 또 드러난 한 해다.

모멸감
 모멸감
ⓒ 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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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마지막으로 읽은 책 <모멸감>을 통해서 인간사회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굴욕과 존엄의 감정이 어떻게 생겨나고 있는지 들여다 볼 수 있었다.

핵심은 불균형이다. 경제의 규모는 막대하지만, 그 결실을 공정하고 투명하게 나누는 시스템이 부실하다. 학력은 높아졌지만, 지성은 쇠퇴하고 있다. 수명은 길어졌지만, 편안하게 여생을 보내면서 죽음을 준비하기는 훨씬 힘들어졌다. 경쟁력은 높아졌지만, 혹독하게 경쟁하면서 치러야 하는 사회적 부작용과 개인적 피로감을 견디기 어려워 한다.
- 본문 <한국인의 마음풍경> 중에서 -

<신은미 토크콘서트>에서 폭발물을 던진 고교생사건은 충격이기도 하지만, 밝혀지는 원인을 보면 실생활보다는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강한 소속감을 느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관심을 받지 못하는 무플(댓글없음)과 어그로(위협이나 조롱으로 관심을 끔)에서도 주목을 받지 못하고 강제탈퇴까지 당했다고 한다.

저자는 모멸감을 증폭시키는 또 다른 요인으로 타인들의 시선과 평가에 대한 과민함이 한국인들에게서 유별나게 나타난다고 한다. 수시로 느끼는 것이지만, 한국사회에서 과시하고 잘난체하는 문화가 만연한 것은 무시당하지 않으려는 자기방어의 심리가 작용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욕설이 난무하는 청소년들의 대화속에는 상대에게 지고 싶지 않은 경쟁심리가 작용하는것이고, 드라마에서 연예인이 입고 나온 외투나 가방이 순식간에 품절되는 기이한 현상도 '명품' 속에 자신을 숨김으로서 자기과시와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자기방어의 착각에서 오는 것이라고 본다.

자본에 길들여진 비정상의 사회

타인의 인정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면, 칭찬과 비난에 일희일비하는 진폭이 커지기 마련이다. 사이버 공간에서 그 파동은 더욱 격렬하다. 페이스북에서 '좋아요!'클릭 열 번 받다가도 어쩌다가 섭섭한 피드백이 하나만 올라오면 기분이 바닥으로 떨어진다. 그런 공간은 그래도 지인들이 연결되는 공간이라 심한 말이 오가지는 않는다. 문제는 익명으로 얼굴을 감추고 인신공격을 가하는 악플이다.
-본문<공동체의 붕괴, 집단주의의 지속>중에서-

자신의 정체를 감출 수 있는 인터넷공간에서 벌어지는 악플의 문제도 유난히 한국이 심하다고 한다. 악플러 중에는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다는 조사는 차고도 넘친다. 실생활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느끼지 못하는 것에 대한 보복으로 인터넷상에서 이유없는 증오와 조롱을 통해서 자기만족을 느끼는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신을 더 자괴감에 빠지게 하고, 삶을 공허하게 만들뿐이다.

얼마전에 쓴 기사에 놀랄정도로 악플이 많이 달렸었다. 처음에 몇 개정도는 아무렇지 않았지만 많아지면서 불쾌했다. 어느 독자의 제보로 악플을 유도하는 진원지를 알게 되었다. 나는 도마위에 올려진 생선이었다. 사실관계를 왜곡하고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되는 악플에 난도질을 당하는 느낌은 모욕이었다. 그러나 처음의 불쾌감은 점차 그들에 대한 측은한 연민으로 변해갔다.

게시판 개설자로 추측되는 악플러가 온갖 조롱과 야유로 도배를 한 장문의 메일을 보내서 도발을 부추겼다. 악플에 일일이 대응하는 것은 시간낭비일 뿐이며, 무대응이 최선임을 알고 있기에 삭제해버렸다. 계속할 경우 어떤 조치를 염두해 두고 있었지만 사그라들었다.

익명의 인터넷공간에서의 패악질 만큼이나 심각한 것은 감정노동자에 대한 폭력이다. 자본을 최고의 가치로 떠받드는 기업문화가 만들어낸 '손님은 왕이다'라는 왜곡된 인간관계는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람을 상품으로 취급할 수 있다는 자본주의에 길들여진 인간성을 보여준다. 그것은 한국의 경제성장이 인간(노동자)의 존엄을 무시하고 노동을 착취한 토대위에 세워진 비정상의 사회라는 증거다.

저자는 맺음말을 통해서 모멸감을 덜 느끼는 세상과 인간으로서 당당함을 누리고 살려면 무엇을 어떻게 실천해야 하는지 세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구조적인 차원에서의 접근과 둘째, 문화적인 차원의 접근을 생각해야 하며, 셋째는 개인의 내면적인 힘을 키워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나를 돌보는 힘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인정이며 자존감을 키우는 것이라고 한다.

타인을 통해 자존감을 얻는 길은 두가지가 있다. 하나는 자기보다 못하다고 여겨지는 사람들과의 비교속에서 우월감을 느끼거나 그들 앞에 과시하고 군림하는 것, 다른 하나는 우열의 관념에서 벗어나 마음을 나누고 함께 배우며 경험을 공유하는 것이다. 전자의 경우에 온갖 관심은 외형적인 것들에 치중되면서, 나 자신은 공허한 중심으로 남는다. 후자의 경우에는 나를 돌보는 힘이 자라난다. 역설적으로, 타인을 배려하고 인정하면서 이루어지는 유대를 통해 자존감이 더욱 단단해진다.
- 본문<생존에서 존엄으로>중에서 -

덧붙이는 글 | 제55회 한국출판문화상 수상작 저술 교양 부문 공동수상
모멸감 / 김찬호 / 문학과지성사 / 2014.3 / 13,500원



모멸감 - 굴욕과 존엄의 감정사회학

김찬호 지음, 유주환 작곡, 문학과지성사(2014)


태그:#지록위마, #모멸감, #굴욕, #감정, #우월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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