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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경 대학원에서 수업을 받는데, 교수가 장난스럽게 질문을 하나 던졌다.

"중국에 정당이 몇 개 있는지 아는 사람 있나요?"

우리들은 물론이고 중국 학생들도 의아한 얼굴로 교수를 바라봤다. 교수는 장난스럽게 말을 이었다.

"중국은 공산당의 지도 아래 움직이는 나라지만 8개의 민주파 정당이 있습니다. 그중에는 국민당의 후신이라 할 수 있는 민혁당(民革黨)도 있습니다."

정말이었다. 국민당 혁명위원회의 줄임인 민혁당을 비롯해 민맹당(중국민주동맹), 민건(중국민주건국회), 민진당(중국민주촉진회)은 물론이고 대맹(대만민주자치동맹)까지 8개 당이 있었다. 사실 의외였다. 중국에 국민당이 있고, 대만 동맹을 주장하는 정당까지 있다니 신기했다. 가장 큰 야당인 민혁당의 당원도 10만 명 정도로, 숫자는 미미하지만 당이 있고 당대회도 열린다. 

종교에서 모든 것이 열려 있듯 정당 역시 열려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이는 앞서 말했듯 상징적인 의미에 가까웠다. 중국은 명백히 공산당의 독재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그 뿌리는 8600만 명을 초과한 공산당원이다. 실제로 14억 중국인들 역시 어릴적부터 '공산당이 없다면 신중국도 없다'는 노래를 부르면서 공산당의 독재를 머릿속 가득히 채우고 살았다.

1921년 상하이의 작은 집에서 시작된 중국 공산당은 30년도 되지 않아 대륙을 장악하는 일당이 됐다
▲ 중국 공산당 1차 전당대회 장소 1921년 상하이의 작은 집에서 시작된 중국 공산당은 30년도 되지 않아 대륙을 장악하는 일당이 됐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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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7월 23일 상하이에 있는 리한쥔(李漢俊)의 집에 모인 지역 대표 12명으로 시작된 중국 공산당이 이렇게 성장할 것을 예감한 이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마오쩌둥, 천두슈, 동필우 등의 인물이 말하듯 공산당은 만들어진 지 30년도 되지 않은 시점에 정권을 잡았다. 

공산당의 영도 하에 움직이는 나라이기 때문에 중국에게 있어 당원은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자산이다. 나라뿐만 아니라 회사에도 당 조직이 있기 때문에 사기업을 제외하고는 어디서나 당의 책임자인 슈지(書記, 서기)가 결재권을 행사한다. 때문에 중국에서 지도자가 되는 첫 걸음은 공산당원이 되는 것이다.

2000년 즈음 연봉이 높은 외국계 회사들이 인기를 끌 때 잠시 공산당원이 되는 것의 인기가 떨어졌지만 중국에서는 당원이 돼야만 리더가 될 수 있다. 실제로 수많은 정치적 위기가 있었던 덩샤오핑도 마오쩌둥이 당원 자격을 박탈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중에 부활할 수 있었다. 지금 주석 시진핑도 당원이 될 수 있던 18세에 문화대혁명을 거쳤는데 아버지 시중쉰이 정치적 박해를 받으면서 자칫하면 당원이 되지 못할 뻔했다.

그런데 시진핑의 변화된 모습을 본 이들이 그를 공청단원으로 추천하면서 자연스럽게 공산당원이 될 길을 열었다. 중국 공산당은 실제적으로 2개의 조직이 있다. 14세에서 28세의 청년층을 중심으로 한 공청단(共靑團)은 말 그대로 공산당의 청년조직이면서 자연스럽게 공산당원으로 갈 수 있는 통로다. 일반 공산당원은 18세 이상이면 가입할 수 있는데, 당원 2명 이상의 추천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가입이 쉽지 않다.

당원이 되는 관문을 통과해 공산당원이 되면, 신분이나 의무 등에서 많은 규율이 있다. 하지만 능력에 따라 간부로 가는 길도 열리고, 조직에서 승진할 수 있는 기회도 잡게 된다. 실제로 국가 주석이나 총리를 지낸 후진타오를 비롯해 리커창, 리루이환, 리위앤차오 등이 특별한 뒷배경 없이 능력으로 부각한 지도자들이다. 또 향후 중국 지도층이 될 후춘화나 왕양, 저우지앙 등도 모두 젊은 시절에 능력으로 인정 받아 지도자 그룹에 들어온 이들이다. 반면에 보시라이는 부패사건 등에 휘말려 당적까지 박탈당해 정치생명이 끝난 것은 명백한 차이가 있다.

그럼 8700만 명에 육박하는 공산당원은 어떻게 인재로 길러질까. 중국 공산화 과정에서 인재는 군대를 잘 이끌 수 있는 장군들이었다. 마오가 그런 인재였고 친화력이 뛰어난 저우언라이, 개과천선해 중국 군인의 사표가 된 주더, 뛰어난 참모지만 나중에 화를 당한 펑더화이 등도 꼽힌다.

덩샤오핑 시대부터는 '테크노그라트(기술관료)'의 중요성이 강조됐다. 장쩌민, 후진타오, 주룽지, 원자바오 등은 대부분 기술관료 출신으로 최고 지도자의 반열에 올랐다. 이들을 길러낸 것은 칭화대, 베이징대, 지아통대, 푸단대 등 대학을 꼽을 수 있지만, 그들이 사회에 나온 후 기술과 관리 능력을 보강하는 당학교의 역할도 절대적이다. 하지만 소프트파워가 중요해지면서 당대 지도자들은 인문 쪽에서도 많이 나온다.

중국 공산당은 경찰, 공안, 안전, 군대를 통해 중국을 지킨다
▲ 따리엔 시정부를 지키는 경찰 중국 공산당은 경찰, 공안, 안전, 군대를 통해 중국을 지킨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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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접한 중국의 지도자들은 철저하게 길러진 인재들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나와서 일하는 이들을 보면서 상급 관리자들은 어떤 이를 인재로 키울지 판단하고, 그들을 집중적으로 육성한다. 때문에 서른 중반이 넘으면서 그 지역에서 서열 2~3위에 오른 이들도 적지 않다.

또 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들 가운데서 통솔 능력과 친화력이 있는 이들을 선발해 빠른 시간 안에 준 최고 지도자급으로 올린 사례도 많이 봤다. 조직에서 이런 지도자들은 철저히 대우받고 키워져 어떨 때보면 지나치게 권위적이라는 인상을 갖게도 한다. 하지만 공산당의 지도라는 이념을 선택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그런 권위가 필요하기 때문에 한편으로는 자연스럽기도 한다.

공산당 지도자들의 자제 출신을 일컫는 태자당처럼 의도적으로 키워진 지도자들도 있지만 인재는 좋은 대학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중국은 대학입시에도 지역별 정원수가 다르기 때문에 지방에서 베이징대나 칭화대에 입학할 수 있는 이들은 천재에 가깝다. 필자가 만난 명문대생들은 영어는 물론이고 전공 분야에서도 빼어난 자질을 가진 이들이 많았다.

물론 중국의 인재 수급이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각 지역의 대학입시(高考) 수석들이 홍콩이나 싱가포르 명문대학으로 빠져 나가면서 본토의 명문대학들은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중국은 사람도 많고 인재도 그만큼 많다.

베이징에 위치한 중국 공산당 교육의 요람 중앙 당학교
▲ 중국 공산당 교육의 가점 중앙당학교 베이징에 위치한 중국 공산당 교육의 요람 중앙 당학교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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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인재 교육의 가장 대표적인 기관이 당학교다. 말 그대로 공산당 인재의 교육기관인 당학교의 중심은 중앙당학교인데 교장은 차기 지도자가 맡는다. 현 주석 시진핑도 당학교 교장을 맡으면서 인재들과 커뮤니케이션 영역을 넓히고, 공감의 폭을 키워 차기 집권기에 안정을 도모했다.

중앙당학교는 흔히 베이징 여행 갈 때 들르는 이허위앤(이화원)의 북문 근방에 있는데, 이곳에서 사상은 물론이고 지도자로서의 모든 자질을 철저하게 교육 받는다. 물론 부족한 이라면 이 과정에서 낙오되는데, 이런 과정을 통과해 지도자급으로 성장하기 때문에 언행은 물론이고 카리스마까지도 교육 받아서 배출된다. 당학교는 각 성은 물론이고 아래 행정단위까지 있어 당원을 교육하는 한편 조직력을 갖춘다.

도시에서 일하는 민공들이 잠시 짬을 내어 쉬고 있다. 월급을 모아야 멀리 보이는 양복 한벌을 살 수 있다
▲ 잠시 짬을 낸 민공들 도시에서 일하는 민공들이 잠시 짬을 내어 쉬고 있다. 월급을 모아야 멀리 보이는 양복 한벌을 살 수 있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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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원과 대척점은 아니지만 중국에서 일반인들을 흔히 '라오바이싱(老百姓)'이라고 부른다. 공산당원, 특히 지도층을 말하는 '링다오(領導)'가 되지 못한 서민들이 실질적으로 중국을 움직이는 하늘이지만 이들의 삶은 결코 녹록지 않다.

라오바이싱의 가장 생생한 계층들 중에 하나가 민공(民工)이다. 민공은 일자리를 찾아 농촌 등지에서 대도시로 올라온 노동자들을 말한다. 가건물이나 아파트 지하 같은 열악한 환경에서 살면서 자식 교육조차 제대로 할 수 없지만 새로운 기회를 찾아 도시로 올라온 이들은 실제로 도시의 대부분을 만들어낸다.

남편들은 월급 30만~40만 원 공사장 일꾼으로, 부인은 월급 20만~30만 원의 가사 도우미로 살면서 이들은 돈을 모아 고향에서 멋진 가게를 차릴 수 있는 날을 기다린다. 그리고 한해를 보내기 위해 춘지에(春節, 설날)가 다가오면 부모님과 아이들을 위한 물건을 사서 적게는 대여섯시간에서, 많게는 보름간을 이동해 고향으로 돌아가는 게 일반적인 라오바이싱의 삶이다.

한나라 한신과 제갈량 유적을 답사하기 위해 갔던 샨시성 마을의 천진한 아이들
▲ 샨시성 작은 마을의 시골 아이들 한나라 한신과 제갈량 유적을 답사하기 위해 갔던 샨시성 마을의 천진한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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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들이 없었다면 중국은 세계의 공장이 될 수도 없었고, 상하이나 베이징 같이 하루가 다른 마천루를 가진 국제도시도 만들어질 수 없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봤을 때 중국의 민중은 극악한 상황이 아니라면 움직이지 않았다는 특성이 있다. 왕조 교체기도 황제의 지나친 자만으로 일반인들이 굶어죽는 상황에 가서야 본격적으로 시작되거나 아니면 북방의 강한 소수민족이 능력을 길러서 내려올 때 진행됐지, 민란으로 인한 사례는 거의 없다. 공산화 이후 수천만명이 굶어죽은 대약진 시기나 문화대혁명 시기도 민중의 동요가 그다지 많지 않은 것은 중국 라오바이싱들의 특성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한나라를 세운 유방이나 명을 세운 주원장 등도 한때는 라오바이싱에 가까웠다는 점에서 이런 역사가 아예 배제된 것은 아니다. 또 과거처럼 철저하게 몰락할 수 있는 황제가 아닌 엘리트 코스를 거친 지도자가 만들어진다는 점에서 중국 당대를 위태롭게 볼 이유는 줄어든다고 할 수 있다.     


태그:#중국, #시진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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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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