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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민음사가 출간한 책에서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가지 않은 길'을 만났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훗날에 / 나는 한숨을 쉬면서 이야기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 나는 사람이 적게 가는 길을 택하였다고 //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로버트 프로스트 '가지 않은 길' 중에서)

이후로도 그 시가 자주 나를 찾아왔다. 아니 내가 그 시를 찾곤 했다. 프로스트뿐만 아니라 '월든'의 헨리 데이비드 소로 역시 유난히 눈에 들었다. 겉으로는 도회적인 삶을 살던 나였다. 그런데 왜 유독 사람들에게서 떨어진 사람들을 찾았을까. 본능적으로 인생에서 사람들이 많이 걷지 않았던 낯선 길에서 호젓하게 있어보고 싶다는 뜻이었을 것이다.

그런 정서는 내 습관에서도 잘 나타났다. 어릴 적 방학이면 작은 집이 음식점을 하던 무등산 산장에 자주 갔다. 입구에서 시내버스를 타고 40여 분 호젓한 산속을 가야 닿는 곳이다.

겨울 눈이 내리면 산장 맞은 편 정상부에는 동양화 속의 부드러운 산 풍경이 그대로 펼쳐졌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동양화 속 산의 모습을 이해하지 못했을 텐데 나는 그 추억 때문에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당시 산장으로 가는 18번 시내버스의 종점 앞 오십여 미터 전에 큰 오르막 구비가 있었다. 나무들로 둘러싸인 구비 안 공간에는 다형 김현승 시인의 시비가 있었다. 주변에 숲이 이루어져 밖에서는 보이지 않아 의도하지 않으면 찾지 못하는 곳이었다. 대학에 국문학과가 있는지 모를 당시였는데, 나는 그 시비를 몇 번이나 찾아가 읽고 쓰다듬기도 했다.

그 시비는 이렇게 시작했다.

"더러는 沃土에 떨어지는 작은 生命이고저/ 흠도 티도 금가지 않는 나의 全體는 오직 이뿐..."

시인의 '눈물'이라는 시였다. 시인이 어린 아들을 잃고 썼다는 시. 초등학생 고학년쯤, 혹은 중학생이었던 나는 왜 그 시가 그토록 애절했을까. 그 어린이는 객지에 나가 고등학교와 대학을 다닌 후 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가, 30살인 1999년 결혼과 함께 중국행을 결심했다. 부모님이 어렵사리 얻어준 구파발 전셋집이 IMF로 인한 주인의 부도로 한 푼도 못 건질 처지니 집착할 수도 없었다.

많은 사람의 걱정 속, 톈진행 배에 몸을 실었다

1999년 톈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거리를 장악하던 것은 자전거였다.
▲ 내가 처음 살았던 톈진의 자전거 행렬 1999년 톈진에 도착했을 때만 해도 거리를 장악하던 것은 자전거였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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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9년 9월 첫째주 어느날 나는 톈진행 배에 몸을 실었다. 책과 노트북, 당시로는 귀했던 디지털 카메라 등으로 짐은 무거웠다. 중국으로 들어가기 전 만난 사람들은 나에게 중국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부터 생계에 대한 걱정까지 전해 주었다.

"중국 가면 불안해서 살 수 있냐?"
"중국 더러울 텐데 괜찮겠어?"
"먹고 살 방편은 있는 거니?"

다행히 나는 두렵지 않았다. 한 해 전 가을이 시작할 때 일주일 가량 중국을 취재하면서 내가 중국에 적응하는 것에 별 문제가 없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당장 생활비가 걱정이었다. 좀스럽지만 얼마 되지 않은 아내의 유학비를 우선 믿었다. 또 원고를 받아주겠다는 몇 곳이 있었기 때문에 안심됐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가장 중요한 도전의 시기인 서른 살에 별 비전 없어 보이는 중국을 선택하는 것이 맞느냐 하는 것이었다. 당시만 해도 중국 경제가 독일이나 일본을 제치고, 미국까지 꺾을 거라 생각하는 이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거기에 나는 중국어를 전혀 배우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 해를 시작으로 중국은 보라는 듯이 웅비하기 시작했다. WTO(세계무역기구) 가입, 2008년 올림픽 개최, 상하이 엑스포 개최, 우주 시대의 동참, G2로의 등장을 넘어 G1으로의 성장 등이 시작됐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도 별반 상황은 다르지 않다. 

그리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나는 그 현장을 같이 했다. 그 과정을 글과 사진, 동영상 등 다양한 방편으로 기록했다. 그 기록은 <오마이뉴스> 같은 인터넷 매체를 비롯해 신문, 잡지, 방송 등 다양한 방식으로 나왔다.

그 과정이 좋았던 것은 나 혼자만의 시각이 아닌 대중들과 대화하듯이 중국을 이야기했다는 점이다. 2004년 여행사와 방송 코디네이션을 겸한 회사를 차리면서 더욱 더 그 내부에 근접했다. <VJ특공대> 같은 볼거리 방송에서 <PD수첩>이나 <KBS 스페셜> 같은 다양한 기획물을 진행하면서 이슈를 만났다.

KBS <세계는 지금>이나 <세상은 넓다> 등은 직접 기획, 촬영하면서 이슈를 만들어 가기도 했다. 2004년 중국 전문여행 및 콘텐츠사를 창업했다. 의도적으로라도 중국 전역을 주유했다. 

중국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아 현지에서 발행하는 신문의 편집국장 일을 맡았다. 때문에 중국 현안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치열하게 중국을 느낀 지 10년 만에 내 운명은 갑자기 나를 한국으로 이끌었다. 2008년 2월 예정치 않았던 귀국. 그리고 2010년 11월에는 다시 공직의 길에 들어서 중국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다.

내가 중국과 인연을 갖기 시작한 지 15년의 시간 사이에 중국은 미국을 넘어서는 G1이 될 거라는 예측도 보편적이게 됐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내가 중국을 선택한 것은 미래를 내다본 운 좋은 선택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그 행운의 선택에는 하나의 저주도 있다. 바로 카산드라의 저주다. 카산드라는 그리스 신화에서 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의 딸이다. 어릴 적 어른들의 실수로 아폴로 신전에서 놀던 카산드라는 신의 명을 받는 뱀들이 귀를 핥아, 그 후로 자연과 신들이 들려주는 신성한 말을 이해할 수 있었고, 예언할 수 있는 능력도 얻었다.

하지만 훗날 그녀를 안으려는 아폴로를 거부하자, 화가 난 아폴로는 그녀에게 설득력을 빼앗아가 누구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로 인해 그녀는 트로이 전쟁의 한복판에서 이리저리 내쳐지다가 결국 죽음을 맞는다.

나 역시 한국인으로 중국 속에 있으면서 한중 관계의 과거와 현재는 물론이고 미래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갖게 됐다. 그리고 아주 특별한 문제가 아닌 이상 그 변화에 대해서 어느 정도 예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외침은 대부분 그저 공허한 메아리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그 내밀한 이야기를 혼자 듣고 있을 수는 없는 게 운명이기도 하다.

톈진의 한국인 거리, 신방을 꾸몄다

톈진의 명물인 샤리 택시와 남루한 거리
▲ 우리 부부의 첫 집이 있었던 슈앙펑다오 지아인리 앞 길 톈진의 명물인 샤리 택시와 남루한 거리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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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되지 않았던 중국과의 인연으로 다시 돌아가 보자. 1999년 9월 첫 거주지 톈진의 한국인 거리 중심에서 우리 부부의 신방이 꾸며졌다. 아름다운 음악의 마을(佳音里)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아파트는 낡고 좁았지만 좋은 추억들로 가득했다. 그곳의 전화기로 한국의 피시통신에도 접속했고, 얼마 되지 않아 전용 인터넷 선도 깔았다. 처음 가져간 두꺼운 노트북으로 글과 사진을 한국으로 보냈다.

그에 못지 않은 일은 중국어를 배우는 일이었다. 집에서 자전거로 10분쯤 거리에 있는 톈진대학의 중국어 학습반 기초반에 등록했다. 대부분이 한국 학생이었지만, 일본학생이나 북한 학생에서 유럽, 미국, 아프리카까지 결합된 묘한 긴장이 있는 학습 분위기였다.

우리가 중국어를 배우던 교실은 정문에서 들어와 후박나무 숲을 한참 지나면 나오는 호숫가의 남쪽에 자리한 곳이었다. 우리 반을 맡았던 리라오스는 문화대혁명 때 비참하게 남편을 잃고, 딸을 혼자 키우는 나이 든 여교사였다. 그녀는 당신이 겪어야 했던 심난한 현대사를 표정에 담아 독일 병정처럼 딱딱했다. 하지만 속 정이 있어 우리 반 수업이 끝나는 자리에서는 눈물을 보이기도 했다.

중국을 알아가는 일은 수없이 만나는 마오쩌둥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다
▲ 마오가 우뚝 서 있는 톈안먼 광장 모습 중국을 알아가는 일은 수없이 만나는 마오쩌둥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다
ⓒ 조창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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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해는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는 해이기도 했지만 1949년 건국한 중국이 건국 5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했다. 궈칭지(國慶節)로 불리는 10월 1일 행사는 어마어마했다. 50만 명이 톈안먼 광장에 모여, 오전 10시에 자칭린 베이징시 당서기의 행사 개회를 선언했다. 이 행사에서 가장 앞에 선 인물은 인민복을 입은 장쩌민 국가주석과 리펑 전인대 상무위원장, 주룽지 총리등 3세대 주요 인물들이었다.

10년 전인 1989년 6월 4일 톈안먼 사건으로 권력에 접근한 장쩌민은 세계의 비난 속에서도 대과 없이 10년을 넘겼다. 이때 중국 지도자들이 내세운 가치는 "중국은 21세기에 '동방의 부국'이 될 것이다"라는 구호였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본선진출, 생사를 넘나들다

그해 한국에서는 플레이오프에서 두산을 4연승으로 물리친 한화가 삼성을 이기고 온 롯데를 4승 1패로 물리치고, 한국시리즈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이승엽의 54개 홈런 신기록이 경이로웠지만 한회 송진우, 구대성, 장종훈 등과 로마이어, 데이비스 등 외국인 선수의 조화가 이뤄낸 처음이자, 지금까지는 마지막 신화였다.

한편 당시 중국에서 가장 관심을 끈 것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 축구의 본선 진출이었다. 이미 프로축구인 지아(甲)A 리그의 활성화로 광팬(球迷)이 천지였던 중국인들에게 시드니 올림픽 진출은 초미의 관심사였다. 그 가장 위태로운 경기가 한국에서 한화와 롯데가 5차전을 벌이던 10월 29일 밤 상하이 바완런 경기장에서 벌어졌다. 그날 나는 그 경기장에서 취재차 가 있었다.

상하이에 도착해 악명 높다는 택시를 타고 숙소를 가고, 한국선수단을 찾아 출입증을 받았다. 일주일씩 전세버스를 타고 응원 온 중국 치우미들은 이미 수십배까지 치솟은 암표값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웃통을 벗고, 몸에는 '타도 한국'을 써 놓은 이들에게 중국의 승리는 새천년을 기쁘게 할 최대의 이슈거리였다. 하지만 이날 장위닝이 후반에 만회골을 넣었지만 이동국의 선제골로 인해 승점을 챙긴 한국은 시드니행을 확실시했고, 중국은 이후 탈락했다.

박종환 감독을 넘어서자 등 다양한 구호가 눈에 띈다
▲ 1999년 12월 상하이에서 열린 시드니 올림픽 예선전 사진. 박종환 감독을 넘어서자 등 다양한 구호가 눈에 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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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장 이름처럼 바완런(八萬人)의 일방적인 응원을 들으면서 중국은 사람의 장막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하지만 혼자 기차역에 가서 어렵사리 표를 구하고, 하루 가량 기차 속에서 시간을 보낸 후 톈진 집으로 돌아왔다.

전화를 하지 못해 소식을 알지 못하던 아내는 결혼 두달여 만에 '과부'되는 신세를 면했다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해 수많은 사람들을 자정 바로 다음 시간까지 긴장시켰던 밀레니엄 버그는 결국 공포였음이 드러났다. 컴퓨터도 무사했고, 비행기들도 무사했다. 그렇게 새로운 천년은 시작됐다.

2008년 갑작스럽게 귀국한 후 일년만에 중국을 찾았다. 상하이 공항의 용우
▲ 중국 생활의 가장 아름다운 결과인 아들 용우 2008년 갑작스럽게 귀국한 후 일년만에 중국을 찾았다. 상하이 공항의 용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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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중국, #톈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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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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