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리우드는 바야흐로 시상식의 계절이다. 지난 12일(현지시각) 진행된 골든글로브 영화제의 드라마 부문에서는 스티브 맥퀸의 <노예 12년>, 뮤지컬 코미디 부분에서는 데이비드 O. 러셀의 <아메리칸 허슬>이 작품상을 받았다. <아메리칸 허슬>은 7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여우주연상과 조연상 등 3개 부문을 수상했다. 아마도 2월에 열리는 아카데미시상식에서도 <아메리칸 허슬>은 최다 수상작이 될 가능성이 높다.

앞의 두 작품을 보지 못해서 단정하기는 이르지만, 개인적으로는 지난해 할리우드 최고 작품은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과 마틴 스코세이지의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아래 <울프>)라고 생각한다. <블루 재스민>의 케이트 블란쳇은 골든글로브에서 드라마 부분 여우주연상, <울프>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뮤지컬코미디 부분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인적으로는 지난 해 할리우드의 최고 작품은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과 마틴 스코세이지의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라고 생각한다.

인적으로는 지난 해 할리우드의 최고 작품은 우디 앨런의 <블루 재스민>과 마틴 스코세이지의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라고 생각한다. ⓒ (주)드림웨스트픽쳐스


두 작품은 영화적으로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고 할 수는 없다. 대단히 독창적이지도 특별히 새롭지도 않다. 전형적인 우디 앨런표, 마틴 스코세이지표 영화다. 하지만 육체적 나이를 거스르는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두 거장의 날카로운 비판의식과 풍자 정신은 마치 '뉴 아메리칸 시네마'의 부활을 보는 듯하다. 두 거장의 녹슬지 않는 '청년정신'을 볼 수 있는 두 작품은 충분히 칭송받을 가치가 있다.

월가의 <좋은 친구들>

<울프>는 여러 가지 면에서 마틴 스코세이지의 걸작 중 하나인 1990년 <좋은 친구들>을 떠올리게 한다. 배역, 작법, 음악 그리고 할리우드식 행복한 결말(happy ending)을 비웃는 냉소적 결말(mocking ending)까지 <좋은 친구들>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사실 월가의 늑대와 브루클린의 늑대(마피아)는 별 차이도 없다. 그런 면에서 마틴 스코세이지의 자기표절은 주제의식을 보다 선명하게 드러내기 위한 매우 영악한 연출기법이다.

<울프>는 조단 벨포트의 회고록 <월가의 늑대>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조단 벨포트는 22살 때 월가에 인턴직원으로 취직해 단 6개월 만에 주식브로커 면허를 따고 26세에 스크래튼 오크몬트사를 설립해 단기간 15억 달러가 넘는 실적을 올리는 거대 투자은행으로 성장시킨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주식을 헐값에 사들여 가격을 폭등시킨 후 고객에게 파는 증권 사기로 억만장자가 됐다. 벨포트는 불법자금 도피 및 금융시장 질서교란 등의 혐의로 2년 동안 복역하고 1억 달러의 빚을 졌다. 하지만 출소 이후 <월가의 늑대>를 출간해 방송과 강연으로 다시 돈방석에 올랐다. 미국에서 부자는 결코 쉽게 추락하지 않는다.

 조단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백만장자를 꿈꾸며 의기양양하게 월가에 입성한다.

조단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는 백만장자를 꿈꾸며 의기양양하게 월가에 입성한다. ⓒ 주식회사 더 쿰


조단 벨포트(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분)는 백만장자를 꿈꾸며 의기양양하게 월가에 입성한다. 하지만 1987년 '블랙 먼데이'와 함께 졸지에 실업자가 된다. 신문광고에서 우연히 발견한 롱아일랜드의 영세 '페니 스탁'(상장되지 않은 싸구려 주식) 투자회사에 취직하고 싸구려 주식에서 인생의 돌파구를 찾는다. 그는 월스트리트의 선진투자기법(?)을 '페니 스탁'에 도입해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우연히 식당에서 의기투합한 대니(조나 힐 분)와 얼치기 친구들을 규합해 '스크래튼 오크몬트'사 창립한다.

불과 20대에 월스트리트 정상에 오른 벨포트는 중국의 전설적인 폭군인 걸왕의 '주지육림'을 비웃는 환락의 잔치로 인생을 소비한다. 섹스와 마약, 알코올에 중독된 벨포트는 조강지처도 버리고 육감적인 모델 나오미(마고 로비 분)와 결혼한다. 그는 인간이 돈으로 보여 줄 수 있는 거의 모든 쾌락과 추태를 다 보여준다. 결국 스크래튼 오크몬트의 고속성장은 증권거래위원회와 FBI의 주목을 받게 되고, 벨포트는 파멸을 향한 광란의 질주를 멈추지 않는다.

<울프>의 상영시간은 3시간에서 단 1분이 모자란다. 3시간의 상영시간은 오직 지폐와 정액, 환각제와 알코올로 채워진다. 월가의 늑대는 브루클린의 늑대보다 더 탐욕스럽고, 더 추악하고, 더 야비하다. 스코세이지는 집요할 정도로 벨포트의 엽기적인 쾌락 행각을 묘사하는 데 상영시간을 소비한다. 악랄하게 반복되는 쾌락의 향연은 역겨워서 신물이 넘어올 지경이다. 헤어 누드 수준의 극악한 성적 묘사는 아무런 판타지도 제공하지 않는다.

벨포트의 쾌락 행각을 좀 더 압축적으로 묘사했다면 상영시간을 2시간 안팎으로 단축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만일 그랬다면 스코세이지에게 더 많은 수익이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수익에 대한 욕망을 대담하게 포기했다. (할리우드에서 수익에 대한 욕망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스코세이지는 벨포트의 쾌락 행각을 신물이 나도록 지루하고 세밀하게 묘사함으로써 쾌락에 대한 관객의 환상을 철저히 차단해 버렸다. 이 때문에 긴 상영시간은 단점이 아니라 <울프>의 가장 두드러지는 예술적 미덕이다.

최근 활동 중단을 선언한 디카프리오는 놀라운 연기를 보여준다. 지금까지 자신이 연기한 모든 배역을 합쳐 놓은 듯한 환상적인 연기로 벨포트를 욕망과 쾌락의 화신으로 완벽하게 재창조했다. <울프>는 디카프리오의 영화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골든글로브의 선택은 틀리지 않았다.

영화 초반부에 카메오 수준으로 출연한 매튜 매커너히의 연기도 짧지만 강렬하다. 그는 '제2의 폴 뉴먼'이라는 평가가 단지 외모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연기로 보여준다. 최근 할리우드의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는 조나 힐은 자신의 투자가치를 스스로 입증했다. 아마도 몇 년 뒤 조나 힐은 할리우드에서 손꼽히는 연기파 배우로 성장해 있을 것이다.

특히 약물과용으로 '뇌성마비' 상태에서 보여주는 디카프리오와 조나 힐의 연기는 <울프>의 백미다.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두 배우의 뛰어난 연기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생리적 한계를 시험하는 3시간의 긴 상연시간을 견뎌낼 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

뇌성마비 직전의 월스트리트 자본주의

 마크 한나(매튜 맥커너히)는 월 스트리트에 막 입성한 벨포트에게 하루에 두 번 이상 자위를 하라고 충고한다.

마크 한나(매튜 맥커너히)는 월 스트리트에 막 입성한 벨포트에게 하루에 두 번 이상 자위를 하라고 충고한다. ⓒ 주식회사 더 쿰


월스트리트 자본주의는 허상을 생산하고 사람들은 허상을 소비한다. 월스트리트의 정점에 오른 이후 벨포트는 더 이상 아무 일도 하지 않는다. 그는 월스트리트 자본주의라는 신흥종교의 전도사일 뿐이다. 그의 업무는 단지 마이크를 잡고 직원들에게 '돈의 맛', '쾌락의 맛'을 설교하는 것 뿐이다. 그는 사업가가 아니라 사람들을 쾌락의 세계로 인도하는 선지자다. 욕망에 사로잡힌 스크래튼 오크몬트의 직원들은 마치 사이비교단의 광신도들처럼 벨포트의 설교에 열광한다. 그리고 욕망의 노예가 된 월스트리트의 늑대들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2011년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은 "미국은 세계 경제에 있어서 기생충 같은 존재"라고 독설을 날렸다. 푸틴은 "미국은 빚더미 속에 살고 있다. 미국은 자신의 처지에 맞지 않게 살고 있으며 책임을 다른 나라들에게 옮겨 기생충과 같은 행동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다소 원색적이지만, 냉정하게 말하면 '기생충'보다 더 정확한 비유는 없다.

월스트리트 자본주의는 2008년 9월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시한부 사망선고를 받았지만, 미국은 아직도 마약을 끊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마약은 '달러'다. "헬리콥터로 공중에서 돈을 뿌려서라도 경기를 부양하겠다"는 벤 버냉키의 호언장담대로 미국은 달러를 남발하며 세계 경제를 교란하고 있다. 푸틴이 미국을 '기생충'이라고 비난한 이유는 미국의 양적 완화정책이 달러의 가치를 인위적으로 하락시켜 미국의 부채 부담을 다른 나라들에 떠넘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버냉키는 연금술사가 아니며 달러는 금이 아니다. 약물남용의 끝에 뇌성마비 단계가 기다리고 있듯이 미국의 달러 남용은 세계 자본주의 경제를 뇌성마비 직전으로 밀어 넣고 있다. 미국이 달러라는 마약을 끊지 않으면(이제 끊는다고 해도 사태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세계 경제는 결국 폭발하게 될 것이다.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미국은 결코 망하지 않을 것이라는 정신적 자위행위로 자신을 위로하는 것뿐이다.

2013년 3월 마침내 씨퀘스터(예산자동삭감)가 발효되었다. 지난해 9월 말까지 850억 달러의 연방정부 예산이 삭감됐다. 연간 1100억 달러씩 10년 동안 약 1조 2000억 달러의 예산이 자동 삭감된다. 미국 정부는 양적 완화를 지속하면서 정부 지출을 줄여하는 모순적 상황에 빠져 있다.

지난해 10월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빠진 오바마 정부는 셧 다운(정부 폐쇄)이라는 극약처방으로 의회를 압박했다. 10월 16일 의회가 극적으로 부채한도 상향조정 논의 시한을 연장하면서 가까스로 뇌성마비 단계 즉 디폴트 위기는 모면했지만, 위기는 끝난 것이 아니다.

미국 의회예산처(CBO)는 "미국 정부의 부채한도 상향조정 문제가 내년 3월초까지 해결되지 않는다면 미국 경제는 잠재적인 '디폴트'에 빠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의회예산처는 "늦어도 3월 말이면 모든 수단이 바닥날 것으로 예상된다"며 "세금 환금과 2~4월 사이의 세금까지 고려한다면 적어도 5월이나 6월까지는 버틸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2014년 1월까지 정부 폐쇄가 일단 철회됐지만, 미 의회는 늦어도 2월 7일까지 부채한도 상향조정을 합의해야 한다. 합의에 실패하면 의회예산처의 경고대로 미국이 '잠재적인 디폴트'에 빠질 수 있다. 미국이 디폴트에 빠지면 세계 경제는 말 그대로 뇌성마비 상태가 된다. 외국인이 보유한 약 5조6500억 달러의 미국 국채(중국은 1조2900억 달러의 미국 국채를 보유하고 있으며 한국은 약 550억 달러다)는 하루아침에 백지장이 되고 세계 증시는 '블랙 에브리데이'를 맞게 될 것이다.

욕망과 쾌락의 끝은 뇌성마비 단계다. 이미 월 스트리트 자본주의는 뇌성마비 직전에 놓여 있다. 미국이 달러라는 마약을 끊어야 하듯이 이제 우리도 미국이라는 마약을 끊어야 할 때다. 침몰하는 타이타닉의 구명보트는 승객 수보다 많지 않았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필자의 블로그 <나홀로연구소> http://blog.naver.com/silchun615에 중복 게재됩니다.
더 울프 오브 월 스트리트 마틴 스콜세지 디카프리오 조나 힐 매튜 매커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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