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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가의 스마트폰이 늘어나면서 이를 분실하거나 훔치는 사건 역시 증가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공개한 스마트폰 등의 절도 증거품.
 고가의 스마트폰이 늘어나면서 이를 분실하거나 훔치는 사건 역시 증가하고 있다. 사진은 서울의 한 경찰서에서 공개한 스마트폰 등의 절도 증거품.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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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출근길에 자동차 접촉사고가 났다. 교차로에서 신호가 바뀐 것을 미처 모르고 진행하던 차가 앞서 가던 내 차의 오른쪽 뒤 범퍼에 부딪힌 것이다. 차가 많은 출근길인 데다가 속도를 내기 어려운 도심인 탓에 움찔거릴 정도의 경미한 사고였지만, 내려 확인해 보니 범퍼 한쪽이 살짝 찌그러져 있었다.

다친 사람이 없으니 천만다행이라 말하며, 보험 처리를 당부했다. 상대방 운전자는 이내 차에서 내리더니, 자기 차와 내 차의 어그러진 부분은 연신 쳐다보며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상식적으로 가해자 입장이니만큼 우선 내게 달려와 어디 다친 곳이 없냐고 묻는 게 보통인데, 그는 아무 말 없이 그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불과 10여 분 만에 몇 대의 고급 승용차가 도착했다. 남녀가 섞여 있는데다가 옷차림을 보니 보험사 직원 같지는 않았다. 이내 알게 됐지만 상대방 운전자의 친척과 그들의 지인들이었다. 정작 상대방 운전자는 뒤로 빠지고, 다짜고짜 명함을 건네면서 그들은 마치 전문가인 양 사고의 정황과 책임 소재 등을 설명해주었다.

일부는 피해자, 곧 내 책임도 있으니 보험사를 부를 것 없이 적당하게 타협하고 끝내자는 말투였다. 솔직히 보험 처리를 요구하면서도, 차체를 보호하기 위해 부딪치고 긁히라고 장착된 범퍼의 흠집 정도야 뭐가 문제냐 싶어 그냥 넘어갈까도 싶었다. 그런데, 상대방 운전자의 동원된 '인맥'을 막상 보노라니 너무나 불쾌했다.

그들이 돌아가며 뭐라 뭐라 떠들어댔지만, 듣는 체도 하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그냥 보험처리 하시게요." 손에 쥔 명함들을 살펴보니 나름 지역에서 '방귀깨나 뀌는' 사람들인 듯했다. 낯익은 이름의 건설사 대표, 무슨 협회의 회장, 어느 대학의 행정학과 교수 등 하나같이 '유지'들이었다. 그 뒤에 나 몰라라 등을 보인 채 숨은 가해자의 뒷모습이란.

학교의 교육 행위조차 흔들어대는 '인맥 동원'

그러한 '인맥' 동원은 학교의 교육 행위조차 흔들어댄다. 학생부장으로 엊그제 겪었던 일이다. 학교 교육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에서 비롯됐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비일비재하게 벌어지는 이런 일들로 인해 학교가 더 큰 상처를 받고 교사들이 좌절을 맛보는 악순환의 과정일지도 모르겠다.

내용인즉슨 이렇다. 한 아이가 교실에서 다른 아이가 깜빡 책상 서랍에 놓고 간 스마트폰을 주웠다. 그것도 100만 원을 호가하는 값비싼 최신 모델인 데다가 그 역시도 얼마 전 스마트폰을 잃어버렸던 터라 분한 마음에 주인을 찾아줘야겠다는 생각보다 가져야겠다는 마음이 더 크게 동했다고 한다.

순간 나쁜 마음이 들자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스마트폰의 갖가지 기능에 대해서 잘 아는 친구와 함께 칩을 버리고 초기화를 시켜버린 것이다. 이쯤 되면 엄연히 '절도'다. 그래도 어린 마음에 몹시 걱정됐던지 차마 사용하거나 다른 사람에게 팔지는 못하고 몇 날 며칠 가지고만 있었다.

한편, 그 스마트폰을 잃어버린 친구는 간수를 제대로 못 한 자신의 잘못인 데다 찾을 길도 마땅치 않아 찾기를 포기하고 있었는데, 그때 다른 반에서 새것을 사서 쓸모없어진 스마트폰들을 판다는 소문에 혹시나 하고 찾아간 자리에서 몇몇 아이들로부터 자기가 잃어버린 스마트폰을 누가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됐다. 기막힌 우연이었던 셈이다.

들은 바대로 거론된 아이들을 스스로 꼬리에 꼬리를 물 듯 추궁했고, 결국 누가 한 짓인지, 또 누가 지금 가지고 있는지 찾아낼 수 있었다. 그는 그 길로 학생부에 달려와 신고했고, 해당 기기와 버린 케이스와 칩의 값을 돌려받는 것과는 별개로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다며 피해자 신고서에 썼다.

학생부장으로서 그의 진술이 과연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신고서에 적힌 아이들을 하나둘씩 불러 꼼꼼하게 조사했고, 잘못되거나 과장된 내용을 바로잡는 작업을 이어갔다. 그러나 핵심적인 내용이랄 수 있는 스마트폰을 습득하고 칩을 버리고 초기화했다는 등의 잘못은 모두 순순히 인정하였다.

시의원에게까지 민원 제기하며 학교의 잘못 추궁하는 학부모

용서받지 못할 잘못을 저지르고 큰 벌을 받을 처지였음에도 그들의 목소리는 컸다. 하나같이 억울하다는 것이었다. 자기들도 수차례 도난을 당했다며 그동안 잃어버린 물건들을 출석부의 이름 부르듯 하나하나 불러내려갔다. 아이들에게 그다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스마트폰과 지갑, 가방 따위의 값비싼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자기가 잃어버렸다고 남의 물건을 손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명백한 '보복' 행위인데도, 억울한 마음이 너무 커서인지 불러 조사하는 내내 연신 씩씩거렸다. 잘못을 시인한 이상 더 이상 캐묻는 건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고 당부의 말을 또박또박 전했다.

"너희들은 내일 있을 선도위원회에 회부되어 징계를 받게 될 것이다. 부모님이 징계 처분장을 받아들고 충격을 받지 않도록 꼭 미리 말씀드려라."

이튿날 선도위원회가 열렸고, 아이들의 가담 정도에 따라 징계가 결정되었다. 학교 밖 전문기관에서 5일간 상담 교육을 받는 것에서부터 교내에서 사흘간 봉사활동을 하도록 처분했다. 선도위원회의 결정은 규정에 따라 학교장 결재를 거쳐 등기우편을 통해 징계 처분장을 발송하게 된다. 물론, 그 전에 담임교사를 통해 결정 내용을 전화를 걸어 알리도록 했다.

그렇게 정리될 것 같았던 일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담임교사의 전화로 자녀의 징계 처분을 듣게 된 학부모가 문제를 제기하였다. 청천벽력 같은 소리라며, 선도위원회가 열리기 전에 미리 알려주지 않았느냐며 학교를 나무랐다. 사건이 접수되고 선도위원회가 열릴 때까지의 기간이 단 하루로 짧았고, 아이들에게 부모님께 말씀드리라고 주지시켰다며 말해도 다짜고짜 꼬투리를 물고 늘어졌다.

예상 밖 학교의 '덤덤한' 반응에 실망한 탓인지, 징계를 받게 된 한 아이의 학부모는 급기야 '인맥'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사돈에 8촌'까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담임교사가 사전에 학부모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학교의 절차적 하자(?)를 고발하듯 전했고, 이는 담임교사와 학생부장, 심지어 교감, 교장의 휴대전화를 불나게 만들었다.

내로라하는 친인척들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로 치면 상급기관인 시교육청 장학사와 심지어 시의원에게까지 민원을 제기하여 사건 정황을 묻고 학교의 잘못을 추궁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항의 차 학교를 찾은 학부모와 두 시간 동안 상대하고, 무시로 걸려오는 전화에 아예 종일 수업을 들어갈 수 없을 정도였다.

재의를 요구했고, 만약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다른 방식으로 학교에 민원을 제기하겠다고 공공연히 말했다. 거듭된 항의를 받다보니 숫제 아이의 잘못은 온데간데없고, 되레 학교의 잘못으로 인한 억울한 '희생양'이 된 듯한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엄포'에 조금도 주눅 들지 않았다.

'인맥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라는 기성세대의 처세술

솔직히 그들의 요구를 그냥 들어주자며 고개 숙일까도 싶었다. '×이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식의 생각 때문이다. 일일이 대응하느라 당장 수업에 큰 지장을 받았고, 밤낮으로 걸려오는 전화에 가족들조차 적잖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그만둘 수는 없었다. 절차적 꼬투리를 잡혔을지언정, '인맥'을 동원해 민원만 제기하면 학교 일쯤은 쉽게 '해결'된다는 선례를 남기기 정말 싫었다.

말하자면, 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학교에 와서 시끄럽게 굴면 감경되고 순순히 따르면 징계가 그대로 유지된다면, 더 이상 학교는 교육을 하는 곳일 수 없게 된다. 거칠게 말해서, 학교가 시정잡배들의 야바위판과 무엇이 다를까. 우리 사회의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교과부도, 시교육청도, 학교도 민원만 발생하지 않으면 좋은 교육이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본다.

민원 제기를 얼마나 꺼려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과문한 탓인지, 시교육청과 학교가 '악성 민원인'이라며 뒷담화를 늘어놓을지언정 그들에 맞서 끝까지 싸웠다는 얘기를 들어본 적 없다. 공무원과 교사들은 자기 부서의 일이 부디 아니길 바라면서, 소 닭 보듯 하기 일쑤다. 그럴수록 '인맥'을 동원한 압박이 횡행할 수밖에 없다.

학생부장 일을 하면서 아이들과 부대껴야 하는 게 가장 힘들어야 맞는데, 실제로 제일 상대하기 힘든 건 이러한 학부모들과 '사돈의 8촌'들과의 직간접적인 만남이다. 솔직히 아이들이 그런 모습을 배울까 두렵기까지 하다. '인맥만 있으면 만사형통'이라는 기성세대의 닳아진 처세술을 배우기에는 아직 아이들은 순수하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며칠 동안 그들을 상대하면서 가슴 아픈 게 있다. 스마트폰을 훔친 그 아이가 떠오르면서, 자꾸만 그의 잘못만 미워지는 게 아니라 그 아이 자체가 싫어지는 마음이 생기고 있다는 점이다. 마치 그 아이를 두둔하기 위한 학부모와 주위 어른들의 학교를 꾸짖는 눈물겨운 '노력'이 그 아이와, 어떻든 수업시간 얼굴을 맞대야 하는, 교사와의 관계를 소원하게 하지나 않을지 걱정된다. 교사로서 정말 그래서는 안 되는데 말이다.

덧붙여, 학교에선 선도위원 일곱 명이 모여 나름 교육적 고민을 거듭한 끝에 그 아이에게 전문가의 상담을 받으라고 처분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학부모는 마치 학교가 아이를 내쫓는 것으로 확신하는 걸 보노라니, 어쩌다 학교 교육에 대한 불신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지 교사로서 자괴감이 든다.


태그:#학생부장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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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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