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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같은 스마트 시대, 대학 강의실도 스마트해졌다. 노트와 펜이 아닌 노트북, 넷북, 심지어 스마트폰으로 필기하는 시대가 왔다. 강의실 이곳저곳에서 노트북으로 교수의 강의를 연신 두드려대는 학생들이 늘어나고 있다. 알록달록 예쁘게 필기된 노트를 복사하던 일은 디지털화 된 한글 파일을 주고받는 것으로 바뀌는 중이다. 어떤 학생들은 녹취와 '직촬'과 메모가 가능한 태블릿PC로 빽빽하게 판서된 칠판을 찍는다. 바야흐로 '스마트 필기의 시대'라 불릴 만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꿋꿋이 종이필기를 고집한다. 혹시 컴퓨터 글씨체 뺨치는 필체를 보유한 명필이라서? 그건 아니다. 내 필기는 종종 나도 못 알아봐서 헤매기도 한다. 그렇다면 알록달록 색깔 펜으로 쓰는, 시험기간만 되면 모두가 복사해달라는 유려한 필체의 소유자라서? 그것도 아니다. 펜 종류는 언제나 3가지뿐이고 태생적으로 미술 감각은 부족하다. 하지만 내가 종이필기를 하는 좋아하는 이유 꽤 많다.

넷북으로 필기했다. 몰랐던 용어를 찾기 위해 인터넷 창을 여는 순간, 인기 검색어의 유혹과 SNS에서 업데이트되는 친구들의 일상에 푹 빠지고 말았다.
▲ 노트북 넷북으로 필기했다. 몰랐던 용어를 찾기 위해 인터넷 창을 여는 순간, 인기 검색어의 유혹과 SNS에서 업데이트되는 친구들의 일상에 푹 빠지고 말았다.
ⓒ 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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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찾다 인터넷, SNS의 안드로메다로..."

우선 디지털 필기하다 처절하게 실패했던 경험 때문이다. 한 때, 지긋지긋한 지렁이 같은 종이필기를 그만두기로 결심했었다. 세련돼 보이고 깔끔한 디지털 필기를 해보기 위해 넷북을 질렀다. 파란 무늬에 귀엽고 깜찍한 넷북을 한 손에 들고 강의실로 향할 때 나는 설렜다. 이 넷북으로 교수님 농담까지도 다 자판으로 두드려서 필기하겠다는 각오를 다졌다. 또 시험기간이 되면 동기들에게 한글 파일로 저장된 필기를 메일로 보내주겠다는 상상을 머릿속으로 되새겼다. 그런 각오와 상상 속에 강의실에 앉았다.

머리말에 수업과목, 날짜, 교수 이름을 입력하고는 연신 자판을 두드리며 교수 강의를 입력해 내려갔다. 처음에는 신기해하며 신나게 필기해갔다. 그런데 갈수록 속기사처럼 아무 생각도 안 하고 강의만 받아 적는 것 같았다. 이게 필기가 맞는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교수가 말한 용어의 뜻이 궁금해서 사전을 찾기 위해 들어간 인터넷이 화근이었다. 사전만 찾고 나오려고 했는데, 아니 그날따라 포털에는 나의 호기심을 끌어당기는 기사가 왜 이렇게 많은지. 그 인기어들은 정말 검색하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마력의 단어들이었다.

거기서 끝났으면 다행이겠지만 나의 서핑은 포털에서 SNS로 넘어갔다. 평소에는 그냥 넘어가던 페이스북의 알람 표시가 수업 중에는 왜 그리도 반가운지...하나하나 확인하고, 뉴스피드에 올라온 친구들의 일상을 보며 연신 '좋아요' 버튼을 눌러댔다. 이처럼 비싼 넷북을 오로지 필기하는 데만 쓰는 것이 안타까웠던(?) 나는 매 수업 시간마다 인터넷의 '안드로메다'로 가는 일이 다반사가 됐다. 그러다 결국 이대로는 안 되겠다고 생각이 들었다. 이 책임을 모든 강의실마다 광속도의 와이파이를 설치한 학교 측에 돌리고 나는 짧았던 넷북필기를 청산했다.

대학 강의실에 노트북, 넷북 등의 디지털 기기의 필기가 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종이 필기를 고집한다. 왜 수업 집중력도 높아지고 시험공부할 때 기억에 쏙쏙 남는다.
▲ 노트북과 종이필기 대학 강의실에 노트북, 넷북 등의 디지털 기기의 필기가 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종이 필기를 고집한다. 왜 수업 집중력도 높아지고 시험공부할 때 기억에 쏙쏙 남는다.
ⓒ 강민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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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으로 쓸 때 수업 집중력이 높아져

두 번째 이유는 종이필기가 수업에 대한 집중도가 높아진다는 점이다. 어릴 때 서예를 배운 적이 있어서 그런지 손으로 쓸 때 집중이 잘 된다. 또 좋게 말하면 한 군데에 집중을 잘하는 성격이고 나쁘게 말하면 멀티태스킹 능력이 부족한 성격 탓에 강의를 들으면서 일일이 다 받아적지는 못한다. 때문에 교수가 하는 말을 족족 받아 적거나 사진도 찍고 녹음도 하고 메모도 하는 태블릿pc를 이용하는 필기에는 맥을 못 췄다. 하지만 종이필기는 교수가 한 맥락 끝난 다음 잠시 쉬는 사이에 내 방식에 따라 한 번에 정리할 수 있다. 강의의 중요한 내용도 놓치지 않으면서 필기를 해나갈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다 고려했을 때 나에게는 종이필기가 최적이었다.

세 번째, 종이필기의 장점은 시험 공부할 때 나타난다. 필기라는 걸 할 일이 없었던 입시 때와 달리 대학 중간, 기말시험은 필기가 차지하는 비중이 절대적이다. 따라서 얼마나 필기를 잘 해왔는지에 따라 시험성적이 달라진다. 나는 이번 시험기간에 종이필기 덕을 많이 봤다. 비록 가끔씩 졸아서 듬성듬성 비어있는 곳도 있고 타고난 악필 때문에 내 글씨를 못 알아본 적도 있지만, 필기를 통해 수업시간 교수의 말들이 연상되었고 학생들과 교수와의 토론도 생생하게 복원됐다.

확실히 내가 직접 쓴 거라 그런지 머릿속에 더 잘 다가왔다. 녹취를 했다고 봐도 무방한 디지털 필기를 한 동기들은 그 내용을 잘 기억하지 못했다. 그들은 받아쓰기 한 것에 불과했다. 필기도 깔끔하고 양도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시험 공부할 양만 늘었다고 동기들은 푸념했다.

소소한 종이필기의 추억, 시험 끝나면 쏠쏠한 재미

마지막으로 종이필기는 지금 이 순간에 유용하다. 무슨 소리냐면 보통 종강을 하게 되면 다들 방학 때 어디로 여행을 갈지, 무슨 공부를 할지, 어떤 자격증을 딸지에 대해서 계획을 세운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종이필기를 열심히 하게 되면 이 때 할 일이 하나 더 추가된다. 바로 내가 열심히 쓴 필기들을 되돌아보는 작업이다. 종강하고 난 다음 필기를 다시 볼 때는 부담없이 여유롭다.

그렇게 내가 쓴 걸 보고 있으면, 이 필기도 하나의 일기장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싸이월드 미니홈피나 페이스북에 일기를 쓰는 세상에 펜으로 쓴 종이필기는 추억이 된다. 조금씩 나아지는 글씨체의 변화를 보기도 하고, 그 때는 잘 이해가 안 되어서 옆에다가 별표 표시를 마구마구하면서 괴로워했던 흔적을 발견하기도 한다. 수업시간에 친구랑 잡담했던 내용들, 그리고 수업 빨리 안 끝내는 교수를 욕했던 낙서들은 보너스다. 디지털 필기에는 볼 수 없던 당시의 추억이 새록새록 돋아나는 느낌은 오로지 종이필기에서만 얻을 수 있다. 훗날 언제가 내 필기노트를 보면서 어떤 영화에서처럼 첫사랑이 떠오를 수도 있지 않을까?

이제 대부분의 대학들이 종강을 했다. 만약 당신이 종이필기를 하는 학생이라면, 여행을 떠나기 전에 오늘 하루쯤 내가 이번 학기에 한 필기들을 다시 되돌아보는 건 어떨까. 한 학기를 정리하는 알찬 시간이 여러분을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마치 사진앨범 한 권 넘겨보는 느낌이 들지도 모른다. 종이필기는 수업시간, 시험기간에도 시험이 끝난 지금도, 언제라도 도움이 되는 팔방미인과 같은 녀석이다.


태그:#종이필기, #노트북, #강의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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