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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타의 추억이라…. 제대하면 복무했던 군대 쪽을 향해 오줌도 누지 않겠다던 군대, 꿈에서는 왜 그리 자주 군대에 끌려가는 악몽을 꾸는지…. 군대 자체가 별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인데 구타의 추억이라니….

구타로 시작해서 구타로 마감되는 군대생활 3년, 그렇게 겪으면서 나도 모르게 군대문화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져 아직까지도 내 삶의 구석마다 실뱀처럼 똬리 틀고 있는 것이 대한민국의 군대라고 생각하며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를 더듬어 본다.

얼마 전 대구에서 열리는 오마이뉴스 대구, 경북 시민기자 행사에 가기 위해 상주에서 대구 가는 무정차 버스에 몸을 실었다. 모임 시간은 저녁 7시, 대구에 도착하면 2시 정도인데, 남는 시간 무엇을 할까?

내 머리는 즐거운 상상으로 움직였고 그 가운데 27년 전 내 젊음의 한 시절을 묻었던 군대에 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잠깐만에 내 머리는 설레설레 흔들렸고, 굳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군대 부근을 배회(?)할 필요까지 있겠냐는 결론을 내렸다. 대신 외출 때마다 나와 놀던 대구 시내나 오랜 만에 둘러 볼 생각으로 마음을 잡았다.

수 십 년의 세월이 대구 시내라고 비껴갈 리는 없었다. 초현대식 건물로 빼곡한 도시는
사람들로 붐볐고 동성로 일대의 번화가는 젊은이들이 먹고 마시는 흥에 겨운 놀이터였다.
푸른 제복이라고 한껏 멋을 내고 싸돌아다니던 그때 '군바리'가 지금 초로의 중년이 되어 거리를 몇 시간 동안 어슬렁 거렸다.

입영열차부터 시작되는 폭력, 훈련소까지 이어지다

본적이 경북인 관계로 신체검사를 포항에서 받은 나는 경북의 점촌역에서 열차를 타고 논산으로 출발했다. 전날 머리를 박박 깎은 입대자들은 부모 친구들과 이별의 정을 나누었고 그 때까지만 해도 군 관계자들은 최소한의 예의로 우리에게 탑승을 안내했다. 눈물 흘리는 부모님의 손길을 뒤로 하고 열차가 움직이는 순간 기간병들의 고함소리가 차내에 터졌다.

"대가리 박아, 이새끼들아! 저 새끼 뭐야?"

기간병들은 들고 있던 뭉둥이로 수평 일자를 그으며 떨떠름하게 들고 있던 입소자들의 머리에 타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딱' '딱'하며 뭉둥이와 머리통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잽싸게 머리를 숙인 나는 몽둥이를 피할 수 있었지만 궁금해서 머리 들던 나를 향해 기간병의 군홧발은 신속하게도 날라 왔다.

"이새끼 어딜 쳐다 봐?"

몇 시간을 그렇게 구타와 기합소리로 덜컹거리던 열차가 우리들을 훈련소에 내려 주었다.

철모 한 방에 눈동자 풀린 동기, 다음날 사라지고

'내 몸 하나 간수도 못하던 내가 조국의 부름 받아'(노랫말) 첫발을 디딘 훈련소는 그야말로 훈련과 구타, 기합이라는 폭력의 용광로였다. 그래도 대부분의 청춘들은 군대는 그런 거니 하면서 잘도 버텨냈다.

훈련이 중반에 접어들 무렵 그날도 우리는 훈련과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내무반 침상 끝에 정렬하고 있었다. 내 맞은 편에는 키가 좀 작지만 몸이 잽싸고 눈동자가 초롱초롱한 동기 한 명이 동기들과 수다를 떨면서 기간병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들어선 기간병, 지금도 기억나는 인상이 갸름한 세모 얼굴에 날카로운 눈매, 아마 계급이 상병이었나?  마침 떠들던 동기가 눈에 띄었고 기간병은 쓰고 있던 철모로 그 동기의 철모를 세차게 내리 쳤다. 주위는 순간 고요해졌고, 동기의 철모는 코밑까지 쑥 내려가고 말았다. 우리는 숨을 죽였다. 철모를 손에 든 기간병은 뭔지 기억도 안 나는 훈시를 하곤 내무반을 나갔다. 동기도 다시 철모를 올리고 별 일 없는 듯 보였다.

그리고 다음날, 다시 저녁 정렬을 하는 데 앞에 선 동기의 눈이 풀려 있었다. 눈이 동그랗고 반짝반짝 빛나던 동기의 눈동자는 마치 약을 먹은 듯 풀려 있었고 곧 쓰러질 듯 보였다. 그날 의무실로 갔던 동기는 다음날 훈련에도 보이질 않았고 며칠 후 의가사 제대했다는 소식만 훈련 중에 들려왔다. 철모로 한 젊은이의 인생을 사그라지게 만든 그 젊은 기간병은 '군대 감옥'인 남한산성으로 끌려갔다는 소식도 들려 왔다.

평생 잊지 못할 가슴 아픈 기억도 눈코 뜰 새 없는 훈련소의 먼지 속에 묻혀가고 한 달 뒤 우리 동기들은 각자 배치될 부대로 향했다.

자대 배치 받자마자 시작되는 말년 병장의 성추행

자대에서 만난 동기 세 명과 함께 시작된 본격적인 군 생활은 제대를 보름 남긴 말년 병장의 성추행으로 시작되었다. 첫 번째 타깃은 가장 나이 어리고 예쁘장하게 생긴 동기였다. 체격도 튼실한 그 동기는 근 일주일 동안 밤마다 말년 병장의 이불속에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궁금해서 묻는 동기들에게 그 동기는 그냥 얼버무리고 자세한 설명은 피했다. 하기사 어느 누가 그런 체험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겠는가?

그리곤 바로 내게도 손가락질이 들어 왔다. 오늘밤 이불로 오라는 거였다. 자대 배치 받은 지 열흘도 안된 이등병이 아무리 곧 나갈 놈이지만 말년 병장의 명령(?)을 대 놓고 거부할 수 없었다. 대신 이불 속에서 버텨보자고 작심했다.

그날 밤 나는 온 힘을 다해 몸을 웅크렸고 그 저항이 통했는지, 아니면 별로 만질 게 없어서 그랬는지 그 병장으로부터 다음날 추가 '콜'은 없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 말년 병장은 제대하는 날, 그동안 억울하게 당한 현역병들에게 부대 뒷산으로 끌려가 보복을 당했다.

닭다리 한 점 탓에 깍지 끼고 구타 당해

자대 배치 후의 군생활은 어느 부대와 다를 바 없었다. 매일 반복되는 훈련과 내무 생활, 구타와 기합이 주기적으로 일상화된 나날이었다.

일등병이 된 우리 동기들은 가장 일이 많다는 식기 당번을 맡았고, 어느 추운 겨울, 휴가병이 들고 온 통닭을 내무반에서 고참, 졸병들과 함께 나눠 먹었다. 그리곤 별일 없이 마무리 하루가 마감됐는데 다음날 아침 일찍부터 문제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평소엔 아침 점호에도 나오지 않는 역시 제대를 얼마 남기지 않은 고참 병장 한 명이 씩씩거리며 전원 깍지 끼고 엎드리라고 한다. 땅바닥이 얼어붙은 겨울날, 아침부터 손가락 깍지를 끼고 엎드려 뻗치면 손가락은 그야말로 굽어서 뒤틀리고 쓰러지고 만다. 이유는 간단했다.

" 야! 이새끼들아~ 닭다리가 그렇게도 맛있냐?"

아하~ 바로 그거였다. 어제 사온 통닭의 닭다리 숫자가 뻔한 데 고참한테 갈 닭다리가 한 두 개 사라진 거였다. 아마도 누군가 용감한(?) 졸병이 먹은 거였고 이에 분노한 말년병장이 아침부터 연병장에서 졸병들에게 분풀이 기합을 주고 있는 거였다.

식기당번을 맡은 우리 동기들은 차례로 불려나가 군홧발에 가슴을 내줘야 했고 부대원들은 닭다리 몇 개에 촌극 같은 기합과 구타를 당해야 했다. 속 좁은 개인 탓으로 돌리기엔 우리의 군대 일상이 이리도 치졸한 것일까?

독한 시어머니 밑에서 자란 며느리가 그대로 닮아 간다는 말이 있다. 철모 한방에 젊음을 망치고 집으로 돌아간 그 때 그 동기는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몸도 정신도 멍들게 했던 구타와 기합의 추억(?)속에서, 졸병 때는 고참들의 기합과 구타가 부당하고 원망스러워 내가 고참되면 절대 근절하겠다던 다짐도 수없이 했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고참병을 닮아가는 모습에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세월은 흘러 어느덧 군문을 나서게 되었고 그로부터 27년, 병장에서 온갖 잡다스런 장 자리를 맡으며 보낸 사회생활, 얼마나 군대문화에서 자유로워졌는지 다시 한 번 되돌아 보게 하는 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기사공모 '병영 구타의 추억'에 올리는 글입니다.



태그:#군대, #구타, #철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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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을 찬 유학자 남명 조식 선생을 존경하고 깨어있는 농부가 되려고 노력중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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