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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을 다녀오시는 어머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항상 위태위태 아슬아슬하다
 화장실을 다녀오시는 어머니. 다리가 후들거려서 항상 위태위태 아슬아슬하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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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2월 16일 저녁이었습니다. 화장실을 간다고 일어서던 어머니가 그대로 주저앉고 계셨습니다. 헛발을 디뎠나 했지만 아니었습니다. 다시 일어서면 다시 주저앉기를 몇 차례나 되풀이하셨습니다.

"음매, 이놈의 발모가지가 어째서 말을 안 듣고 이런다냐?"

그 와중에도 어머니는 당신의 발을 탁탁 때리며 말 좀 들으라는 등 농담을 하고 계셨습니다. 그러나 발은 얻어맞으면서도 요지부동 고집불통으로 어머니의 명령을 따르지 않고 있었습니다. 제가 옆에서 부축을 해도 사정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오른발은 동작이 가능하지만 왼발은 마치 바닥에 붙여놓은 것처럼 전혀 움직임이 안 되는 거였습니다.

5년 전 왔다 물러간 중풍, 다시 왔습니다

5년 전에 왔다가 잠시 물러갔던 중풍이 다시 왔다는 것을 병원에 가서야 알았습니다. 5년 전에는 그래도 불편하나마 어느 정도 움직임이 가능했습니다. 잠시 물러섰다가 다시 찾아온 중풍은 마치 5년 전에 그렇게 하기로 약속이 되었다는 듯 어머니를 완전 점령해 버리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어머니는 이제 당신 자신의 손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채로 "아이고 낯바닥 좀 씻으러 가야 쓰겄는디"하는 말씀이나 가끔 중얼거리는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처음에는 무척 당혹스러웠지요. 하루에 이불 빨래를 서너 차례씩 하다가 기저귀를 착용하기 시작하면서 이제 한숨 놓아도 되겠거니 했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오줌은 기저귀를 적시고도 남아 이불을 적시고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어머니가 똥이 나오면 그것을 몰래 이부자리 속으로 감추거나 심지어는 먹어버리는 등 당신 나름의 방식으로 처리하는 까닭에 저로서는 글쎄, 뭐라고나 할까요. 슬픔이라는 이름의 품질도 아주 좋은 시멘트 덩어리가 목구멍을 콱 막아버린 상태였다고나 할까, 아무튼지 그랬습니다.

이른바 중증치매가 개입된 노환의 순서가, 1단계로 길을 잃어 버리고, 2단계로 가족을 못 알아보며, 3단계로 거동이 불가해지면서 대소변을 손으로 만지게 된다고 한다면 어머니는 이제 마지막 단계로 접어든 셈이었습니다.

못나고 한심하게도 저는 그렇게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한 자리에 계속 누워 있으면 욕창이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은 꿈에서도 못했습니다. 그저 오줌이나 받아내고 똥이나 받아내는 것으로 할 일을 다 하고 있다는 식의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정말로 그랬습니다. 어머니의 거동이 아주 불가능해지면서 저는 두 개의 마음 사이를 오락가락했습니다. 아, 이게 생로병사의 마지막 단계란 말인가, 하는 마음과, 나도 이제 마음 놓고 잠 좀 자야겠다, 하는 마음, 그런 마음의 어디에도 욕창에 관한 것은 없었습니다.

고백하자면 어머니가 더 이상 걸을 수가 없게 된 그날 이후로 저는 많이 편안해졌습니다. '엄청나게'라는 수식어를 붙여도 좋을 정도로 편안해졌습니다. 무엇보다 3시간 이상 잠을 푹 잘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았습니다. 어머니가 당신의 발로, 당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었던 시기에는 3시간은커녕 2시간도 제대로 눈을 붙일 수가 없었으니까요.

어머니가 일종의 결벽주의에 속한다는 것은 이웃과 친척들이 다 아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외할머니와도 같았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그런 결벽주의에 일정 부분 길들여져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어머니가 혹시라도 나올지 모르는 오줌을 걱정해서 한두 시간 간격으로 화장실 출입을 하면 그때마다 저는 파블로프의 개처럼 벌떡 일어나곤 했습니다.

몰랐습니다, 욕창이란 이름의 물귀신을

이동식 변기 위의 어머니, 똥이 나오는 순간 손으로 그것을 끄집어내는 탓에 손에 두툼한 장갑을 끼우고, 상체는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보자기로 묶어야 했다.
 이동식 변기 위의 어머니, 똥이 나오는 순간 손으로 그것을 끄집어내는 탓에 손에 두툼한 장갑을 끼우고, 상체는 굴러떨어지지 않도록 보자기로 묶어야 했다.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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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래야만 했는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가 미지의 어떤 일을 벌일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늘 있었습니다. 아니 그것은 걱정이라기보다 일종의 공포에 가까운 무엇이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제가 지레 겁을 먹고 있는 그 어떤 미지의 사건을 한 번도 일으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저는 어머니가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만 들리면 벌써 알아듣고 벌떡벌떡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런 긴장이 해소된 것입니다. 더 이상은 어머니의 기척에 놀라 잠을 깰 일이 없어진 것입니다. 정리해서 고백을 하자면 어머니가 더 이상 걷지 못하게 되었다는 슬픔과 그로 인해서 제가 개인적인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는 묘한 기쁨(?) 사이에서 처음에는 우왕좌왕했습니다. 그러다가 서서히 기쁨 쪽으로 가닥을 잡고 그것을 누리게 되었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때가 되면 밥을 챙기고 약간의 간식을 챙기고, 또 때가 되었다 싶으면 어머니를 일으켜서 이동식 변기에 앉히고 두 시간 정도 함께 있다가 다시 자리에 눕히고 나면 그때부터 5시간 정도는 완전히 저 혼자만의 시간이었습니다. 오줌이든 똥이든 일단 배설이 있고 나면 적어도 5시간 정도는 다시 안 나오다는 것을 제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저는 무책임한 자유인이 되어 갔습니다. 한 뼘의 자유를 누리면서 두 뼘의 자유를 원하게 되고, 마침내 세 뼘의 자유까지 원하게 되었습니다. 일 주일에 한두 번 정도는 밖으로 멀리 나가서 낯선 사람을 만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일로 서너 시간씩을 보내기도 하는 등 제법 사람 행세를 하고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하루 벼락처럼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욕창이란 이름의 물귀신을.

욕창은 따로 치료할 방법이 없고 예방이 치료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사람이 자리보전을 하게 되면 적어도 두 시간마다 한 번씩 체위 변경을 해줘야 한다는데 저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도 있건만 욕창이란 물귀신은 일단 자리를 잡았다 하면 그런 속담도 허용하지 않는다 합니다.

약을 바르면 금방 나을 것처럼 보이기는 합니다. 약을 바르고 다음 날이면 벌써 딱지가 형성되고 있었습니다. 앞으로 이틀만 더 있으면 아물겠다는 생각으로 내심 안도하고 있을라치면 '아나 이놈아'하는 듯이 딱지가 사라지고 생살이 드러나 보이는 사태가 끝도 없이 되풀이되었습니다.

어머니 입에 마스크를 씌워놓는 만행까지...

상처가 스스로 아물기 위해 딱지를 만들면 사람은 가려워집니다. 가려워서 긁어야만 합니다. 긁지 않으면 온 몸으로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지면서 끝내는 미치고 환장할 지경에 이르고 맙니다. 아픔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악독한 가려움의 그런 속성이며 본질 같은 것을 저도 알고는 있었습니다.

알고 있으면서도 어머니에게는 해당사항이 없다는 식의 멍텅구리 같은 생각을 제가 아마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렇게 멍청하게 "엄마 여기 긁으면 안 돼? 알았지?"하는 소리를 천 번도 만 번도 넘게 되풀이할 수 있었겠습니까. 되풀이하다가 끝내는 어머니의 손에 벙어리장갑을 끼워놓는 식의 악독한 고문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랬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상처 부위를 긁지 못하게 한답시고 손에 장갑을, 그것도 벙어리장갑을 일부러 사다가 끼워놓곤 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그것을 재주도 좋게 매번 벗어버렸습니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다고 했던가요. 왼손을 사용할 수 없게 된 이후로 어머니는 이와 입술을 왼손처럼 사용하고 계셨습니다. 얼마나 가려웠으면, 얼마나 못 견디게 가려웠으면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잇몸으로 장갑을 벗어내고 긁어야만 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볼 수 있으련만 저는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그런 생각은커녕 어머니의 입에 마스크를 씌워놓는 만행까지 저질렀습니다. 마스크 정도야 그까짓 거 벗어버리는 데 무슨 어려움이 있겠습니까. 그 정도로 제가 한 가지만 생각하는 청맹과니가 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심지어 저는 어머니의 손에 끼워놓은 벙어리장갑과 윗옷을 싸잡아서 테이프로 둘둘 감아놓을까 하는 생각까지도 했습니다. 하지만 다행히도 생각에서 멈추고 말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만약에 제가 실제로 테이프를 사용했다면 나중에 얼마나 가슴을 짓찧어야 했을까요.

"욕창이 깨끗이 사라질 때가 바로, 죽기 전이여"

  금방 어디로 갈 듯이 양말을 신고 선잠을 자는 형태로 주무시는 어머니. 새우처럼, 태중의 아이처럼 구부린 이런 모습이 내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이해는 못 한다. 왜 어머니는 저런 자세를 편하게 여기시는 걸까..........
 금방 어디로 갈 듯이 양말을 신고 선잠을 자는 형태로 주무시는 어머니. 새우처럼, 태중의 아이처럼 구부린 이런 모습이 내게는 너무나 익숙하지만 그러나 아직도 이해는 못 한다. 왜 어머니는 저런 자세를 편하게 여기시는 걸까..........
ⓒ 김수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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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이웃집 할머니로부터 놀라운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마가 땅에 닿을 정도로 허리가 굽었으면서도 고추 농사를 짓는다고 작은 손수레에 거름을 싣고 가시던 중이었지요. 언덕바지까지 손수레를 끌어다 드렸는데 할머니가 뒤에서 "아이고 고맙소, 고맙소"하는 말씀을 열 번도 넘게 하시다가 문득 "아이고 참말로 집이 어매는 요새 좀 으떻소?" 하시는 거였습니다.

저는 욕창 때문에 걱정이라고 사실대로 말씀드렸지요. 그러자 이웃의 할머니가 대뜸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순간 욕창이 아주 깨끗하게 아무는 경우가 있다고, 그 말씀을 듣고 저는 두 눈을 반짝이며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는데요?"하고 묻는데 그 할머니 배시시 웃으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랬습니다.

"죽기 전에 그런다요. 더러운 몸으로 죽으면 안 되니까. 자식들도 이중으로 고생하고, 또, 죽어서 가는 그곳에서도 더러운 몸은 안 받아주니까."

뭐라고? 뭐라고요? 아, 이건 너무나 어려운 문제였습니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청한 상태로 하늘만 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밤이 되어 정신이 살짝 돌아와서 부랴부랴 전화를 해봤습니다. 우선 생각난 사람은 연전에 아버지를 잃은 선배였습니다. 선배는 제 이야기를 다 듣더니 거두절미하고 "맞아"하고 감탄사를 토해내고 있었습니다.

자기도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제 이야기를 듣고 생각해보니 그렇다고, 양쪽 엉덩이에서부터 등허리 그리고 어깨에까지 욕창이 번졌는데 병원에서도 어쩌지 못하고 간병인 또한 고생만 하고 말았다고, 뼈까지 하얗게 드러나 보이는데 볼 때나 안볼 때나 너무 힘들었다고, 그래서 혼잣말로 "아이고 아부지 인제 그만 돌아가시시오 야?" 그렇게 몇 번이나 못된 소리를 하곤 했는데 어느 날 거짓말처럼 욕창이 아물기 시작했다고, 그리고 며칠 뒤에 돌아가셨다고, 무슨 신비주의 철학에 등장하는 야사 같은 이야기를 저는 망치로 작신 얻어맞은 것처럼 비몽사몽 하는 기분으로 듣고만 있어야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멍청하게 앉아 있는 제 머릿속으로 온갖 것들이 지나갔습니다. 살 만하면 죽는다는 말이 여기서 나온 것인가 하는 생각도 얼핏 들었습니다. 나을 만하면 도지고 다시 나을 만하면 또 도지는 욕창이야말로 인간사의 축소판이구나, 하는 생각도 희끗 지나갔습니다.

오늘도 저는 어머니의 욕창 부위를 과산화수소로 씻어내고 약을 바르는 짓을 세 차례나 해대기는 했습니다. 과산화수소로 씻어낼 때 어머니는 "아이고 시원하다, 시원하다"를 연발하십니다. 그러나 제 마음은 절대로 예전 같지가 않습니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의 욕창이 하루 빨리 아물기를 바라는 것인지 생살이 드러난 채로의 현상유지가 계속되기를 바라는지 저 자신도 알 수가 없습니다. 도대체 저는 무엇을 바라야 하는 것일까요.

자다가 벌떡 일어나서 마당을 귀신처럼 왔다갔다하며 악, 악 소리를 질러보기도 하지만 하늘에 뜬 별들만 보일 뿐 제 마음은 보이지가 않습니다. 어려워도 이렇게 어려운 문제가 세상에 있었다니요. 외할머니, 저는 과연 이 시험을 풀어낼 수 있을까요? 꿈에서 안 된다면 환청에서라도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저는 무엇을 바라야 하는 것인가요.

덧붙이는 글 | '제가 제일 불효자입니다' 응모글입니다.



태그:#욕창, #치매, #노환,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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