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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녀석이 작은 도서관을 찾아와 하룻밤을 머물다 갔습니다.
 늦은 밤, 녀석이 작은 도서관을 찾아와 하룻밤을 머물다 갔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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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애들 자고 가도 돼?"
"오늘 토요일도 아니잖어?"
"00가 집 나왔대."
"왜?"
"몰라. 아빠가 상담 좀 해 줘."

마을에서 멀리 떨어져 사는 두 녀석이 집 한 옆에 마련한 작은 도서관에 찾아왔습니다. 보통 토요일이나 일요일에 찾아오는데 평일 날, 그것도 늦은 저녁 아홉시가 다 된 시간이었습니다. 우리집 아이의 친구들이었습니다. 그 중에 한 녀석이 가출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두 녀석은 저녁밥도 먹지 않았다고 합니다. 나는 시치미를 뚝 떼고 딴 소리만 했습니다.

"여태 뭐 한겨 이눔들..."
"학교 끝나고 놀다가 교회 갔다가 왔어요."
"니들 교회 다니냐? 낼 모레 성탄절 때도 가겠네."

아내는 갑자기 들이닥친 녀석들에게 적당히 내놓을 찬거리가 없다며 아이들이 좋아하는 라면을 끓였습니다. 그날 밤 녀석들은 우리집 아이들과 함께 작은 도서관에서 밤늦도록 책을 읽었습니다. 슬그머니 가보니 주로 만화책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려, 사람 죽이는 게임하는 것보다 훨 낫지, 만화책이라도 부지런히 읽어라. 아저씨도 읽어 봤는디, 요즘 만화로 된 역사책 재밌더라."

저는 가출한 녀석을 앉혀 놓고 최소한 왜 가출했는가 정도는 물어가며 뭔가 도움이 될 만한 얘기를 해줘야 할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근심걱정 가득한 녀석의 얼굴에 대고 딱히 뭐라 할 말이 없었습니다. 내 잔소리가 녀석에게 오히려 고통을 가중시킬 것만 같아 가출한 이유는 물론이고 아무런 말도 묻지 않았습니다.

"나도 너만할 때 담배 피우고 공부 안 하고 그랬다"

녀석이 가출한 첫날 저녁 나는 녀석에게 아무런 말도 묻지 못했습니다.
 녀석이 가출한 첫날 저녁 나는 녀석에게 아무런 말도 묻지 못했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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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저는 녀석을 어느 정도 믿고 있습니다. 녀석은 종종 작은 도서관에 찾아오는데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천덕꾸러기 소리를 들어가며 담배까지 피운다고 합니다. 주변 아이들 말로는 장난이 심해서 그렇지 친구들 돈을 빼앗거나 괴롭히는 일은 없다고 합니다. 그렇게 공부에는 관심 없다는 녀석에 대한 소문을 접할 무렵이었습니다.

"너 공부하기 싫지?"
"예, 싫어요."
"아저씨두 너만할 때 담배 피우고 그랬다. 쌈박질만 하고 다니는 꼴통이었지, 공부하기가 죽어라 싫어서 부모님한티 무릎 꿇고 앉아 제발 좀 학교 그만 두게 해달라고 빌었던 적이 있었지."

녀석의 두 눈이 동그래졌습니다. 동감한다는 표정으로 두 귀를 세웠습니다.

"그런디 우리 엄니가 울면서 애원하더라, 학교는 반드시 다녀야 한다구, 그래서 그냥 다녔지 뭐, 근디 너두 공부가 그렇게 싫으냐?"
"예."
"다 싫어? 재밌는 과목이 하나쯤 있을 거 아녀?"
"체육요. 체육 시간이 젤 재밌어요."
"체육 말고 다른 거 없어?"
"영어요."

"그래? 그람 영어라도 열심히 해봐라, 아저씨는 말여, 공부하기 싫은데 책 읽는 게 재밌어서 수업시간마다 책상 밑에 소설책 같은 거 펼쳐 놓고 부지런히 읽었다. 너두 영어가 재밌지?"
"다른 과목보다는 재밌어요."
"그럼 일단 영어만이라도 열심히 공부해봐. 그런디 말여, 담배 있잖어, 아저씨 생각에는 그거 피우는 게 나쁜 짓이라 볼 수 없지, 몸에 안 좋기 때문에 나쁜 거지. 사실 아저씨도 그게 잘 안 되는데 암튼 너는 어리기 때문에 몸에 더 좋지 않은께 피우지 않았으면 한다. 나중에 아저씨처럼 끊기 힘들어져."

대충 그런 말을 주고받고 나서 한 달쯤 지났을 것입니다. 문득 녀석이 생각나 우리집 작은 아이에게 물었습니다.

"00녀석 요즘 공부 좀 하냐?"
"어? 아, 얼마 전에 영어 시험을 봤는데 엄청 잘 봤어, A, B반이 있는데 A반에 속했어. 그리고 수업 시간에 책도 읽는 거 같어."

내 말을 건성으로 듣는 줄 알았는데 녀석은 나름대로 새겨들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딱히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튼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좋아 영어사전을 선물했는데 아직도 그 영어사전은 작은 도서관에 모셔져 있습니다. 녀석이 나처럼 건망증이 심한 모양입니다.

"불 끄고도 잠 안 와서 새벽 두시 넘어서 잤어요"

녀석이 가출한 날 밤. 자정이 넘어서야 작은 도서관 불이 꺼졌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녀석들이 학교에 가는 것을 볼 수 없었습니다. 새벽 두 시 넘어서까지 핵발전소에 관련된 공부를 했기 때문입니다. 

부스스 일어나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와 봤더니 옆방에서 한 녀석이 곤하게 잠들어 있었습니다. 00녀석이었습니다.

"어라? 이 눔 자식 봐라, 어디 아픈가? 근디 인효 엄마는 어딨는겨..."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밖으로 나와 보니 일손 부지런한 아내는 손수레를 끌고 집 근처 도로가에서 땔나무를 찾아 헤매고 있었습니다.

"아이구 참, 그만두라니께 내가 한다니께 그러네, 근디 00녀석 학교 안 갔네?"
"죽어도 가기 싫대."
"그렇게 가기 싫으면 가지 말아야지. 집에는?"
"하루 더 자고 내일 간다네."

우리집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말합니다. 학교 가기가 죽도록 싫으면 가지 말라고 합니다. 그동안 8년 이상 꼬박꼬박 학교 다녔고 앞으로 최소 몇 년을 더 다녀야 할 그놈의 학교인데 하루 이틀 빠진다고 세상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실에 꿀단지를 감춰 놓은 것도 아니고, 죽도록 가기 싫은 학교에 가서 뭔 공부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럴 바에 차라리 집에서 할 일 없이 골치 아픈 생각 비워가며 빈둥거리는 게 훨씬 낫지요.

아침밥을 같이 먹으려고 늘어지게 잠든 녀석을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 조그만요, 조금만 더 잘 게요.."

녀석이 어리광을 부렸습니다. 담배까지 피운다는 녀석이었지만 이제 겨우 열다섯, 아직 어린애였습니다. 무엇이 이 어린 아이에게 담배를 피우게 했을까? 나는 녀석이 아무렇게나 잠든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습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억압하는 학교, 그런 학교가 싫었던 내 청소년기를 바라보고 있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녀석은 뒤에 알게 된 것인데 내 청소년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치 큰 고통의 굴레를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녀석은 한참동안 바다를 바라봅니다. 녀석에게 아픈 만큼 세상을 껴안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집 나온 녀석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녀석은 한참동안 바다를 바라봅니다. 녀석에게 아픈 만큼 세상을 껴안을 수 있다고 말했지만 집 나온 녀석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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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일어나기를 기다리다가 지쳐 먼저 아침밥을 챙겨 먹었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한참을 지나도 녀석이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열 시가 넘어 다시 깨웠더니 그때서야 부스스 일어났습니다.

"반찬은 밥상에 있고, 가스레인지에 국 있으니께, 밥 챙겨먹고 나서 다락방으로 올라와라이."

녀석이 혼자서 꾸역꾸역 밥을 챙겨먹고 다락방으로 올라왔습니다.

"그렇게 잠이 오냐? 사실은 너만할 때 아저씨도 그랬다. 학교에 가기만 하면 잠이 왜 그렇게 쏟아지는지 모르겠더라, 너 어디 아프냐?"
"아니오."
"아저씨는 학교 다닐 때 코가 안 좋은 데다가 머리까지 아퍼서 그랬는디, 넌 아픈 곳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잠을 오래 자는겨?"
"새벽 두 시 넘어서 잤어요."
"열두 시쯤에 도서관 불 꺼졌던디, 아저씨가 인마, 두 시 넘어서 잤어."
"불 꺼놓고도 잠이 안 와서 계속 눈 뜨고 있었어요."

페브리즈 안 사줘서 가출했다는 기막힌 사연

녀석이 바다를 향해 자갈돌을 날려 봅니다. 세상에 응어리진 가슴을 풀어 헤치는 돌팔매질이 됐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녀석이 바다를 향해 자갈돌을 날려 봅니다. 세상에 응어리진 가슴을 풀어 헤치는 돌팔매질이 됐으면 하고 바랐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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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이 집을 나와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으면 잠도 못자고 새벽 두 시까지 뜬 눈으로 지냈을까 싶어 마음이 짠했습니다. 녀석의 살아온 얘기를 듣고 보니 잠을 자고 싶어도 잘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녀석이 두 살 무렵에 부모가 이혼을 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대도시로 나가 따로 살면서 가끔씩 찾아와 용돈을 주고 가지만 엄마는 태어나서 두 번 본 것이 전부라고 합니다. 방 두 칸짜리 집에서 정 많은 할머니와 삼촌 밑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합니다.

"근디 너 왜 가출했냐?,"
"삼촌이 집 나가라고 해서..."
"이유가 있을 거 아녀?"
"페브리즈 사 달라고 했는데 안 사주시잖아요."
"페브리즈? 그게 뭔디?"
"냄새 날 때 뿌리는 거요. 선생님들이 제 옷에서 담배 냄새 난다고 그걸 뿌리고 다니라고 하잖아요."

"삼촌한티도 말했어? 담배 냄새 제거하기 위해 그걸 사달라고?"
"아니오! 내 옷에서 노인들 냄새 난다고 그랬죠..."
"담배를 안 피우면 그런 일도 없었을 거 아녀 인마. 그리고 너, 그거 안 사준다고 삼촌한티 화내고 그랬지?"
"........"

"니가 잘못한 게 많지? 어른들은 속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화가 나면 아무 말이나 막 할 수 있어, 아저씨도 마찬가지여. 아줌마하고 싸울 때 함부로 말하고 그래, 우리 애들 한티도 그럴 때도 있고, 그리고 나서 후회하지. 삼촌도 지금 많이 후회하실 거여, 근디 너 여기서 잔다고 얘기했어?"
"아니오."

"어, 이눔 봐라 빨랑 전화해!"
"나는 핸드폰도 없어요"
"그럼 아저씨 걸루 해. 핸드폰 없으면 어떠냐, 아저씨도 핸드폰 구입한 지 일 년도 안 됐어. 우리 집에 전화선이 안 들어와서 어쩔 수 없이 구한겨."

핵발전소에 관련된 원고 쓰는 일을 접어놓고 녀석과 함께 밖으로 나왔습니다. 녀석의 모습을 찍어주기 위해 사진기를 챙겨 들고 바다가 산책을 나섰습니다. 우리 집 개 곰순이도 따라 나섰습니다. 녀석은 내내 말이 없었습니다. 사진기를 들이대고 웃어 보라해도 좀처럼 웃지 않았습니다.

"짜식이 멋진데, 폼 나는데...쫌 더 웃어봐 인마, 야, 영화배우 같다잉."

그제서 배시시 웃다가 환하게 웃습니다. 녀석과 함께 말없이 해변 자갈밭에 앉아 바다를 바라보다가 다시 사진을 찍고 또 찍었습니다. 수십 장을 찍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와 컴퓨터 앞에 나란히 앉아 사진기에 담긴 녀석의 모습을 풀어 놓았습니다. 카메라 앞에서 환하게 웃는 녀석의 모습이 멋집니다.

"저렇게 웃고 있으니까 얼마나 좋냐, 너 앞으로 웃고 다녀 알았지? 웃으면 니 가슴팍에 그만큼 힘이 생기는 겨. 근디 저 녀석이 크면 뭐가 될까? 가출기념으로 잘 보관해 놨다가 나중에 니가 커서 군대 갔다 올 무렵에 다시 보자. 재밌겠지?"

녀석은 배시시 웃다가도 이내 불안한 얼굴색을 내보입니다.

"너 오늘은 집에 들어가야 한다잉. 할머니도 걱정하실 테니께 집에 가서 삼촌한티 잘못했다고 빌어 알았지?"
"예."

하룻밤 더 자고 간다고 하는 녀석을 등 떠밀었더니 친구들 만나고 집으로 돌아갈 차비가 없다고 합니다. 지갑을 열어 보았더니 만 원짜리 지폐 두 장이 전부였습니다. 

"2만 원 있으니께, 우리 둘이서 반반씩 나눠가지자, 요새 아저씨가 실업자가 됐거든."
"나중에 갚을 게요."
"짜식이 괜찮어 인마, 나중에 우리 집에 올 때 차비 혀."

담배를 사기 위해 좀생이처럼 만원을 남겨두고 만원을 녀석에게 건네주면서 '너 이 돈으로 담배 사면 안 된다'라고 말하려다가 그만두었습니다. 녀석은 그 용돈으로 담배 냄새 제거제를 사든지 아니면 담배를 살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녀석을 믿습니다. 적어도 담배를 사 피우지 않을 것이라고.

녀석에게 친구처럼 속 마음을 털어 놔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녀석에게 친구처럼 속 마음을 털어 놔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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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가 부족한 게 많지만 하고 싶은 얘기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라, 찾아와서 친구처럼 얘기해라, 친구가 따로 있겠냐? 우리 집 애들도 아저씨하고 친구처럼 지낼 때가 많으니까 걱정 말고."

녀석이 집을 나서면서 몇 번이고 돌아서서 인사를 합니다. 나는 저만치 떠나는 녀석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지 못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나를 찾아와 줘서, 내게 친구처럼 속마음을 털어 놔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해주지 못했습니다. 고맙다는 말을 해주면 녀석이 얼마나 기분 좋아 할까 싶어 다음에 찾아 올 때는 꼭 그 말을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나는 녀석을 통해 청소년기로 되돌아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청소년기에 울면서 애원할 수 있는 엄니가 있었지만 녀석은 울면서 애원할 엄니도 없었습니다. 정 많은 할머니와 삼촌이 있지만 부둥켜 안을 형제도 없습니다. 그런 녀석이 감당해야 할 아픔을 내가 얼마나 알 수 있겠습니까? 성탄절을 앞둔 오늘, 세상의 고통을 다 짊어지셨다는 예수님은 어디에 계실까요?


태그:#가출청소년, #작은도서관, #담배, #세상의 아픔, #성탄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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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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