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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채호의 <조선상고사>.
ⓒ 비봉출판사
서평자는 오히려 총론을 더 중점적으로 읽기로 하였다. 신채호의 역사관은 물론이고 역사적 사실에 어떻게 접근하고 그것을 어떻게 서술할 것인가 하는 일련의 입장이나 태도를 목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재 신채호가 정의하는 '역사(歷史)'란 무엇인가? "인류사회의 '아(我): 나'와 '비아(非我): 나 아닌 나의 상대'의 투쟁이 시간적으로 발전하고 공간적으로 확대되는 심적 활동의 상태에 관한 기록"이다.

'아(我)'도 '비아(非我)'의 '아(我)'도 역사적인 '아(我)'가 되려면 두 개의 속성 즉 '상속성(相續性): 시간적으로 생명이 끊어지지 않는 것'과 '보편성(普遍性): 공간적으로 영향이 파급되는 것'을 구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역사를 구성하는 삼대 원소(元素)는 무엇으로 보았는가? "때(時), 땅(地), 사람(人)"이다. 이 세 가지를 제시하면서 조선 구사(舊史)의 결점을 지적한다. 즉 조선사(朝鮮史)를 쓴 이전의 조선의 사가(史家)들이 있는 그대로를(본래 모습대로) 쓰지 않았다는 점을 통탄해 한다.

조선의 눈이나 귀나 코나 머리 같은 것을 혹이라 하여 베어 버리고는 어디에선가 무수한 혹들을 가져와서 붙였다. 혹을 붙인 조선사도 이전에는 읽는 이가 너무 없다가, 세계가 크게 하나로 통하면서 외국인들이 왕왕 조선인을 만나서 조선사를 물으면, 어떤 이는 조선인보다 조선사를 더 많이 알고 있으므로, 창피를 당한 끝에 돌아와서 조선사를 읽는 이도 있다. 그러나 조선인이 읽는 조선사나 외국인이 아는 조선사는 모두 혹이 붙어있는 조선사이지 옳은 조선사가 아니었다. (34쪽)

우리의 사학(史學)이 발달하지 못했던 원인을 몇 가지로 나누어 살펴보고도 있다. ▲신지(神誌) 이래 역사를 비장(秘藏)하던 버릇 ▲새 왕조가 이전 왕조의 유물과 유적을 파괴한 점 ▲한문 저술의 역사만 있어 역사를 기록하여 전할 기구(器具)가 적합하지 못했던 점 ▲역사 사상(思想)의 맥락이 단절되었던 점 등을 들고 있다. 지금도 이러한 면이 있지는 않은지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이어 단재는 그의 개인적인 경험을 피력하며 '옛 비석(古碑)의 참조'로부터 '각 서적들의 상호 증명(互證)' '각종 명사(名詞)의 해석' '위서(僞書)의 변별과 선택' '몽고(蒙)ㆍ만주(滿)ㆍ토욕혼(土) 여러 부족의 언어와 풍속의 연구' 등 사료의 수집과 선택에 관한 참고자료를 내놓는다. '각 서적들의 상호 증명(互證)' 가운데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BRI@사학(史學)이란 것은 개별(個別) 사건들을 수집하고 잘못 전해진 것을 바로잡아 과거 인류의 행동을 살아 있듯이 그려내서 후세 사람들에게 물려주는 것일 뿐만 아니라, 승군(僧軍) 곧 선인군(先人軍)의 내력을 모르면 고구려가 당나라 군사 10만 명을 물리친 원동력(原動力)뿐 아니라 이에 앞서 명림답부(明臨答夫)의 혁명군의 중심이 무엇이었는지, 거란(契丹)을 깨뜨린 강감찬(姜邯贊) 군대의 주력이 무엇이었는지도 다 모르게 되며, 따라서 삼국시대부터 고려까지의 1천여 년간의 군제(軍制)상 중요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모르게 된다. (55쪽)

이를테면 <삼국사기>에 빠져있는 '승군(僧軍)' 곧 '선인군(先人軍)의 내력'을 밝히기 위해 <고려사> 최영전(崔塋傳)에 있는 한 문장을 출발점으로 삼아 <고려도경>, <통전>, <신당서>, <후한서> 등 다른 서적들을 비교 검토 확인하여 결론을 도출해내는 방법을 취한 경우이다.

'위서(僞書)의 변별과 선택'도 전하는 바가 있다. 우선 "위서를 변별하지 못하면, 인증(引證)해서는 안 될 기록을 우리 역사에 인증하는 착오를 범하는 일"이 된다는 것을 경계한다. 그러면서 '위서(僞書) 중에 기재된 거짓 사실', '진서(眞書) 중의 거짓 사실(진서인 그 책 자체 내에 있는 위증+후세 사람의 위증)', '위서(僞書) 중에 나오는 사실'로 나누어 그 사례를 확인시켜 준다.

특히 김부식에 대해서는 "김춘추ㆍ최치원 이래 모화주의(慕華主義)의 결정(結晶)"이라 비판하며 대단히 부정적이다. 이유를 들어보자.

그가 말이나 피나 뼈나 종교나 풍속 등 어느 한 가지도 같은 데가 없는 중국인들을 우리와 동종(同宗)으로 보아서, 말(馬) 살에 쇠(牛) 살을 묻힌 식의 어림없는 붓을 놀린 후로 그 편견을 갈파한 이가 없었기 때문에 우리 부여의 종족 계통이 분명하지 못하게 되어, 드디어는 조선사의 위치가 어두운 구석에 놓여지게 된 지가 오래 되었다. (65쪽)

역사서의 개조에 대한 단재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그 계통(系統)을 구해야 한다('국선國仙의 전통'을 예로 들고 있다). ▲그 회통(會通)을 구해야 한다(여기서 '회통'이란 전후(前後)로 피차(彼此) 간의 관계를 유취(類聚)한다는 뜻. 묘청의 경우를 예로 들어 논하고 있다). ▲감정에 좌우되어서는 안 된다('거북선'과 관련한 영국사의 기록과 관련한 반응을 예를 들어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본색(本色)을 보존해야 한다(<대동운옥(大東韻玉)>과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미천왕기에 담긴 이야기를 예로 들어 시대의 본색을 그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렇게 네 가지를 제시해 놓고 있다.

개인과 사회의 논쟁에 대해서는 솔직히 어느 한쪽으로 쏠려 있지는 않은 균형을 보여준다. 이 둘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결론을 내린다.

사회가 이미 결정된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을 쓰기가 매우 곤란하고, 사회가 아직 결정되지 않은 국면에서는 개인이 힘을 쓰기가 아주 쉽다는 것이다. (83쪽)

개인이나 민족이나 두 가지 속성을 지닌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서술하여 준다. 즉 그 두 가지 속성이란 '항성(恒性: 시대와 환경이 변하더라도 변하지 않는 성질)'과 '변성(變性: 시대와 환경에 따라서 변하는 성질)'이라고 일러준다. 항성은 제1의 자성(自性)이고 변성은 제2의 자성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항상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두 가지 자성의 많고 적음을 조절하고 무겁고 가벼움을 고르게 하여 그 생명을 천지와 같이 장구하게 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오직 민족적 반성(反省) 여하에 달려 있을 것이다. (83쪽)

역사를 연구하는 일이나 역사를 바라보는 일은 어찌 생각하면 '진실(眞實)'에 접근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거에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다. 지금 현재에도 오늘의 눈으로 살펴보고 눈여겨보아야 할 또 하나의 엄정한 눈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끝으로 문장 하나를 더 옮겨본다.

취재기자가 취재하고 편집자가 교정하고 그 다음에 또 오자를 교정보는 신문잡지의 기사도 오히려 그 진상과 크게 다른 것이 허다할 뿐 아니라 갑의 신문에서 이렇다 하면 을의 신문에서는 저렇다 하여 믿을 수 없는 일이 많은데, 하물며 고대의 한두 사가(史家)가 자기의 호오(好惡)에 따라 아무 책임감 없이 지은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75쪽)

덧붙이는 글 | * 지은이: 신채호 / 옮긴이: 박기봉 / 펴낸날: 2006년 11월 10일 / 펴낸곳: 비봉출판사 / 책값: 2만 2000원


조선상고사

신채호 지음, 박기봉 옮김, 비봉출판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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