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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이 간 담 사이로 피어난 풀잎
ⓒ 박소영
겨우내 굳게 닫혀 있던 버스 차창이 봄기운에 밀려 조금씩 열린다. 며칠 전 밤, 버스를 타고 귀가할 때는 반가운 봄비가 차창을 뚫고 들어와서는 펼쳐 놓은 책장을 낚아채듯 서너 장 넘기기도 했다.

그 순간 나는 두꺼운 책이 한 장 한 장 차창으로 날아가는 상상과 함께 겨우내 끌어안고 있던 문제들을 일제히 바람에 날려 보내는 기분을 맛보았다. 참 상큼했다.

무겁게만 느껴지던 문제들이 어느 한 순간의 위력적인 바람 한 자락에 가뿐하게 털려버리는 가벼움이라니! 이런 게 '블랙코미디'구나 싶었다. 언제나 남들의 인생은 순조롭게만 보이고 내 삶은 가시밭길이라고 생각해온 어리석은 나를 직면하면서 키득키득 웃었다.

활짝 피어나는 봄과 함께 봄꽃을 빼 닮은 책 한 권을 만나는 복도 받아 챙겼다. 절망 섞인 언어에 묶여 사는 내게 '긍정의 힘'을 소근 소근 전달해 주는 사람, 장영희의 <내 생애 단 한 번>이다.

장영희는 흙이라곤 찾을 라야 찾을 수 없는 도시의 콘크리트 바닥을 뚫고 피어난 꽃이다. 그것도 사람들의 발걸음이 잦은 아스팔트 길 정중앙에 피어난 꽃이다. 그녀는 거기서 척박한 땅을 향해 씨앗을 날려 보낸다. 희망이야말로 인간이 가장 나중까지 절대 놓쳐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과 함께.

▲ <내 생애 단 한 번> 표지
ⓒ 샘터
암 말기 환자인 젊은 엄마가 임종을 앞두고 아홉 살과 일곱 살짜리 아들에게 언제나 씩씩하라고 유언을 남긴다. 엄마가 보고 싶지 않니라고 묻는 이에게 아홉 살 아이는 갑자기 군인처럼 손을 양옆에 붙이고 꼿꼿이 서더니 목이 터져라 소리질렀다.

"넷, 보고 싶어요. 그렇지만 저 씩씩해요!" 군인 같은 자세로 고함지르는 것이 아이가 생각하는 '씩씩함'이었고, 어머니와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었다. - 본문 중에서


'원래 꿀벌은 몸에 비해 날개가 작아서 날 수 없는 몸의 구조를 가지고 있었지만 날 수 있다는 날갯짓으로 마침내 날 수 있게 되었다'는 희망을 전하는 저자는 놀랄 만한 의지력으로 세상은 살 만한 곳이라는 믿음을 일관되게 그리고 있다.

사랑받는 만큼 의연해질 줄 아고, 사랑받는 만큼 성숙할 줄 알며, 사랑받는 만큼 사랑할 줄 안다. '진짜는 아파도 사랑하기를 두려워하지 않고, 남이 나를 사랑하는 이유를 의심하지 않으며, 살아가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용기를 가진다. - 본문 중에서

사랑받기 때문에 사랑할 줄 아는 '진짜'가 되기 위해 애쓰는 장난감들을 소개한 서양동화 '벨벳토끼'는 다른 어떤 사랑이야기들보다 마음에 와 닿는다.


"시지푸스의 비극은 산꼭대기에서 굴러 내려오는 돌을 밀어 올리지만 내일이면 그 돌은 다시 산 밑으로 내려와 있을 테고,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차라리 굴러 내려오는 돌 밑으로 몸을 던져 버리고 싶은" 우리들은 제대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무심하게 흘러 버리는 시간에 기대어 시큰둥한 상태로 삶을 낭비하고 있지 않은가.

"장애를 딛고 세상을 전투적으로 살아 왔다"고 고백하는 저자. '킹콩의 눈' 대목에서는 한없는 안쓰러움으로 같이 울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 세상에 남기는 마지막 한마디'에서는 날아갈 듯한 가벼운 명쾌함으로 재미를 선사하기도 한다.

이 책에는 범상치 않은 삶의 자세한 기록들이 옹골찬 투지의 자세로 인간승리를 획득한 비범함보다는 자신의 장단점을 그대로 드러내놓고 과장 없는 표현으로 작은 것들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길 줄 아는 '참된' 인간의 마음과 정성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단 한 번뿐인' 삶의 길에서 결코 우리가 놓쳐서는 안 되는 중요한 가치들, 연민에서 빚어지는 정의로움과 신뢰할 수 있는 인간애, 꿈을 꿀 수 있는 의지력 등 세상을 감동시키는 희망의 메시지들로 가득하다. 현재가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이들이 있다면 '장영희'그녀의 이름을 기억해봄직하다.

아울러 단번에 '책읽기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 주는 그녀의 소박하지만 깊이 있는 글쓰기의 묘미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지음, 샘터사(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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