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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어렸을 때부터 나의 악몽은 항상 내 몸과 다리를 지탱해 주는 목발, 그리고 보조기와 연관된 것이었다. 꿈 속에서 나는 길바닥에 앉아 있고, 사람들은 길을 가다 말고 나를 뚫어져라 쳐다본다. ...이 글들을 책으로 엮으면서 꼭 그와 같은 느낌이 든다. 마치 나는 땅바닥에 앉아 있고, 다른 사람들이 그런 나를 에워싼 채 보고 있는 듯한 느낌."

이 책은 번역가이자 영문과 교수인 저자가 잡지에 기고했던 에세이들을 다시 모아 펴낸 것이다. 소아마비로 인해 겪었던 삶의 우여곡절들과 세상에 대한 자신의 가치관들이 소박하고 부드러운 필치로 표현되어 있다. 그녀가 던지는 메시지들은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느끼는 것들, 장애 여성으로서 힘들었던 과거, 살면서 느끼는 행복과 좌절 등 매우 다양하다.

보통 유명 대학의 교수직을 하고 있는 여성이라고 하면, 그 특유의 도도함과 거만함을 연상하게 된다. 하지만 이 책은 여교수에 대한 그런 편견을 버리게 만든다. 왜냐하면 전체적으로 너무나 솔직하고 꾸밈없는 문체를 유지하면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의 시각을 견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그러한 태도는 아마 그녀가 겪었던 신체적 장애로 인한 여러 어려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사람이란 고통을 통해 성숙해 가며,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와 애정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녀는 이러한 과정들에 대해 스스럼없이 털어놓는다. 자신도 절망과 좌절의 시간을 보낸 적이 있다고‥.

그녀도 다른 장애인들처럼 왜 '하필이면' 나만 목발에 의지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에 빠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불행의 반대편에 다른 행복도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 중에서 "왜 '하필이면' 나만 훌륭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 좋은 형제들과 인연을 맺고 아름다운 세상을 살고 있는가" 하는 생각 또한 가질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필이면' 불행이라는 놈이 나에게 찾아올 때도 있지만, 남들이 가지지 못한 행복을 '하필이면' 나 혼자 누리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러니 불행한 일에 짓눌려 억울해 하는 것보다, 삶의 아름다운 면을 더 바라보고 사는 게 오히려 마음 편하고 기분 좋은 일이다.

서양 동화 <벨벳 토끼>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그녀는 우리가 사랑을 받아들일 줄 아는 마음에 너무 인색하다고 말한다.

"우리는 고작 차 한두 대 굴리는 석유나 석탄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에너지는 아까워하면서, 막상 이 우주를 움직이는 사랑이라는 에너지는 그저 무심히 흘려 버리기 일쑤다."

이 거대한 사랑의 에너지를 받고 감사할 줄 아는 모습이 아름다운 사람이다.

어느 날 저자는 학생들에게 영어 회화 구두 시험을 치르면서 "만약 내일 죽어야 한다면 오늘 무엇을 하겠는가?"라는 질문을 주었다고 한다. 그 대답들은 각양각색이었는데, 그 중에 저자의 마음에 와 닿은 한 마디를 옮겨 놓는다.

"오늘이 가기 전에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사랑해요'라는 말을 하겠습니다."

평소의 우리는 사랑의 힘이나 그 표현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다. 물론 마음 속으로는 늘 누군가를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 피곤함과 짜증, 불만, 미움 등의 마음이 더 큰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가 많다. 저자는 그러한 삶의 태도를 버리고, 좀더 순수하고 맑은 마음으로 사랑을 주고받기를 소망한다.

"살아가면서 누군가를 미워할 때 그를 '용서해야 할 이유'보다는 '용서하지 못할 이유'를 먼저 찾고, 누군가를 비난하면서 그를 '좋아해야 할 이유'보다는 '좋아하지 못할 이유'를 먼저 찾고, 마음의 문을 꽁꽁 닫아 건 채 누군가를 '사랑해야 할 이유'보다는 '사랑하지 못할 이유'를 먼저 찾지는 않았는지."

대장장이 프로미시우스의 신화를 인용하면서는, 그가 인간을 빚으면서 인간의 목에 두 개의 보따리를 매달아 놓았다고 전한다. 보따리 하나는 다른 사람들의 결점으로 가득 찼는데 목 앞에 매달려 있고, 다른 하나는 자신의 결점인데 뒤에 매달려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의 결점은 잘 보지만 자기 결점은 보기 어렵게 되었다.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또 비슷한 우리들. 앞뒤로 보따리 하나씩 메고 돌아다니면서 열심히 앞보따리를 뒤적거려 보지만, 결국은 앞보따리나 뒷보따리나 속에 들어 있는 건 매한가지이다. 이렇게 보면 장점이 저렇게 보면 단점이고, 저렇게 보면 단점이 이렇게 보면 장점이다. 결국 장단점이 따로 없지만, 어차피 세상을 판단하는 기준은 자기 자신이다."

이와 같은 긍정적이고 밝은 사고가 책의 전반에 폭넓게 표현되어 있다. 하지만 그녀가 겪었던 아픔들도 많이 언급된다. 허름한 옷을 입고 목발을 짚은 채 명동 옷가게를 갔더니 구걸하는 사람인 줄 알고 내쫓긴 이야기, 초등학교 시절 언덕에 있는 집에서 학교까지 전쟁을 치르며 나갔던 이야기, 장애아라는 이유 때문에 입학을 거부당했던 이야기 등은 참 가슴 아프다.

그녀가 이런 절망을 극복해 내고, 자신의 길을 찾아간 모습은 많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줄 것이다. 그 희망의 메시지가 지나치게 과장되고 미화된 것이 아니라, 솔직하고 담백하게 묘사되어 있기에 이 책은 가치가 있다. 그녀가 던지는 자그마한 이야기들은 어떻게 사는 게 진정으로 삶을 사랑하며 사는 것인가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어쩌면 우리들은 모두 '삶'이라는 책의 작가들이다. 프랑스 작가 조르주 상드는 '삶이라는 책에서 한 페이지만 찢어낼 수는 없다'고 했다. 그렇지만 한 페이지만 찢어내지 못한다고 해서 책 전체를 불살라야만 하는가? 우리들 각자가 저자인 삶의 책에는 절망과 좌절, 고뇌로 가득 찬 페이지가 있지만, 분명히 기쁨과 행복, 그리고 가슴 설레는 꿈이 담긴 페이지도 있을 것이다."

이 '삶'이라는 책 가운데 당신은 어느 페이지를 적고 있는지‥. 그 페이지가 기쁨과 행복, 그리고 가슴 설레는 꿈이 담긴 것이라면, 그곳에 바로 아름다운 삶에 대한 해답이 존재할 것이다.

내 생애 단 한번

장영희 지음, 샘터사(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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