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라는 문구가 무색해진 지 오래다. 하지만 뜻밖에도 독서를 부추기는 건 독서의 천적(?) 드라마다. tvN 월화 드라마 <이번 생은 처음이라>(아래 <이번 생>)는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라며 정현종의 시 '방문객'으로 사랑의 시작을 알렸다.

<이번 생>을 '문학적'으로 만드는 건 작품 곳곳에서 인용한, 독서 욕구를 부추기는 문학 작품들 때문만은 아니다. <이번 생>은 작품 속에 자신을 투영하며 스스로 돌아볼 수 있는 '문학적 역할'까지 담당하고 있다.

사람이 온다, 그의 19호실과 함께

 이번 생은 처음이라

ⓒ tvN


남세희(이민기 분)와 윤지호(정소민 분)가 계약 결혼을 통해 '사랑'의 문을 열기 시작한 것을 두고 <이번 생>은 정현종의 시 '방문객'으로 표현했다. 그저 월세 세입자가 필요했고 몸 뉘일 방이 필요했던 두 사람은 본의 아니게 한 공간에서 살며 '사랑하지 않는다'는 편의적 이유로 성큼성큼 서로의 삶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사람이 온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그의 과거와 현재와
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
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 - 정현종 '방문객' 중에서.

정현종의 '방문객'은 그저 문학적 수사로 그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남세희는 윤지호를 지키기 위해 비싼 오토바이를 부수는 걸 감수했고 윤지호는 자신의 정성을 남세희가 돈으로 갈음하려 하자 서운해 했다. 두 사람은 가랑비에 옷 젖듯이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결국 진짜 키스를 통해 통과의례를 치렀다.

서로의 세계에 발을 들이니 그곳엔 두 사람이 30년 혹은 38년 동안 웅크리고 살아왔던 각자의 '19호실'이 있었다. 윤지호는 영국 작가 도리스 레싱의 소설 <19호실로 가다>를 읽으며 "왜 인연은 항상 예상치 못해서 슬픈 걸까. 당신과 나의 19호실이 열려버렸다"고 내레이션 했다.

흔히 '결혼이란 둘이 만나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들 말한다. 이 이상한 수학 공식에는 힘든 세상에서 두 사람이 힘을 합쳐 헤쳐나간다는 전제가 깔려있다. 결혼은 하나의 가족을 만들고, 그 가족은 '가족주의' 때로는 '전체주의'의 바탕이 됐다. 그러나 2017년 젊은이들은 사회경제적 이유로 '가족'을 이룰 수 없는 처지다. <이번 생>은 변화하는 세상 속에서 지금까지 '우리'라고 정의 내려진 그 명제에 대해 이견을 제시한다.

이는 연애 7년 차, 아니 이제 전 연인이 된 양호랑(김가은 분)-심원석(김민석 분) 커플에게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양호랑은 심원석이 애플리케이션 개발로 자수성가하기를 바랐지만 이는 쉽지 않았다. 원석은 호랑을 위해 자신의 꿈을 접고 선배 회사로 입사했지만 당장 결혼할 처지는 되지 못했다. "5년만 더 기다려달라"는 원석의 요구에 호랑은 절망했고, 원석은 호랑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없다는 이유로 이별을 통보한다.

'나와 너'를 구분하지 않고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두 사람이었다. 그러나 7년이라는 시간에도 두 사람의 이해관계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연애는 좋지만 결혼은 물음표"인 원석과 결혼을 위해 모든 것을 감수했던 호랑은 이렇게 어긋나고 말았다. 원석이 자신의 꿈을 포기해도 쉽사리 합의에 도달할 수 없었던 이 커플은 결국 7년 차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자신을 직시하기에 이른다.

19호실에서 나와 사랑의 광장에서

 이번 생은 처음이라

ⓒ tvN


호랑, 원석 커플의 이별은 결국 우리 사회에서 단칸방이라도 행복하던 그 시절의 결혼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걸 증명한다. 시대가 달라졌고 사회도 달라졌지만, 무엇보다 사람이 달라져서다. 즉, 이 시대의 결혼은 각자의 삶과 주관이 분명한 개인들의 결합이라고 드라마는 말한다.

우수지(이솜 분)와 마상구(박병은 분) 역시 마찬가지다. 우수지를 좋아하는 마상구는 '우리가 함께라면 모든 게 다 해결될 거야'라고 고백하는 대신, 상처 받고 '19호실'에 숨어 버린 수지가 당당하게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도록 독려한다. 기꺼이 응원군의 역할을 자처한다. 두루뭉술하게 묶인 연인이 아니라 각자 개인 삶의 주체로서 '결합'을 의미하는 고백이다.

<이번 생>에서 전직(?) 드라마 작가인 지호는 바로 이런 자신의 처지를 <19호실로 가다>에 빗대 설명한다. 가사 노동에 지친 한 여성이 자신만의 '공간'을 얻기 위해 기꺼이 '불륜'의 오해조차 감내하는 파격적인 줄거리는 이 시대를 사는 개인들의 현실을 절묘하게 담았다.

'집'에 집착하는 세희, 머물 방이 필요했던 지호. 2017년을 살아가는 두 사람이 '공간'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구시대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을 이용하는 장치는 그래서 더 상징적이다. 공간을 공유한 이들은 서로로 인해 마음 속의 공간이 생겨, 사랑이 싹트기 시작했다. <이번 생>은 '로맨틱 코미디'의 형식을 띠면서도 21세기 실존적 현대인의 고민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 과정은 녹록지 않다.

'누군가를 만나고 사랑하다 보면 우리는 그 사람을 알게 된다. 하지만 그 사람을 다 알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무엇인가 모르는 구석이 생긴다.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나의 세계 속에서 자라는 상대가 점점 울창해지고 있다는 뜻이다. 아니 이것은 내가 상대의 세계로 더 깊이 걸어들어왔다는 뜻이다. (...) 사랑의 세계에서 공간은 늘 광장처럼 드넓다.' - 박준 산문집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중에서.

 이번 생은 처음이라

ⓒ tvN


<이번 생>에도 로맨스 드라마의 '클리셰'인 삼각 관계가 등장했다. 12년 전 세희와 동거하고, 아이까지 가졌던 고정민(이청하 분)은 남세희와 윤지호의 연애 전선에 위기를 불러온다. 그러나 <이번 생>은 이 긴장을 계기로 오히려 두 사람의 '19호실' 방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세희는 고정민의 등장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깨달았으며 윤지호는 그간 묻어두었던 작가의 꿈, 아니 작가를 하기 위해 겪었던 고통을 다시 꺼내들었다.

이제 단 2회만을 남겨둔 드라마는 함께하기 위해 각자 해결해야할 과제 때문에 주인공들의 어깨가 무거운 상황이다. 자신의 방에 묵혀둔 짐 보따리를 풀고 나서야, 이들은 자신의 '19호실'을 나와서 함께할 '공간'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다. 이는 <이번 생>이 '자존'과 '실존'을 우선시하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권하는 '사랑'과 '결혼'이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이번생은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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