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0년차 빅뱅 팬이다.

나는 10년차 빅뱅 팬이다. ⓒ YG엔터테인먼트


거짓말

평화로운 하루였다. 점심으로 스파게티를 먹고 TV를 보다 스르륵 잠들었다. 아무소리도 들리지 않는 조용한 일요일 오후였다. 엄마는 약속이 있어서 나갔는데, 아빠는 어디 갔지 싶어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빠를 발견했다. 안방이 아닌 내방에서. 평화는 깨지기 시작했다.

아빠는 컴퓨터 앞에 앉아있었다. 문제는 기분이 좋지 않을 때 짓는 표정을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설마 '그걸' 보고 있는 건가. 눈앞의 상황을 믿고 싶지 않았다. 이대로 문을 닫고 소파로 돌아가야 할지를 수없이 고민했다. 그래도 아빠가 무엇을 보는지 알아야 했기에 천천히 방으로 걸어갔다. 아무리 큰 위기라도 침착하면 괜찮다고 그랬다. 마음을 진정시키며 화면을 쳐다봤다. 아, 기절하고 싶다. 작은 글씨로 가득 찬 화면 속 짧은 대화가 유난히도 잘 보였다.

"지용아 나 진짜 잘 할 수 있어. 응? 우리 다시 시작해보자."
"형 취했어. 멤버들 깨겠다. 빨리 들어가서 자. 내일 또 방송..."
"야 권지용!"

눈을 피하는 게 맘에 안 들었는지, 결국 강제로 고개가 들렸다.


"너도 나 좋아하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사랑한다고 권지용."

어제 중복 다운받은 '[탑뇽]중독(1).txt'이었다. 아빠와 눈이 마주쳤다. "'탑뇽'이 대체 뭐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아빠는 이미 다른 팬픽까지 읽은 것 같았다. 작업표시줄엔 숨기고 싶은 제목들로 가득했다. '[탑뇽]도도한 권지용과 순진한 최승현.txt', '[탑뇽]어깨를 감싸고,txt'... 아까보다 심장이 더 쿵쾅거렸다. 아빠는 내가 보는 앞에서 계속 파일을 클릭했다. 저 깊숙이 숨겨온 팬픽이었다. '정진-보물-빅뱅-글-F-ㅌㄴ'무려 5개의 폴더 안에 고이 간직해왔다. 어제 휴지통 비우기만 했었어도 들키지 않을 수 있었는데. 순간의 실수가 그동안의 노력을 한순간에 무너뜨렸다.

 팬픽은 그렇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팬픽은 그렇게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넜다. ⓒ 이정진




마지막 인사

'내 것이 될 수 없을 바에 너희들끼리 사랑해라'는 마음으로 읽기 시작한 팬픽이었다. 팬들 사이에서 호불호가 나뉘는 분야기도 했다. 멀쩡한 멤버들을 연인관계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한 번 빠진 팬픽의 늪에서 헤어나오기란 쉽지 않았다. 탑과 지드래곤이 함께 서 있는 모습만 봐도 이미 머릿속에선 글 한 편이 완성됐다. 금단의 사랑은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줬다. 스친 손길에 두근거리는 짝사랑부터 서로의 팔과 다리가 얽히고설킨 어른의 사랑까지, 전부 팬픽이 알려주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어제 '[탑뇽]중독(1).txt'을 다운 받았을 때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것 같았다.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필 커서가 향한 곳은 또 하필 '[탑뇽]키스만큼은.txt'. 망했다.

"빅뱅이랑 관련된 거 다 가져와!" 움직일 수 없었다. 아빠는 빅뱅 폴더를 하나씩 삭제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F 폴더(Fan fiction)가 영구적으로 없어졌다. 아직 읽지 못한 공금 팬픽이 많았다. 내가 그걸 구하려고 얼마나 열심히 댓글을 달고 주인장한테 아부했는데. 처음 공금 팬픽을 구했던 날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공금 팬픽은 말 그대로 공(유)금(지), 어둠의 경로로 알음알음 추적해서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구하기 힘든 팬픽일수록 가치는 올라갔다. '[탑뇽]키스만큼은.txt'은 공금 팬픽 2개랑 교환해야 했을 정도로 귀했다. 곧바로 P(Photo) 폴더 역시 떠났다. 저 먼 곳으로.

 탑뇽팬픽은 수위가 높기로 유명하다.

탑뇽팬픽은 수위가 높기로 유명하다. ⓒ 이정진


에라 모르겠다

앨범과 포스터, 각종 굿즈를 압수당했다. 나는 멍하니 컴퓨터 화면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빠는 어딘가로 전화했다. "예 처형, 저 정진 아빠예요. 점심 드셨어요?" 작은 이모였다. 뒤이어 믿고 싶지 않은 말이 계속해서 들렸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민서 컴퓨터에 '탑뇽'이라는 파일 있으면 삭제해주시겠어요? 그게 애들이 뭐 빅뱅 관련해서 다운 받은 거라던데 내용이 좀 이상해서요." 민서는 최후의 보루였다. 혹시라도 자료가 날아갈 경우에 대비해 진짜 소중한 자료를 서로의 컴퓨터에 복사해뒀다. "예, 예. 민서한텐 굳이 말 안 하셔도 될 것 같아요. 그럼 다음 명절 때 뵙겠습니다." 미안해 민서야, 언니가 나중에 설명할게.

마음의 준비도 못 하고 헤어진 자료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아이들을 어떻게 다시 모을 수 있을까. 가슴으로 한 번, 눈으로 두 번 울면서 다짐했다. 기필코 내 노트북을 사겠다고. 온갖 팬픽을 다운받아서 바탕화면에 깔아놓겠다고.

인생 최대의 위기는 그렇게 끝이 났다. 전용 노트북은 무려 6년이 지난 뒤에야 가질 수 있었다. '20살 대학입학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10년 동안 부지런히 읽었지만, 아직도 못 읽은 팬픽이 많았다.

 노트북이 생겼다. 이제 안전하다.

노트북이 생겼다. 이제 안전하다. ⓒ 이정진


천국

새로운 아이돌의 등장으로 가요계가 재편되듯, 팬픽도 마찬가지다. 최근엔 팬픽을 다운받는 것과 별개로 작가의 개인 홈페이지를 찾아다닌다. 회원가입 후에 구독알림을 설정하면 새로운 글을 바로 받아볼 수 있다. 소재도 전보다 훨씬 다양해졌다. 어제 읽은 '타임버스'는 서로의 파트너를 스쳐 지나갈 때마다 손목에 적힌 숫자가 1씩 늘거나 줄어든다는 설정이었다.

팬픽은 더 이상 좋아하는 가수가 서로 사랑에 빠지기만 하는 단순한 소설이 아니다. 개성 강한 2차 창작물, 색다른 시도가 반복해서 이뤄지는 새로운 문화다. 이를 싸잡아 '단순 망상'이라고 칭하는 것은 팬픽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큰 상처가 된다.

우리에게 팬픽은 '내 가수를 좋아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법'이다. 너무 좋아하기 때문에 팬픽을 쓰고 읽는다. 가수를 향한 마음이 이뤄질 수 없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그래도 속상하고 슬픈 게 팬인 걸 어쩌겠는가. 팬픽은 그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해준다. 자고로 덕후는 무작정 두근거리는 마음을 일단 쏟아내는 존재다. 진정시키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좋으니까 읽는다. 반복이 아닌, 언제나 새로운 행위다.

덧붙이는 글 공모 <내 안의 덕후> 응모작입니다.
빅뱅 탑뇽 팬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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