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는 늘 문제적이다. 불륜의 당사자로 언론에 오르내리기 이전부터, 홍상수라는 사람과 그가 만드는 영화는 우리가 일상에서 편하게 접할 수 있는 그런 일반적인 영화의 문법과는 많이 달랐다. 그래서 아무 생각 없이 보면 이게 뭔가, 싶은 부분이 많다. 그렇다 보니 이런 복잡한 이야기에 질려버리는 이들이 많다. 혹자는 말한다.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은 지질해서 보기가 싫다고. 하지만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홍상수의 영화들을 변호해주고 싶은 욕망을 감출 수가 없다.

특명,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오력'하라

보기가 싫다, 라는 말은 해석하기에 따라 다르지만, 나는 '이해해주고 싶지 않다'라는 의도로 읽힌다. 재미있는 것은, 홍상수의 영화는 서로를 이해하는 데에 에너지를 쏟아붓지만 결국 실패하거나, 포기하거나, 시지프스가 바위를 끊임없이 굴리듯 무한히 시도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선희를 이해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한다. 당사자에게 와닿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언어의 홍수.

선희를 이해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한다. 당사자에게 와닿지 못하고 떠돌아다니는 언어의 홍수. ⓒ (주)영화제작전원사


가장 인상깊게 봤던 작품인 <우리 선희>를 통해 홍상수가 타인을 이해하는 문제를 어떻게 풀어가는지 말해보겠다. 영화 속에서 선희(정유미)는 학교에 오랜만에 들렀다가 교수(김상중), 옛 애인이었던 신인 영화감독 문수(이선균), 선배 감독인 재학(정재영)을 만나게 된다.

선희를 가운데 두고 교수와 문수, 재학은 계속해서 소통을 시도한다. 교수는 선희가 얼마나 잠재력 있는 학생인지에 대해, 문수는 자신이 얼마나 선희를 사랑했는지에 대해, 재학은 얼마나 자신이 선희를 아끼는지에 대해. 하지만 그들이 선희에 대해 이야기하는 말의 홍수 속에, 정작 선희가 그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야기 할 기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얼마나 숨이 턱턱 막히는 순간인가. 자기가 타인에 의해 규정되고 있는데 모두 쓸모없는 언어에 불과하다면.

재밌는 것은, 선희를 향한 세 남자의 인생에 대한 충고와 애정 표출은 진심이라는 점이다. 그 진심이 선희한테 와 닿지 않았고 그래서 원활한 의사소통에 실패했다는게 문제다. 의사소통에 실패한 관계는 또 있다. 학교로 돌아온 선희와 헤어지고 문수는 재학을 만나러 간다. 하지만 재학은 문수를 탐탁지 않게 여긴다. 이유가 무엇이든 문수는 그 탐탁지 않음을 눈치채지 못한다. 술집으로 이동한 둘은 선희에 대해 이야기한다. 둘의 대화에서 엇갈리지 않는 지점은 오로지 둘 다 선희에 대해 애정이 있다는 것 뿐이다. 재학은 문수가 아직도 선희를 잊지 못하고 더 나은 관계를 만들어 가려하는 것을 비난한다.

 의사소통이 실패한 사람들이 모여서 의사소통에 실패했음을 만천하에 알리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모르는 상황이란. 관객에게 얼마나 폭소를 자아낼까.

의사소통이 실패한 사람들이 모여서 의사소통에 실패했음을 만천하에 알리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모르는 상황이란. 관객에게 얼마나 폭소를 자아낼까. ⓒ (주)영화제작전원사


<우리 선희>의 백미는 세 사람이 (말 그대로) 우연히 만나는 마지막 장면이다. 나는 이 장면을 '의사소통이 실패한 사람들이 모여서 의사소통에 실패했음을 만천하에 알리지만 정작 당사자들은 모르는' 장면으로 규정한다. 보통 아이러니란 극중 인물은 모르고 관객들만 아는 그런 상황에 발생하지 않나. 각자 선희를 만나러 왔지만 상대방이 여기 올 줄 모르고 삼자대면 한 상황. 선희는 어디에 있을까. 시선을 회피해 보지만 영화는 거기에서 끝이 난다.

이렇듯 <우리 선희>와 같이 홍상수의 영화는 의사소통에 실패한 상황 혹은 실패한줄 모르고 계속 시도하는 상황을 통해 웃음을 자아내곤 한다.

변화하는 상황, 변화하는 인간관계

 영화에서는 ‘소설’이라는 술집에 여러번 간다. 그런데 그것이 ‘또’ 방문하는 것인지, 어떤 방문은 꿈에 불과한건지, 아니면 첫 방문을 다르게 보여주는 것인지는, 작품은 말해주지 않는다. 인물도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영화에서는 ‘소설’이라는 술집에 여러번 간다. 그런데 그것이 ‘또’ 방문하는 것인지, 어떤 방문은 꿈에 불과한건지, 아니면 첫 방문을 다르게 보여주는 것인지는, 작품은 말해주지 않는다. 인물도 그것에 대해서는 말하고 있지 않다. ⓒ (주)영화사조제


홍상수 영화의 또 다른 매력은 똑같은 혹은 비슷한 상황의 어떤 지점을 다르게 변주하여 인물들의 상황 대처를 보는 재미에 있다. <북촌 방향>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 모두 그렇다. 예를 들어 <북촌방향>은 시간의 순서를 붕괴시킨다. 어느 사건이 다른 사건에 선행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영화에서 인물들은 '소설'이라는 술집에 여러번 간다. 그런데 그것이 '또' 방문하는 것인지, 첫 방문인지, 꿈에 불과한 건지 알 수 없다.

항상 이런 반복되는 이미지에 대해 홍 감독은 흥미롭게도 '그것은 알 수 없고 말해져서는 안 된다'라는 식으로 인터뷰에서 말하곤 했다. 중요한 것은 그 반복되는 이미지가 다르게 변주되곤 한다는 것이다. 복잡한 게 아니라 그냥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주인공 성준(유준상)은 술집 주인과 여러번 뭔가 간식거리를 사러 같이 가는데, 어떤 장면에서는 서로 키스를 한다. 그리고 사랑에 빠진다. 또 어떤 장면에서는 아무 일도 아무 화학작용도 일어나지 않는다.

 저 여자는 민정인가? 아니면 민정을 닮은 여자인가? 늘 그렇듯 우리가 궁금해 할 만한 것들을 홍상수는 답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은 중요한게 아니다'라는 속삭임을 건넨다.

저 여자는 민정인가? 아니면 민정을 닮은 여자인가? 늘 그렇듯 우리가 궁금해 할 만한 것들을 홍상수는 답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것은 중요한게 아니다'라는 속삭임을 건넨다. ⓒ (주)영화제작전원사, 콘텐츠판다


홍상수의 이런 너저분한(?) 영화기법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에게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은 물음표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영수(김주혁)의 애인 민정(이유영) 혹은 민정을 닮은 여자들이 몇 명의 남자들과 '의사소통'을 하는데 영화는 그 여자들이 다른 사람인지(배우 이유영이 1인 다역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민정 한 명인지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그 여인은 마지막에 가서는 영수와 사랑에 빠진다.

음? 정말이다. 말 그대로 마치 처음만난 것 처럼 - '마치'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다. 진짜 처음 만났을 수도 있다. 그건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는다. - 사랑에 빠져서 섹스를 한다. 처음 만난 사이인 것처럼 행동하는 영수를 보면서 아마 관객들은 더 '멘붕'에 빠질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렇듯 내가 홍상수 영화를 덕질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인간관계는 복잡다단하며, 우리는 그 다양한 관계를 이어나가기 위해 실패하더라도 계속 의사소통을 시도해 나가야 한다는 주제의식을 던져주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그가 나와 다른 '타자'라는 것을 이해하고, 미묘하게 달라지는 상황에서 어떤 행동이 어떤 결과를 낳게 될지에 대해 상상력을 펼쳐야 한다는 것이다. 이해에 도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은 의미가 없다. 이해에 도달할 수 있도록 끊임없이 시도해야 한다는 점만이 중요하다.

덧붙이는 글 '내 안의 덕후' 응모글입니다
#홍상수 #인간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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