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출연자들에 대한 처우는 특정 드라마에 국한되지 않는다. 보조출연자의 근무 환경 개선을 생각해보고자 작성한 기사가 그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어, 드라마 제목과 촬영일시 등을 밝히지 않았다. [편집자말]
오전 12시. 방송국 앞에 수상한 남녀가 삼삼오오 모여든다. 등산복으로 무장했지만, 등산객은 아니다. 남들이 퇴근하고도, 술 한 잔 걸치고 집으로 돌아갈 시간에 드라마 촬영장으로 출근하는 보조출연자들이다.

한 사극 촬영장으로 향하는 45인승 버스는 사람들을 가득 채우고 새벽 1시가 되어서야 출발했다. 세트가 주로 지방에 있는 사극은 자정이 다 되어서, 혹은 이른 새벽에 움직여야 한다. 해가 뜨자마자 낮 신을 최대한 찍어 놓기 위해서다.

옆 좌석에 앉은 교복 입은 여자 아이는 17살이었다. 연기자가 되고 싶어 학교에서 연극부 활동을 하고 있다는 A양은 수업이 끝나자마자 달려왔다고 했다. 이외에 여자는 대개 20~30대, 남자는 40대 이상으로 보이는 중년이 대부분이었다.

 한 사극에 출연하기 위해 나인으로 분장한 여성 보조출연자들. 각각 17살, 20살인 그들은 연기자가 되기 위한 경험을 위해 혹은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한 사극에 출연하기 위해 나인으로 분장한 여성 보조출연자들. 각각 17살, 20살인 그들은 연기자가 되기 위한 경험을 위해 혹은 대학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이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다. ⓒ 이현진


대본에는 없는 역할 'A팀 나인'이 되다

이제부터는 쪽잠의 연속이다. 버스로 이동하며 눈을 붙이고, 촬영장에 도착하면 잠시 분장실에 몸을 누인다. 베테랑들은 준비물부터 다르다. 바닥과 화장대에 가져온 담요를 깔고 눕거나, 목 베개를 하고 앉아서 잠을 청한다. 사람들이 차지하고 남은 화장대 공간을 보니 딱 상체만 뉘일 자리가 있어서, 마치 고행을 하듯 'ㄱ'자로 꺾인 채 눈을 감았다.    

별안간의 불빛과 고함소리에 선잠을 깨니 새벽 5시. 보조출연자를 관리하는 반장이 출연자들을 세워 놓고 배역을 정한다. 눈을 부비고 있는데, 'A팀 나인'이라는 역할이 주어졌다. 얼굴에 연륜이 느껴지는 순으로, 연두색 저고리와 초록색 저고리를 입은 상궁으로 분한다. 이제는 머리를 하러 갈 차례다.

젤을 바른 머리가 순식간에 정확히 5:5로 나뉘자 '머리빨'에 숨겨져 있던 얼굴이 진면목을 드러냈다. 신체부위 중 이마가 부끄러워본 건 처음. 이건 나인이라기보다, 황비홍이다. 새삼 앞머리가 허용되는 시대에 태어난 것에 감사했다. A양이 어머니에게 빌려온 아이브로우 펜슬로 앙드레김 선생님처럼 이마를 메워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촬영장 내 계급, 연예인-스태프-보조출연자

해가 뜨자마자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사극에서 여성 보조출연자들이 하는 일이란 대개 '읍'. 두 손을 가지런히 앞으로 모으고 허리를 굽히는 인사인데, 고개를 너무 숙이지 않고 엉덩이만 뒤로 빼는 것이 중요하다. 윗사람의 뒤를 따를 때도, 가만히 있을 때도 항상 '읍' 상태다 보니, 하루 종일 엉덩이만 혼신의 연기를 펼쳤다.

그런데 맙소사, 예전에 인터뷰 했던 배우와 같은 신을 촬영하게 됐다. 5:5 가르마가 빚어낸 망측한 몰골 덕분(?)인지 그 배우는 날 알아보지 못하는 듯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걱정에 감독의 '컷' 사인 후에도 '읍' 상태를 유지해야 했다. 

'읍'이라는 자세는 마치 보조출연자들의 촬영장 내 지위를 표현하고 있는 듯했다. 얼굴을 익힌 출연자들과 지시를 기다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난데없이 "놀러왔냐, XX들아!"라고 상욕이 날아들었다. 반말은 기본이요, 잦은 윽박지름은 보조출연 관리자들이 군기를 잡기 위한 일종의 관례처럼 보였다.

 새벽 6시 촬영을 위해 세트장으로 향하는 보조출연자들.

새벽 6시 촬영을 위해 세트장으로 향하는 보조출연자들. ⓒ 이현진


그도 그럴 것이, 촬영장에서는 속삭이는 소리도 녹음이 돼서 NG가 난다. 연기를 하는 사람도, 카메라와 마이크를 들고 있는 사람도 동시에 움직여야 하는 일의 특성상 한 명만 삐끗해도 모든 사람이 똑같은 일을 다시 반복해야 한다.

문제는 형량이 다르다는 것. 배우가 실수하면 '컨디션 난조'지만, 보조출연자가 실수하면 '죽을 죄'가 된다. 보조출연 아르바이트만 열 번째라는 B양(20)은 "드라마마다 온도차가 있지만, 대개 우리가 조금이라도 잘못을 하면 촬영장의 모든 사람이 째려본다"며 "그럴 땐 대역죄인이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계급이 있어요. 연예인, 스태프, 그리고 보조출연자 순이에요. 촬영장이 엄격한 건 이해하지만, 하대하는 건 좋을 리 없죠."

가장 중요한 미션, 'LTE급으로 밥 먹기'

밤 12시에 모여서 낮 12시가 다 되어 갈 때까지 한 끼도 먹지 못했다. "배고프다"는 토로는 "여기 스태프들 다 굶고 있다"는 핀잔으로 '퉁'쳐졌다. 배를 곯으니 날이 더 춥게 느껴졌다. 등산양말에 버선까지 신었는데도 칼날같이 뚫고 들어오는 냉기 때문에 꽁꽁 언 발을 군불에 녹였다. 이를 보고, 연배가 있는 남성 보조출연자들이 오며가며 걱정을 한 무더기씩 던졌다.

"치마 타지 않게 조심해. 구멍 나면 물어줘야 해. 추워도 목도리 두르지 마. 괜히 머리 망가뜨려서 잔소리 듣지 말고."   

 보조출연자들의 일 중 팔 할은 '대기'다. 연기자 위주로 화면을 잡는 바스트샷이 끝나고 다음 신으로 넘어갈 때까지 기다린다.

보조출연자들의 일 중 팔 할은 '대기'다. 연기자 위주로 화면을 잡는 바스트샷이 끝나고 다음 신으로 넘어갈 때까지 기다린다. ⓒ 이현진


한쪽에서는 배우가 '계란을 부치면서 실패를 거듭하는 장면'으로 몇 시간째 열연 중이었다. 그 신이 끝날 때까지 대기해야 하는 보조출연자들은 하필 "될 때까지 부치겠다"는 대사를 골백번 들으며, "계란 한 판 다 쓰겠네" "그 계란 버리지 말고 나나 주지"라고 푸념했다. 한 스태프가 군불에 넣어놓은 고구마 하나만 응시한 채 점심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다.

시장이 반찬이었던 점심을 'LTE급' 속도로 들이켰는데도 굼뜨다고 한소리 들었다. 밥 한 그릇에 어묵 한 꼬치까지 먹을 여유가 있었던 그날은 그나마 이례적인 모양이었다. C양은 "밥을 막 뜨고 있는데 나오라고 해서 한 숟갈도 못 먹은 적이 있다"며 "밥은 무조건 빨리 먹는 게 좋다"고 노하우를 일러줬다.

드라마 완성하는 보조출연자, 소품이 아니라 사람

오후 4시 반이 지나서야 일이 끝났다. 밤 신 촬영에 지원한 보조출연자들을 남겨 두고 버스에 몸을 실었다.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곯아떨어져 어떻게 서울까지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출발한지 18시간 만에 떠났던 자리로 돌아왔다. 엉덩이와 허리의 열연으로 삭신이 쑤셨다.

사실 한 장면에서 가장 바삐 움직이는 건 보조출연자다. 포커스는 배우에 맞춰져 있지만, 그 뒤에서 보조출연자들 역시 자연스러운 배경을 만들어내느라 쉴 새가 없다. 배우가 대사 한 마디를 하는 동안 쌀 짐을 나르는 역할을 맡은 한 남성 보조출연자는 스탠바이 중에도 쌀 짐을 이고 있느라 오만상을 하고 있었다.

앞으로 배우들을 인터뷰할 일이 걱정이다. "사극 톤이 어려워서 힘들었어요"라는 말에 가소로운 표정을 흘리게 될까봐. 배우는 한 신을 찍고 빠지지만, 보조출연자는 하루 종일 '5분대기조'다. 하지만 드라마를 완성하는 건, 포커스 밖에 있는 그들의 명연기라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들은 소품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걸. 촬영이 끝난 다음날, 통장에는 5만원이 입금돼 있었다.    


드라마 보조출연자 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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