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일 방송된 MBC <시사매거진 2580>의 한 장면

28일 방송된 MBC <시사매거진 2580>의 한 장면 ⓒ MBC


"인혁당 사건에 대해 두 가지 팩트가 존재합니다. 첫째, 고문에 의해 진술된 내용은 증거의 효력이 없어서 무죄라는 것입니다.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혁당 관련자들이 당시의 법을 무시하고 친북 활동을 한 것 또한 사실이라는 주장입니다."

MBC의 대표적인 시사 프로그램인 <시사매거진 2580>(이하 <2580>)을 총괄하고 있는 부장급 인사가 프로그램에서 영화 <유신의 추억> 관련 사건 피해자의 인터뷰를 삭제한 것을 두고 사내게시판에 직접 입장을 밝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역사 인식의 부족을 고스란히 드러내 파문이 일 것으로 보인다.

<2580>을 담당하고 있는 심원택 시사제작 2부장은 31일 MBC 사내게시판에 '민실위(민주방송실천위원회의 줄임말-기자 주) 보고서에 대한 제 견해'라는 제목의 글을 게재했다. 같은 날 전국언론노동조합 MBC본부(이하 MBC 노조)에서 '<2580>의 아이템 선정과 기사 작성 과정에서 탄압이 있다'는 내용의 민실위 보고서를 발간한 데 따른 것이다.

해당 글에서 심 부장은 보고서 내용을 인용하며 이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정치적 의도를 갖고 있거나 갖고 있는 것으로 의심받을 수 있는 기사를 작성하는 후배 기자들을 나무라는 것은 선배로서 그리고 데스크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는 주장도 함께다.

<유신의 추억> 이야기하며 "인혁당 관련자, 친북활동한 것도 사실"?

 12일 오후 여의도 새누리당사앞에서 열린 '인혁당재건위사건 '사법살인' 부정하는 박근혜 규탄 기자회견'에서 유가족들이 희생자 8명(여정남, 하재완, 이수병, 송상진, 김용원, 우홍선, 서도원, 도예종)의 영정사진을 들고 나왔다.

2차 인혁당 사건, 이른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의 희생자 8명(여정남, 하재완, 이수병, 송상진, 김용원, 우홍선, 서도원, 도예종)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권우성


그런데 이 글에서 사실과 다른 부분이 발견됐다. 이정황 감독의 영화 <유신의 추억>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유신정권을 선포한 뒤 달라졌던 사회상을 다룬 다큐멘터리다. 이 영화는 지난 23일 서울시청 앞 광장과 국회에서 각각 시사회를 열기도 했다.

이를 두고 사내게시판에 올린 글에서 심 부장은 "인혁당 사건에 대해 두 가지 팩트가 존재한다"며 "첫째는 고문에 의해 진술된 내용은 증거의 효력이 없어서 무죄라는 것이고, 둘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혁당 관련자들이 당시의 법을 무시하고 친북활동을 한 것 또한 사실이라는 주장이다"라고 밝혔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일단 영화 <유신의 추억>에서 언급된 '인혁당 사건'이 무엇인지부터 알 필요가 있다. 1974년 '긴급조치 4호' 하에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이 불법단체로 규정되고, 이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민혁명당(인혁당) 재건위 조직이 민청학련의 배후에서 학생시위를 조종하고 체제전복을 기도했다"는 중앙정보부의 수사결과가 발표됐다. 이 결과 1975년 인혁당 관련자 7명과 민청학련 관련자 1명이 대법원 판결이 떨어진 지 채 하루도 안 돼 사형을 당했다. 이를 '2차 인혁당 사건', 또는 '인혁당 재건위 사건'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사건은 유신정권에서 조작된 것이라는 논란에 휩싸였다. 결국, 사건 발생 27년 만인 2002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 진상 규명위원회가 조사에 나섰고, 2005년에는 국가정보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가 재조사했다. 그 결과 '민주화운동 탄압을 위해 당시 중앙정보부가 고문과 증거 조작을 통해 만들어낸 사건'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2007년 피해자 유가족 등이 제기한 재심에서 서울중앙지법이 무죄 판결을 내리고 국가에 피해보상을 명령한 것도 이 결과에 근거한 것이다. 국제법학자협회 역시 관련자들의 사형이 집행된 4월 9일을 '사법 암흑의 날'로 선포하기도 했다. 때문에, 이 사건이 단순히 '고문에 의한 진술이 효력이 없'기 때문에 무죄라는 것은 일부 용인할 수 있으나 완전한 사실은 아니다. 더욱이 '관련자들이 친북활동을 했다'는 심 부장의 주장은 "팩트"라고 보기에는 힘들다.

"MBC 간판 시사프로그램 책임자가 이렇게 현대사에 무지할 수 있나"

 12일 오후 여의도 새누리당사앞에서 열린 '인혁당재건위사건 '사법살인' 부정하는 박근혜 규탄 기자회견'에서 고 송상진씨 부인 김진생씨, 고 김용원씨 부인 유승옥씨, 고 우홍선씨 부인 강순희씨가 남편의 영정사진을 들고 회견장으로 향하고 있다.

지난 9월 12일 여의도 새누리당사앞에서 열린 '인혁당재건위사건 '사법살인' 부정하는 박근혜 규탄 기자회견'에서 고 송상진씨 부인 김진생씨, 고 김용원씨 부인 유승옥씨, 고 우홍선씨 부인 강순희씨가 남편의 영정사진을 들고 회견장으로 향하고 있다.(<오마이뉴스> 자료사진) ⓒ 권우성


그렇다면 심원택 부장의 이 같은 발언은 어떤 배경에서 나온 것인가? 지난 9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 역시 2차 인혁당 사건을 두고 "두 개의 판결이 있다"며 "그 조직에 몸담았던 분들이 최근 여러 증언을 하고 있다"고 말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후 이 발언에 대한 공식적으로 사과한 박근혜 후보가 1차 인혁당 사건과 2차 인혁당 사건을 혼동해 일어난 일이라는 해석이 있었다.

박근혜 후보가 발언해 사과까지 한 '인혁당 사건'에 대해 <2580> 심 부장은 '친북활동 단체'라고 규정하고 있는 셈이다. 1차 인혁당 사건은 2차 인혁당 사건보다 10년 앞서 일어난 것으로, 당시 중앙정보부가 대학생 40여 명을 구속하고 10여명을 지명 수배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를 두고 현재 몇몇 관련자들이 "이 사건은 조작이 아니었다"는 증언을 내놓고 있어, 당시 '친북활동'이 있었는지의 여부를 명확히 가릴 수 없다는 의견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영방송사의 부장급 인사, 특히 시사 프로그램을 만드는 인물이 스스로 현대사에 대한 이해 부족을 드러냈다는 점에서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한 MBC 관계자는 "MBC의 간판 시사프로그램이라 할 수 있는 <2580>의 책임자가 이렇게 현대사에 무지할 수 있나"라며 "더욱이 이런 상태에서 이런 글을 사내게시판에 올렸다는 점도 개탄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그런 이들이 보직을 차지하고 있는 게 현재 MBC의 현실"이라고 말한 이 관계자는 "그러니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도 나오는 것이 아니겠느냐"며 씁쓸해 했다.

영화 <유신의 추억> 제작사인 M2픽쳐스의 김학민 대표도 "소식을 전해 들었다"며 "역사적으로도 평가됐고, 사법부에서도 오랜 시간 재심을 통해 무죄라는 판단을 내린 건데, 사법부의 판결을 완전히 무시한 처사"라고 비판했다. 이어 김 대표는 2차 인혁당 사건을 두고 "그 사건 이야기를 (피해자 유족들에게) 다시 꺼내기도 송구할 정도"이라며 "아무런 근거가 없는 이야기를 그렇게 무책임하게 이야기할 수 있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또 김 대표는 "술자리에서 장삼이사가 잘 알지도 못하는 걸 이야기하는 것과, 공영방송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말한 게 같을 수 있나"라며 "단순히 1차 인혁당 사건과 2차 인혁당 사건을 오인한 것이 아니라, 정말 2차 인혁당 사건을 두고도 그렇게 생각을 하는 건 아닌가 싶을 정도"라고 덧붙였다.

한편 본지는 이에 대한 심원택 부장 본인의 설명을 듣기 위해 연락을 시도했으나, 심 부장은 "<오마이뉴스> 기자가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는지 모르겠다"며 "앞으로 나에게 전화하지 말아라"는 말만 남기고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었다.

시사매거진 2580 MBC 인혁당 박정희 유신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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