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상했던 대로였다. 그들은 그렇게 변화되어 있었다. 그리고 변화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소수민족! 말 그대로 하자면 아주 소수를 차지하는 부족 또는 원주민이지만 적어도 그 지역에서 혹은 그 나라에서 소수민족 문제는 소수의 문제가 아니라 아주 중요한 문제임도 확인할 수 있었다.
 관광객들에게 자신들의 춤을 선보이고 있는 목긴 카렌족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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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다섯 살 먹은 꼬마 여자아이들부터 열 일곱 여덟 먹은 다 큰 처녀애들까지 한데 어우러져 처음 보는 춤사위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만의 전통 춤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춤사위는 잘 다듬어지지도 않은 듯 했고, 서로간의 호흡이나 발 동작, 손동작도 일치하지 않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 부족에서 내려오는 한가지 춤임은 확실했다. 그리고 그들이 춤을 추는 주위로는 그들 부족이 아닌 잘 차려 입은 외지인들이 빙 둘러 서 있었다. 잠시 음악이 끊어질 때마다 빙 둘러 선 외지인들은 연신 박수를 쳐 댔다. 이들이 춤을 맞추고 있는 음악은 한 무리의 남자들에 의해 연주되고 있었다. 이상한 북과 처음 보는 피리가 보였고 그 중에는 아주 익숙한 악기도 있었다. 우리로서는 단돈 몇 만원만 주면 구할 수 있는 기타였다. 기타를 구할 돈이 없었던 것인지, 통나무를 깎고 거기에 낚싯줄을 걸어 기타와 거의 비슷하게 만든 악기였다. 분명 그것은 그들의 전통악기는 아니었다. 서양의 기타였다. 춤을 추고 있는 아녀자들의 얼굴에도 이들 악기를 연주하는 남자들 얼굴에도 해맑은 웃음은 없었다. 악기를 연주하는 남자들의 입은 오히려 굳어 보였다. 음악이 잦아들고 춤이 끝나자 외지인들은 약간의 돈을 남자 악사들에게 건넸다. 물론 돈을 내지 않는 외지인들도 있었다. 돈은 남자 악사들에게 건넸지만 당연히 그 돈은 외지인들에게 춤을 보여준 그들 모두를 위한 돈이었을 것이다. 춤이 끝나고 팁이 건네지는 광경을 바라보는 나는 유쾌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글펐다. 아녀자들의 목을 길게 늘리고 있는 구리 링들과 무표정한 아녀자들의 얼굴, 굳게 다물어진 야무진 남자들의 입모습 등이 머리 속에 겹쳐지면서 나는 무엇을 확인하러 무엇을 얻기 위하여 이 먼 곳 태국 북부까지 왔던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들은 바로 카렌족이었다. 목긴 카렌족! 10월 달 한 2주간 프로그램 촬영차 태국 북부 치앙마이, 치앙라이를 다녀왔다. 태국의 '치앙마이 치앙라이'라고 하면 우리에게는 아직도 오지이거나 문명보다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지를 직접 가보니 그 또한 이제는 옛말이 되었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다. 어차피 사원이니 골든 트라이앵글이니 하는 관광지들은 옛이름 옛모습 그대로였지만 적어도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은 옛모습이 아닌 듯 했다. 그리고 그들의 그러한 변화가 잘된 일이라고 해야 할 지 의문이 들었다. 태국 북방도시 치앙마이, 치앙라이 치앙마이는 일명 북방의 장미 혹은 방콕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방콕 다음 가는 태국 제2의 도시이다. 그리고 치앙라이는 치앙마이에서 차로 2-3시간 정도 더 북쪽으로 더 올라가는 우리나라 읍정도의 도시이다. 두 도시가 똑같이 치앙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어 마치 쌍둥이 도시 같지만 사실 치앙이라는 접두사는 도시를 의미하는 말일뿐이고 두 도시는 별개의 도시이며, 규모 면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다. 치앙이라는 이름을 단 도시는 이들 두 도시 이외에도 치앙센이니 하는 도시들이 더 있다. 다만 우리가 태국 북부 여행을 언급할 때 두 도시를 예로 드는 것은 태국 북부 최대의 두 도시이기 때문이다.
 태국 제2의 도시 치앙마이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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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두 도시 치앙마이와 치앙라이는 한가지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바로 12세초 북부지역을 통치하던 란나 왕국의 수도였다는 것이다. 현재의 태국은 옛날 중국 남부로부터 기름진 땅과 강, 계곡을 찾아 남하한 사람들이 만든 국가이다. 당시 중국 남부의 크메르, 몬족, 타이족 등이 남하를 하여 현재의 태국 땅에 정착하게 되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일찍 대제국을 형성한 것은 바로 크메르족, 이들 크메르족과 별개로 타이족들은 북쪽의 란나, 파야오, 수코타이 등의 공국을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1238년에 타이족들이 크메르 영주에 대항하여 타이족 최초의 독립왕국인 수코타이를 세우게 되었으며 수코타이 왕국이 오늘날 태국으로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나오는 타이족의 란나 왕국이 바로 이 두 도시 치앙라이와 치앙마이를 근거지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란나 왕국은 먼저 치앙라이를 수도로 삶고 있다가 약간 남하여 치앙마이로 수도를 천도했다고 한다. 그러한 천도의 과정을 에메랄드 불상의 흔적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현재 방콕에 있는 태국 왕궁사원에 모셔져 있는 에메랄드 불상은 원래 란나 왕국의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 에메랄드 불상이 치앙라이에 있었으며, 천도와 함께 치앙마이로 옮겨왔다가 란나왕국이 수코타이왕국에 조공으로 이 불상을 바치면서 현재의 방콕으로 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물론 진품 에메랄드 불상은 방콕 왕궁사원에 있지만 지금도 치앙라이와 치앙마이에는 진품 에메랄드 불상을 그대로 본떠서 만든 두개의 불상을 각각 모시고 있다. 치앙라이 왓프라께오 사원에 그리고 치앙마이의 도이스텝에 가면 똑같이 생긴 청록빛의 불상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태국 제2의 도시 혹은 옛날 한 왕조의 오래 된 수도가 있는 이 지역이 우리에게 또 다른 익숙한 이름으로 다가오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이유에서인 듯 하다. 화석화 된 인간, 화석화 된 원시의 자연을 찾아서 두 도시 치앙마이와 치앙라이에서는 옛 란나 왕국의 화려한 유적들을 만날 수 있다. 더불어 오늘날에도 게 중에 번성하고 있는 도시가 바로 이들 두 도시라고 할 수 있다. 이들 도시에는 화려한 현대문명과 대중문화들을 범람하고 있지만 차를 타고 한 두 시간만 도시 외곽으로 나가면 도심과는 도저히 어울리지 않는 원시의 자연과 문명과는 거리가 먼 또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최대의 매력인 듯 하다. 바로 북부 고산지대와 소수 민족들의 존재다. 그래서 태국 북부지역을 남달리 선호하는 유럽인들에게 이 두 도시는 사실 고산족을 만나보는 트래킹의 명소이다. 언제부터 이 지역과 이곳의 사람들이 우리에게 소개되기 시작했는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나의 기억으로는 한 10년 정도 된 것 같다. 그 와중에 트래킹의 명소로 급부상한 것은 아마 방송의 영향력이었던 것 같다. 5-6년 전부터 국내 지상파들이 오지체험 프로그램 혹은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이 지역의 소수민족 즉 고산족들을 소개하면서 치앙마이, 치앙라이하면 소수민족이 많이 사는 곳으로 알려졌고, 그와 더불어 오지여행 혹은 트래킹 여행이 붐을 이루게 된 것 같다.
 야오족의 전통복장을 한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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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치앙마이, 치앙라이 등 태국 북부지역을 처음 알게 되고 그 곳의 사람들 소수민족을 알게 된 것도 사실 방송 다큐멘터리를 통해서였다. 다큐멘터리라는 영상장르에서 이들 소수민족과 원시 자연은 당연히 매력적인 피사체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명화되고 현대화 된 우리들의 과거모습을 이들의 모습을 통해 엿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바로 이들은 화석화 된 인간, 화석화 된 자연인 것이다. 여행에서 이 지역 트래킹 상품이 인기를 끄는 것도 아마 다큐멘터리가 이 지역을 매력적으로 생각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화석화된 인류를 찾아가려는 것일까? 그것은 아마 자기 반성과 대안을 위한 것일 것이다. 인류가 이루어낸 찬란한 문명이 어느 시점을 넘어 서면서 반대로 인류를 파멸로 이끌고 있지 않나 하는 인류의 자기 반성과 대안 모색이 이들을 찾아 나서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현실의 고산족 -마약 재배자 하지만 이제는 그런 여행이 힘들게 되어 버린 것 같다. 서울에서 방콕을 경유해 도착한 치앙라이 공항에서 한시간 정도 차로 달려갔더니 소수민족을 만날 수 있었다. 촬영팀이 만나 본 소수민족은 치앙라이 인근 지역에서 아카족, 야오족, 카렌족, 라후족 네 종족, 그리고 치앙마이 인근 지역에서 리소족과 메오족 두 종족 총 6종족이었다. 이들 여섯 종족은 사실 이곳의 주요 6대 고산족이다. 이들 이외에도 타이야이족, 진허족, 흐멍족 등 몇몇 고산족이 더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마디로 그들의 삶의 모습은 내가 상상하고 있던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들을 만나기 전에 내가 상상하고 있는 소수민족의 삶이란 고산지대에 고립된 채로 살아가면서 문명의 어떤 이기(利器)도 거부하며 그들만의 삶의 방식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부싯돌로 불을 피우고, 대나무 창과 활로 들판과 산을 뛰어 다니면서 사냥을 하고, 원시적인 형태의 농사를 지으면서, 그리고 가족사회의 기반 위에서 대가족 혹은 부족사회를 유지해 나가는 그런 사회, 그러면서도 자연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지속 가능한 개발’의 논리를 철저히 실천해 가는 사회가 내가 상상한 고산족의 삶이었다. 하지만 이들 6부족을 직접 만나보고 나서는 과연 아직도 그런 소수민족이 있을까 하고 의심을 해 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삶은 철저히 변해 있었다.
 미얀마,라오스,태국의 국경을 이루는 메콩강 골든트라이앵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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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 삶에서 가장 큰 변화 혹은 문제는 단연코 마약일 듯 하다. 골든 트라이앵글이 우리에게 더욱 유명해 진 것도 사실 삼국의 접경이라는 단순한 이유보다는 마약 밀매 조직‘쿤사’의 주요 근거지였기 때문이었다. 이 지역 소수 민족들은 사실 쿤사의 하부 농장 노릇을 해 왔었다. 물론 지금은 태국 쪽 소수 민족들은 마약재배가 줄어들었지만 미얀마나 라오스 쪽 고산족들은 여전히 많은 양의 마약을 재배하고 있다고 한다. 골든 트라이앵글의 태국 쪽 즉 치앙센에서 1박을 하는 날 산중턱에 건설중인 하얀 건물 앞을 지나친 적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태국 정부가 짓고 있다는 마약 박물관이었다. 박물관 건립의 취지가 뭔지는 의아했지만 그곳에 박물관이 지어지고 있는 이유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질 필요가 없을 듯 했다. 그만큼 마약 재배와 유통이 고산족의 주요 근거지 골든 트라이 앵글을 중심으로 이루어 졌다는 것이다.
 메오족 마을에서 기르고 있는 양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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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소수민족이 마약의 원료가 되는 양귀비나 대마를 재배한 것은 지금 같은 대량 유통을 위한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이 패권주의를 내세우는 미국의 농간으로 마약 조직 쿤사가 급성장하고 그들의 급성장은 결국 고산족을 오늘날과 같은 마약조직의 최하부 조직으로 전락하게 만든 것이다. 실제로 치앙마이 근처 도이스텝(산)을 지나 30,40분 정도를 더 차로 달려간 메오족 마을에서는 직접 양귀비와 대마가 자라고 있는 것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물론 실제 마약원료 공급을 위한 것이 아니라 마약을 재배했었다는 사실조차 관광거리화 시키기 위해 전시용으로 심어 놓은 식물들이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고산족의 삶에서 대마나 양귀비의 재배가 엄청나게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것을 짐작케 해주는 광경이었다. 쿤사와 이 지역이 마약 재배지로 악명을 떨치게 된 과정에 대해 조금 더 이야기하자면 이들 소수 민족 또한 급변했던 세계정세 속의 희생물이었음을 알게 된다. 골든 트라이앵글의 마약왕 쿤사 또한 미얀마의 소수민족 샨족 출신이었으며 쿤사의 조직 즉 샨족 연합군이 마약거래의 핵심세력이 된 것도 강대국과 미얀마 정부의 묵인이 있어서 가능했던 것이라고 한다. 아편의 역사는 그리스까지 그 역사가 거슬러 올라가는데 이것이 아랍 상인에 의해 13C초 중국으로 들어왔다. 국가에 낼 세금이나 물건을 사기 위해 재배를 시작했고 1940년대 중국 남쪽에서 아편을 재배하며 살던 소수민족들이 정치적 불안으로 태국이나 라오스, 미얀마로 이동을 하면서 이 아편을 가지고 갔다. 이 때만 해도 생산되는 아편의 양은 자급자족이나 생활비를 조달하는 정도였다. 그러던 것이 미얀마와 태국 북부를 장악한 중국 국민당이 아편을 군자금 확보수단으로 사용하면서 대량 재배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당시 공산주의의 급속한 확산에 두려움을 느낀 미국이 공산당을 막는 일이면 어떤 일도 묵인해 주던 분위기가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국민당을 지원하던 미국이 이들의 아편 생산을 묵인한 것이다. 게다가 미얀마의 반정부 게릴라도 아편을 군자금 조달을 위해 아편을 재배하기 시작하였다. 1960년대 이후 인도차이나 반도에 미군들이 주둔하면서 아편의 수요가 급증하였고 그 이후 미국의 CIA가 아편재배와 유통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여 거기서 얻는 수익으로 인도차이나에서 수행되는 군사 행동의 작전비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지금 이 지역의 마약 생산을 문제화하며 마약퇴치를 위해 막대한 인력과 자금을 쏟아 붓고 있는 미국이 결국 마약문제의 근본적인 원인과 확대의 원인을 제공했던 세력이었던 셈이다. 또한 미얀마에서 마약재배가 급격히 늘어난 이유는 1960년대 미얀마 정부군이 자기들을 대신해서 북부지역의 반정부 게릴라군과 싸워주는 세력에게 그 대가로 마약거래를 묵인해 주면서라고 한다. 바로 그 심부름꾼이 쿤사가 이끄는 샨족 연합군이었던 것이다. 고산족이 대규모 마약생산의 최하부 조직이 되면서 그들은 많은 변화를 겪었다. 일단 더 이상 고립된 그들만의 생활이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외부 세계와의 교류는 결국 외부세계의 모방을 유발했을 것이다. 즉 자급자족에 그쳐 있던 그들의 생계수단, 혹은 경제활동이 외부세계와 엇비슷한 삶을 영위하기 위한 활동으로 확대되었을 것이다. 또한 전통적인 자신들의 부족사화를 이탈해 도시로 이주해 자본주의의 최하층 노동자로 전락하는 고산족 인구도 늘어갔을 것이다. 그것은 어찌 보면 불행이었다. 적어도 외부세계 사람들의 생활과 비교해 볼 때 그들의 이전 삶은 비참한 것이라고 스스로들 판단했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외부세계와 계속 단절되어 있었다면 그들의 삶은 불행한 것도 불쌍한 것도 아니었을 것이다. 적어도 불쌍하다는 우리 식의 논리는 비교의 대상이 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때 비교의 대상이란 바로 스스로를 문명화되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이었을 것이다. 다행인지 이번 여행에서 유통을 위한 마약재배를 하는 원주민들을 만날 수는 없었다. 미얀마나 라오스에 비해 태국이 마약 생산과 유통에 대한 규제가 엄중하고 그동안 마약생산과 유통을 근절하기 위해 많은 조치들이 취해졌기 때문이라고 우리와 동행했던 가이드 귀뜸을 해 주었다. 하지만 가이드가 ‘그래도’라면서 단서를 단 것은 태국 북부 어디에선가 고산족들이 여전히 마약을 재배해서 마약조직에 넘기고 있다는 것이었다. 또는 마약 재배를 위해 스스로 국경을 넘어 미얀마나 라오스로 들어가 버린 일부 고산족 마을도 있다고 했다. 마약퇴치를 위한 태국 왕실의 노력-왕비정원 치앙라이 촬영일정 중에서 이들 고산족의 마약재배를 근절하기 위해 애써 왔던 태국 정부 혹은 태국 황실의 선정도 눈으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연중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태국에서 고산지대 위치하고 있어 그나마 시원한 곳에 속하며, 자연환경이 잘 보존되어 있는 지역이 바로 치앙라이와 치앙마이이다. 그러다 보니 이 지역들은 왕실 휴양지로 가장 각광 받는 곳이기도 하다. 많은 왕실 별장이나 부대시설들이 이 두 지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이다. 현 왕의 어머니(우리의 대비)도 말년을 치앙라이 인근에 있는 도이퉁(퉁산)에서 보냈다고 한다. 산 중턱에 그녀가 살았다는 별장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곳에서 남다른 업적을 남겼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왕비의 정원이다.
 왕비정원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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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앙라이에서 메짠을 지나 미얀마와의 국경검문소가 있는 메사이를 향하다 오른쪽으로 난 길로 꺾어 들어가니 도이퉁이라는 산이 나타났다. 굽이굽이 이어지는 도로를 따라 도이퉁을 오르다 보니 대로변에 차들이 즐비하게 주차되어 있고 산중에 여러 건물들이 서 있는 곳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매표소에서 표를 끊어 어디론 가 들어가는 광경을 목격할 수가 있었다. 치앙라이 인근에서 보기 드물게 많은 사람들이 몰리는 관광지였다. 그곳은 바로 왕비의 정원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왕비의 정원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하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그곳에는 크지는 않지만 아기자기한 정원과 원형으로 된 하나의 큰 정원 그리고 비닐 하우스들이 있었다. 물론 아름다웠다. 그리고 꽤 컸다. 그러나 예상했던 것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것이 사실이었다. 일본이나 유럽의 허브 정원에 비한다면 별 것 아닐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지만 그곳을 운영하는 단체 측에서 나온 안내인의 설명을 듣고 나서는 생각도 느낌도 달라졌다. 그곳은 태국 왕실이 왕권이 거의 사라져 버린 현대사회에서 여전히 국민들로부터 열광적인 지지를 받고 통치기반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를 짐작케 하는 곳이기도 했다. 현왕의 어머니인 스리나카린드라가 말년에 이곳에 거주하면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것이 바로 고산족들의 마약재배였다고 한다. 그녀는 고산족들의 마약재배를 근절시키기 위해 유별난 시스템을 개발했다고 한다. 즉 그녀는 정원을 조성하고 그 정원에 필요한 꽃과 식물들을 직접 기르지 않고 즉 인근 고산족들에게 씨앗을 나눠줘 기르게 한 다음 그것을 사들였다는 것이다. 그전까지 마약재배를 해 팔던 고산족들이 마약 대신 꽃을 길러 팔게 된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점은 고산족을 단순한 노무자로 고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영업자 즉 소사장으로 만들어 주었다는 것이다. 이 방식은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래서 그 일대의 고산족들은 마약재배를 더 이상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시스템의 성공은 인근 미얀마에도 알려져 미얀마 정부에서 이곳을 방문해 둘러보고 간 후 똑 같은 시스템을 도입, 추진하고 있을 정도라고 한다. 대비 스리나카린드라가 도이퉁으로 온 것은 미얀마 국경지대인 이곳으로 와 상징적으로라도 태국 북방을 지킨다는 일념으로 생을 마감하기 위해서였다는데 그녀는 그보다 더 값진 일을 일구어 냈던 것이었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예전에 상상 속에 생각했던 그리고 매체를 통해 순수하고 자연적인 존재들로만 비쳐졌던 고산족들의 모습은 분명 잘못 기술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생존을 위해 문명과 오래 전부터 교류를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거기에는 마약이라는 큰 고리가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덧붙이는 글 두 번째 이야기는 고산족의 관광상품화에 대한 것입니다.

이 기사는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www.degadocu.com'에서 제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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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료방송 채널에서 교양다큐멘터리를 주로 연출했, 1998년부터 다큐멘터리 웹진 '드가의 다큐멘터리 이야기'를 운영. 자연다큐멘터리 도시 매미에 대한 9년간의 관찰일기 '매미, 여름 내내 무슨 일이 있었을까' 2016년 공개, 동명의 논픽션 생태동화(2004,사계절출판사)도 출간. 현재 모 방송사에 근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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