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베리우스와 광해군이 만나면 무슨 얘길 나눌까

[로마인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 속 지도자와 한국의 지도자

등록 2007.07.01 10:44수정 2007.07.02 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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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와 광해군. 전혀 다른 시대, 다른 세계에서 한 국가의 수장이 된 그들은 둘 다 동시대인들로부터는 혹평받은 지도자들이었다. 특히 광해군 같은 경우엔 폐위를 당했으니 두말할 것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의 평가는 다르다. 티베리우스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일궈놓은 로마제국의 기반을 단단히 다진 인물로, 광해군은 명나라와 청나라 사이에서 탁월한 외교정책을 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렇다면 왜 이들은 후세에서 칭송받는 업적에도 불구하고 동시대인들로부터 외면받았을까? 과연 이들은 성공한 정치가인가, 아니면 실패자인가?

굴욕과 함께 시작된 치세

서기 14년, 티베리우스는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가 닦아놓은 거대한 로마 제국을 통치하게 되었다.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양자이긴 했어도 혈육은 아니었다. 티베리우스는 아우구스투스의 핏줄인 게르마니쿠스에게 제위를 넘기기 위해 그 사이의 공백을 메워줄 징검다리의 역할이나 다름없었다. 명문 출신이던 티베리우스는 이런 굴욕감 속에서 치세를 시작하였다. 게다가 그는 아우구스투스처럼 실력으로 원로원을 누르고 권력을 잡은 것도 아니어서 권력의 정통성을 얻기가 더욱 힘들었다.

광해군 역시 선조의 적장자가 아니어서 정통성이 없었다. 갑작스레 쳐들어온 왜군들에 밀려 피난길에 오른 선조는 시국이 위태롭다가 보니 왕세자를 정해야 했고, 그래서 형인 임해군보다 평가가 좋았던 광해군을 별다른 논의 과정 없이 파격적으로 왕세자에 책봉하였다. 후에 적자인 영창대군의 출생으로 세자자리를 위협받고, 전란 후 명나라의 인정을 받지 못하는 등 광해군의 왕위 계승에서 적장자가 아니란 사실은 큰 장애가 되었다.

그렇다면 정통성이란 무엇일까? 정통성은 지도자에게 중요하다. 후에 티베리우스의 뒤를 이은 칼리굴라 황제가 부모 양쪽에서 아우구스투스의 피를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지지를 얻은 것만 봐도 지도자의 정통성 문제가 얼마나 중요한지 볼 수 있다. 반정을 일으켜 광해군을 몰아낸 인조 역시 광해군의 폐모살제(廢母殺弟) 등의 악행을 근거로 반정의 정당함을 내세워 정통성을 얻으려 했다. 지도자에겐 자신의 권력 말고도 상대방이 자발적으로 복종할 수 있게끔 하는 권위가 필요한데, 정통성엔 바로 이런 힘이 있다.

티베리우스 즉위 당시 군단에서 봉급인상과 처우개선을 요구하는 반란이 일어난 것도, 명나라가 광해군의 정통성을 문제 삼아 명 사신들이 조선에서 은을 챙겨가는 등의 만행을 저지른 것도, 모두 다 지도자가 정통성이 없음이 약점으로 잡혀서 발생한 문제로 볼 수 있다.

이것을 보면서 때로는 지도자의 능력 이상으로 그를 둘러싼 기반이 어떠한지가 중요하구나란 생각이 들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가들이 명분을 중요시하는 것이 바로 이런 맥락에서 나온 것은 아닐까? 이렇듯 티베리우스와 광해군의 치세는 정통성의 부재라는 약점을 안고 출발하였다. 이들은 선정이라 불릴만한 정책을 베풀지만, 정통성 문제는 후에도 끊임없이 이들을 괴롭힌다.

평화를 중시한 지도자들

똑같이 한 나라의 지도자였다고는 하지만, 티베리우스는 이탈리아 반도 및 지중해 전체를 아울렀던 고대 서양 최대의 제국이었던 로마제국의 황제였고, 광해군은 작은 반도국가인 조선의 왕이었다. 특히 이 당시 조선은 오랜 전란으로 인해 나라는 피폐해지고 민심은 흉흉해져 있었다. 또한 갈수록 위태로워지는 명과 청의 관계 속에서 자칫 잘못하다간 나라의 존속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거기에 비해 티베리우스가 물려받은 로마제국은 아우구스투스의 치세로 어느 정도 기반이 갖춰진 상태였다. 그렇지만 둘 다 후대의 기반을 잡아주는 중요한 전환점에 나라를 맡았다고 본다.

티베리우스와 광해군은 누구보다 평화를 위해 노력했다. 티베리우스는 오랫동안 군단 생활을 하면서 전쟁을 경험했고, 광해군 역시 임진왜란을 겪었다. 비록 티베리우스와 광해군이 겪은 전쟁의 성격과 규모가 다르다 해도, 어떤 전쟁이나 사람이 희생되는 건 마찬가지이다.

무슨 일이든지 그것을 겪어 본 사람과 아닌 사람의 차이는 크다. 이들은 전쟁을 겪어봤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이 크지 않았을까? 전쟁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특히나 전쟁을 겪으며 평화의 중요성을 깨달았기에 티베리우스와 광해군은 때론 냉정해 보이는 정책을 쓰면서 전쟁이 발생하지 않게 하며 평화를 구축하는 데 노력했다.

이들의 외교정책을 보면 수완이 대단하다. 우선 이들은 누구보다도 정보수집에 힘썼다. 그리고 티베리우스는 국경 너머 게르만족과 동방국가들과의 관계에서 무력과 회유를 적절히 사용하며 이들을 대했고, 광해군은 명과 청 사이에서 교묘히 중립외교를 하며 자국에 되도록 피해가 오지 않게끔 하는 등 상황에 따라 적절한 대책을 취하였다. 그래서 티베리우스의 치세 기간에는 별다른 큰 전쟁 없이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고, 광해군의 치세 기간에도 병자호란 같은 불행한 사건 없이 양 대국의 틈바구니에 낀 위기 속에서도 비교적 안정적인 대외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국내 문제에서도 이들은 적절한 대책을 취하였다. 티베리우스와 광해군은 즉위 초 제정 문제에 맞닥뜨렸다. 티베리우스는 재정 재건을 위해 긴축 재정을 실시하였다. 이것이 그의 인기 하락에 한몫하긴 하였지만, 후에 유대인 필로가 티베리우스의 뒤를 잇는 칼리굴라가 즉위할 당시의 로마를 "행복은 문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제 문을 열고 그 행복을 맞아들이기만 하면 되었다"라고 표현할 만큼, 티베리우스의 경제 정책은 제정 로마의 튼튼한 반석을 다졌다.

광해군은 왜란 후 민생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세금을 현물이 아닌 쌀로 받는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당시로서는 획기적이었던 이 정책으로 인해, 세금 납부 과정 속에서 발생했던 폐단이 줄어 백성들의 부담이 크게 줄었다. 그러나 이런 정책도 폐단 속에서 이득을 챙기던 사람들에겐 조직적인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비록 모두에게 환영받은 정책은 아니었지만, 이들의 업적은 대단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정책이어도 모두에게 환영받긴 힘들다. 그렇다면 이들이 동시대인들에게 악정을 펼쳤다는 말을 들었던 것은 단순히 정책 문제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들이 정통성이 없는 지도자란 사실 때문에 악평을 받았던 것일까? 아니면 그 시대 상황의 문제였을까? 티베리우스와 광해군의 주변 환경의 문제도 한몫하긴 했지만, 평가에 악영향을 끼친 이들의 명백한 실수 중 하나는 바로 인간 관리의 실패로 보인다.

인화(人和)에 실패한 지도자들

<로마인 이야기>에서 시오노 나나미는 티베리우스를 위선적인 행위 자체를 못하는 성격적 결함을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평가한다. 왜 위선적인 행위를 못하는 것이 결함일까? 오히려 위선이 나쁜 것 아닌가?

여기서 아우구스투스가 생각났다. 시오노 나나미는 아우구스투스에 대해 "카이사르에게는 없던 '위선'의 자질을 갖췄다"고 평가했다. 도덕적으로 위선이 옳지 못한 행동이지만, 세상을 살아가는 데 때론 상황에 따라 위선을 떨 필요도 있다. 특히 정치가들은 더 그럴 것이다. 비록 이런 행동이 남들에겐 속물이라 비칠지라도 말이다. 아우구스투스는 이런 '위선' 덕택에, 안토니우스와의 정권 다툼에서 승리하고, 카이사르와 같은 최후를 맞지 않고 무사히 제정 시대를 열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지나치게 물이 맑아도 물고기가 살 수 없다는 말처럼, 티베리우스도 정치를 하기 위해선 적당히 위선도 떨면서 살아가야 하지 않았을까? 최고 지도자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해 카프리 섬에 은둔한 일은 그의 큰 성격적 결함을 보여준다.

티베리우스가 자기 고집이 센 편이었다면, 광해군은 반대로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다. 왕세자 시절 광해군에게 권력 위기를 느끼던 아버지 선조의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했던 경험이 그의 성격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라도 역사가들은 분석한다. 아무튼 너무 소심하고 우유부단했기에, 그는 외교 문제에서 강하고 소신 있게 추진한 모습과는 달리 국내 문제에서는 몇몇 신하들에게 휘둘렸고 붕당을 원만히 다스리지 못하였다. 광해군이 임기 말에 등용한 서인들이 인조반정의 주축이 된 아이러니한 사건은 광해군의 인간 관리 실패를 여실히 보여준다.

티베리우스가 카프리 섬에 은둔한 것이 그의 결정적 실수였다면, 광해군의 큰 실수는 실추된 왕권에 불안감을 느껴 무리한 토목공사를 벌인 일과 신하들의 의견에 휘말려 폐모살제를 저지른 일일 것이다. 이것은 티베리우스와 광해군이 지도자로서 자신의 성격적 결함 극복에 실패하고 다른 사람들과 융화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 인화에 실패한 그들은 자발적 혹은 타인에 의해 쓸쓸히 섬에서 생을 마감했다.

올바른 지도자의 모습은 무엇일까

여론이 항상 옳은 것일까? 때론 잘못된 다수의 목소리에 휩쓸려 여론이 형성되진 않을까?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여론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잘못된 의견일지라도 그 사회성원들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물론 최고 지도자가 인기를 좇아 잘못된 여론에 휩쓸려 자신의 신념을 꺾거나 하면 안 된다. 하지만 때로는 국민이 자신들을 위한 정책임을 몰라주고 불평을 하는 그런 모순된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최고 지도자란 그 속에서 어느 정도는 그것에 맞춰가며 자신이 추구하는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나가줘야 하지 않을까?

티베리우스와 광해군을 후세는 높이 평가하지만 당대엔 실패한 지도자로 여겨졌기에, 결국 그들은 반쪽의 성공을 거둔 지도자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된다. 비록 그것이 그들을 둘러싼 환경의 문제가 컸더라도 말이다.

돌아보면 올바른 길을 갔음에도 주변 환경으로 인해 사라진 지도자는 많다. 15권의 <로마인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수많은 인물들 가운데도 그렇게 사라진 인물이 얼마나 많던가! 초기 로마의 그라쿠스 형제부터 서로마제국 최후의 영웅이라 불릴 만한 스틸리코까지! 업적에도 불구하고 환경이 죽음으로 몰고 간 인물들이 얼마나 많은가! 로마 제국의 제정 시대를 개막하며 '팍스 로마나'의 길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 '천재' 율리우스 카이사르마저 암살당하지 않았던가!

우리는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과거에 비해 급속도로 진화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실제론 별로 그렇지도 않은 것 같다. 이천년 전의 로마인의 삶의 모습이나 지금 우리의 삶의 모습이나 근본적인 것은 별반 다른 것 같지 않다. 지도자를 보는 관점도 마찬가지이다. 시대는 변해가도 사람들은 언제나 당대 지도자에게 좋은 정책 그 이상의 무언가를 바란다.

같은 의미에서 지도자에겐 좋은 정책을 베푸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필요하다. 그것은 정통성이나 사람을 끄는 매력, 카리스마 등일 것이다. 단순히 선정을 베풀었단 것만으로는 당대에서 좋은 지도자로 평가받기에 뭔가 부족한 것 같다. 물론 이런 평가엔 그가 산 시대 환경과 운도 작용할 것이다. 지금 이 시대에도 티베리우스와 광해군같이 후대에는 높게 평가받지만 현재는 혹평받는 지도자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모르겠지만.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만약 사후세계가 정말로 존재한다면, 서로 다른 시대에서 태어나 이미 역사 속에 사라진 인물들은 그곳에서 만나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만약 티베리우스와 광해군이 만나서 무수한 뜬소문과 악평에 시달리던 그들의 시대와는 달리 지금 그들을 높이 평가하는 현재를 본다면 과연 그들은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떤 얘기들을 나눌까?

덧붙이는 글 | 참고도서: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광해군> 

<로마인 이야기> 독후감 모집 응모.

덧붙이는 글 참고도서: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광해군> 

<로마인 이야기> 독후감 모집 응모.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5


#로마인 이야기 #티베리우스 #광해군 #정통성 #대동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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