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인프라, 동서양의 운명을 결정짓다

[로마인 이야기] 영웅 이야기 보다 더 인상적인 로마 가도(街道)

등록 2007.07.01 11:21수정 2007.07.04 0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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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의 손에 이끌려 로마를 찾은 초등학교 6학년 꼬마의 눈에 말로만 듣던, 사진으로만 보던 거대한 콜로세움이 들어왔다. 어린 시절 누구나 한번쯤은 읽어 보았을 필독서 <먼나라 이웃나라>를 통해 처음으로 로마제국을 알게 된 초등학생 꼬마에게 눈앞에 보이는 콜로세움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비록 12년 전의 일이지만, 난 아직도 그때의 느낌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로마 제국의 위대한 건축물은 어린 나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던 것 같다. 그리고 중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만난 <로마인 이야기>는 나에게 로마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갖게 해주었다. 그리고 누구의 추천도 아닌, 서점에 갔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 읽게 된 이 책은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영웅들의 등장, 그리고 완벽한 사회 인프라

로마제국 천년의 역사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한다. 마리우스와 술라, 역사상 가장 뛰어난 군인이자 정치가로 손꼽히는 카이사르, 팍스 로마나의 기반을 다진 아우구스투스와 그 뒤를 이은 현명한 다섯 황제들, 그리고 이들과 함께 제국의 영광을 함께 한 무적의 로마 군단병들.

이들의 활약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야깃거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제15권 <로마세계의 종언> 편을 덮었을 때 내 머릿속에 깊이 남아 있던 것은 이러한 영웅들이 아닌, 로마 가도(街道)로 대표되는 로마의 사회 인프라였다. 로마 제국 천년의 역사는 이러한 사회 인프라가 제국 전역에 구축이 되어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 인프라를 통해서 로마는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다.

로마의 인프라만을 다룬 제10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를 읽으면서 특히 로마 가도에 대한 끝없는 동경을 가지게 되었다. 진정한 로마, 로마인을 알기 위해서라면 로마 가도를 살펴봐야 한다는 나의 생각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그리고 가도와 장벽의 건설은 서양과 동양을 대표하는 두 제국의 운명을 바꿔놓았다는 시오노 나나미의 말에 동의한다.

우연인지는 몰라도 로마 가도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할 즈음에 서울의 풍납토성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서 고대의 도로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나 설렘을 안고 달려간 유적 발굴 현장에서 본 고대의 도로는 로마의 가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조악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내 머릿속에는 한동안 '왜?'라는 의문이 떠나질 않았다. 그것은 로마의 선진성과 고대 한국의 후진성에 대한 것이 아니라 '왜 같은 사람이 만들었는데 이렇게 차이가 날까?'에 대한 것이었다.

그들은 갈리아를 비롯하여 한때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치열하게 대립했던 카르타고에도 가도를 건설했다. 가도는 로마인들의 자부심과 자신감이 표출된 산물인 셈이다. 일찍부터 사회 인프라의 중요성에 눈을 뜬 로마인들에게 광대한 제국은 그들의 자부심과 자신감을 멋지게 그려낼 수 있는 넓고 좋은 도화지였다. 산과 강은 그들에게 아무런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의 기교를 더욱 멋지게 부릴 수 있게 도움을 주는 요소였다. 그리고 산을 뚫고 강을 가로질러 건설된 가도를 통해 진행된 속주에 대한 그들의 로마화 정책은 어디가 본국 이탈리아고 어디가 속주인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완벽하고 섬세했다.

로마인들은 속주와의 대결보다는 타협과 동화를 원했고 속주민들도 이러한 로마인들의 로마화 정책을 환영했다. 물론 일부는 거부했겠지만. 로마인들은 그들의 '진정한' 영역이었던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 말고도 '새롭게 편입된' 속주에까지 수도 로마에 버금가는 완벽한 사회 인프라를 구축해 놓았다. 그리고 가도를 통해 속주민들과 교류하고 가도를 통해 로마화가 진행되었다. 이것이 로마가 천년이라는 장구한 역사를 가질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중국을 비롯한 한반도에서 로마의 이러한 사회 인프라 시설이 발견된 예는 극히 드물다. 물론 나라의 중심이 되었던 수도에서는 이러한 흔적이 발견되지만 그 외의 지역에서는 사실상 전무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 그럴까? 로마와 마찬가지로 동양도 주변국들과의 전쟁을 통해서 성장했고 발전했다. 여기까지는 양쪽 모두 같은 길을 걸어온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결과는 달랐다.

로마가 천년에 이르는 장대한 역사를 지속한 반면, 역대 중국의 왕조는 400년을 넘지 못했다. 끊임없는 외부 민족의 침략과 분열 속에서 중국의 왕조는 건국 초의 강대한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하나 둘 사라져 갔다. 주변국의 중국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로마가 로마화를 통해 대제국을 이룬 것과는 달리 중국은 그러지 못했다. 넓은 영토를 가졌던 것은 로마나 중국이나 비등했다. 중국이 더 넓었다 해도 육로를 통한다면 어디든지 갈 수 있었던 곳이 중국이다. 지중해를 제집 드나들듯 했던 로마인이었지만 안전성에 있어서라면 육로가 해로보다 안전한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사막이 있었고 험준한 산맥이 가로막고 있었다고 하지만 로마에도 북아프리카의 사막이 있었고 험준하기로 소문난 알프스와 피레네 산맥이 있었다.

결국 차이는 양쪽이 가지고 있던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거미줄처럼 건설된 가도를 비롯한 사회 인프라가 바탕이 되어 제국 전역이 고루 발전하여 일정 수준 이상의 경제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로마에 비해 중국은 사회 인프라 구축을 통한 제국의 효율적 통치에 무심했다. 중국 역대 왕조의 지도자들이 인프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다. 적어도 수도를 비롯한 도시 유적에서는 그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통치에 있어서 사회 인프라가 우선순위가 아니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도로는 교류를 촉진시키지만 그것이 도성 내에만 존재했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특정 지역 내의 교류만을 위한 도로라면 그것은 도로가 가진 가장 큰 장점이자 목적을 절반 이상 상실한 것이 된다.

거리의 차이는 있지만 베수비오 화산의 폭발 소식을 2일 만에 들을 수 있었던 티투스 황제와 서울에서의 부산까지의 왕명 전달에 보름이 걸린 조선의 예는 잘 정비된 사회 인프라가 어느 정도의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는지 극명하게 보여준다. 결국 이러한 사회 인프라에 대한 인식의 차이는 동양과 서양을 대표하는 국가의 운명까지도 결정지었다. 가도를 통한 속주의 로마화를 이루어 대제국을 건설한 로마와 장벽을 쌓아 기존의 영토를 지키는 데에 급급했던 중국의 운명은 이렇게 갈리게 되었다.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도시국가에서 국가로 발전한 서양과 국가의 건국 이후 도시가 발전하게 된 동양의 차이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결국은 마인드의 차이라지만, 왜 동양에서는 사회 인프라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하지 못했는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로마 가도를 타고 갔던 나폴리

로마에서 버스로 나폴리로 이동했다. 기억은 가물가물하지만 아마 그 길이 로마 가도의 대표 격인 아피아 가도였던 것 같다.

로마 제국의 위대함은 넓은 영토에 있지 않다. 최초로 사회 인프라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실천에 옮겨 하나의 거대한 문화권역을 형성한 데에 그 위대함이 있다. 이천년의 세월을 견디고 여전히 사용이 가능한 가도와 수도교로 대표되는 로마의 사회 인프라 구축은 또한 그것이 수도 로마와 본국 이탈리아에 국한되지 않고 제국 전역에 건설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로마는 오늘날의 우리에게 충분히 많은 것을 전해주고 있다. 천오백년 전에 사라져 버린 과거의 제국이 아닌 오늘날에도 함께 살아 숨 쉬는 현재 진행형의 제국으로 로마는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고고학을 공부하는 입장에서 겨우 흔적만을 찾을 수 있는 우리나라의 유적보다는 거대한 석조 건축물을 통해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로마의 유적을 보는 것이 더욱 가슴 설레는 일이라는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여전히 내가 가야할 길은 한국 고고학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반드시 규모에 상관없이 한국 고유의 사회 인프라 시설을 발견하고 연구하는 것, 그것이 바로 <로마인 이야기>가 나에게 제시해 준 내 삶의 목표이자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진행 중인 나의 꿈이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루어 먼 훗날, '로마인' 아그리파와 함께 동·서양의 사회 인프라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일 나의 모습을 생각해본다.

덧붙이는 글 | <로마인 이야기> 독후감 모집 응모.

덧붙이는 글 <로마인 이야기> 독후감 모집 응모.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5


#로마인이야기 #인프라 #시오노나나미 #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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