팍스 아메리카나 속 '한국인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 로마인이 전하는 대한민국 지식인의 책임

등록 2007.07.01 10:33수정 2007.07.01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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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게도 예나 지금이나 '팍스'란 단어는 본의와 달리 수많은 민족에게 전쟁과 고통의 장을 제공하고 있다. 어쩌면 지배자를 위한 미사여구일 뿐 인간세상에선 완성할 수 없는 화두일지도 모르겠다. 한반도에선 팍스 코리아나는 고사하고 반쪽 난 평화로움조차 성히 유지할 수 없다 보니 답답함과 안타까움은 몇 배로 더하는 듯하다. 나라의 사정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몸뚱이 하나가 지금껏 누리고 있는 혜택은 과분하니 일말의 책임이란 것을 느끼며 <로마인 이야기>를 읽고 난 심정을 토로해 본다.

로마도 미국도 그들이 인지하는 곳엔 그들의 의지가 닿았다. 때론 부드럽고 달콤하게 다가오나 그 의지는 언제나 그들의 평화와 부를 위한 의지였으며, 목표에 닿는 순간 상대를 갈기갈기 찢어놓는 마수가 되었다. 이들의 의지 앞에 동등함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세상의 동등함은 의지와 의지가 마주 설 때 그 접점에서만 존재한다. 하나의 의지가 다른 의지를 압도하려 함에 공존은 색이 바랜다.

로마의 의지는 거침이 없었다. 카르타고로, 갈리아로, 게르만으로, 이집트로, 그리고 소아시아로. 스키피오가 안되면 카이사르가, 카이사르가 안되면 아우구스투스가, 아우구스투스가 안되면 또 그 다음이. 바다가 막히면 땅으로, 강이 막히면 산을 넘어. 그들의 의지는 굳세었고 뻗침은 용렬했다. 뺏긴 자, 배고픈 자 야만인이 되어 그 경계를 넘나들고 깨어있는 자 뜻을 세워 일어섰으나 로마의 창은 거칠게 그들을 잠재웠다. 미국은 그런 점에서 닮았다. 남미로, 유럽으로, 아프리카로 그리고 아시아로. 아비가 안되면 아들에게로, 정부가 안되면 기업이. 협상이 막히면 위협으로, 돈이 안되면 총으로. 그들의 의지는 뼈아프고 그 뻗침은 숨막히다. 그들의 거침없이 표출되는 의지 앞에 우리는 숨죽이고 있어야 했다.

로마가 그러했듯 패권국들의 지배는 교묘하다. 설상가상 미국은 로마보다 더욱 직설적이고 투박하다. 이데올로기 싸움에서 승리한 미국은 스스로가 마치 민주주의의 표제인 양 상대에게 원칙과 협의를 앞세워 제의한다. 하지만 그들이 벅찬 요구 아래 숨겨진 칼날은 날카롭다. 함께 하기 위한 카이사르의 보듬기도 인간의 본심을 꿰뚫는 아우구스투스의 아우름도 아닌 탐욕의 간특한 표출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의 원칙과 협의가 한계에 부딪히거나 뜻에 맞지 않으면 나에게 겨누지 말라던 총포를 서슴없이 겨누어 댄다. 참으로 무섭도록 할퀴어댄다.

로마와 미국이 패권 장악이란 동일한 목적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오늘날 미국은 안정과 융화를 넘어 철저히 이익집단에 의해 움직이는 생명체로 주리를 튼다. 한 명의 광기 어린 황제의 폭정이 아니다. 자본주의에 심취한 거대 이익집단의 거침없는 망동이다. 이 거대 집단들은 설령 미국에 숭고한 정신이 살아있다 해도 억제할 수 없을 무분별한 행동을 촉발한다. 전쟁을 일으키고 압박하며 잇속을 위한 먹잇니를 감추려 하지 않는다.

이런 팍스 아메리카나를 꿈꾸는 자들에 맞서 우리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팍스 코리아나를 꿈꿀 수는 없는 것인가! 슬프게도 난 팍스 코리아나를 꿈꿀 수 없다. 난 대한민국이 대등하게 일어서 목소리를 높일 날을 꿈꿀지언정 팍스 코리아나로 세상을 지배할 그날을 꿈꾸지는 못한다. 내가 안타까운 것은 동등하게 소리 내지 못함이지 누군가를 지배하지 못함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열강들은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대한민국이 대등하게 일어섬을 원치 않는다. 그것이 어떠한 방법이건 어떠한 연유건 간에 단단히 부여잡은 목줄을 쉬 놔 주려 하지 않는다.

로마의 도로와 하수도가 바다 건너 산을 지나 곳곳에 로마의 흔적을 새겼듯, 미국의 언어와 시스템은 우리의 삶 속 깊이 그들의 위용을 아로새기고 있다. 우리는 세계화, 자유화로 포장된 시스템을 하나의 거스를 수 없는 물결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언어와 시스템을 학습하고 무리 속에 군림한다. 여기저기서 따른다. 따르지 않는 자 부딪히고 부서진다. 그렇게 팍스 아메리카나는 만들어져 간다. 팍스 로마나를 위해, 팍스 아메리카나를 위해 시스템을 심는 것은 내 인식이 미치고 의지가 닿은 상대를 뿌리부터 바꾸는 가장 주효한 방법이었다.

수많은 자들이 로마를 다녀가고 수학했다. 그들은 부지런히 로마를 학습했고 제 나라로 충실히 옮겨갔다. 수많은 황제의 바뀜 속에서도, 그들의 어처구니 없는 분탕질 속에서도, 그 많은 반역 속에서도 로마의 숭배자가 있어 로마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팍스 로마나는 유지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수많은 사람들이 미국을 다녀가고 수학한다. 현대 문명 이기의 도움인지 문화적 평등의 꽃피움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이젠 왕족, 귀족의 자제가 아니라도 미국을 유람하고 배울 수 있다. 설령 미국을 다녀오지 않는다 해도 장님 코끼리 더듬듯 헤맬 필요도 없다. 벌거벗은 그들의 자유부터 엄격한 규율까지 무엇 하나 배움이 닿지 않는 곳이 없다. 배우는 자들의 부지런함은 이천년 전을 능가하고 옮김의 충실함 또한 모자람이 없다. 그러나, 이러한 배움이 무엇을 위한 배움인가? 누구를 위한 옮김인가? 이천년 전 로마 주변 수많은 약소국들이 로마를 배워 온 전철을 우리도 따라야 하는 것인가?

아니다. 우리는 로마인의 역사를 따를 수는 없다. 그것은 패권국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우주로도 여행가는 작금에 안될 것이 뭐가 있고 꿈꾸지 못할 것이 무엇 있겠냐마는, 로마인의 역사는 우리가 반추해야 할 역사이지 되밟아가야 할 길은 아니다. 미국은 위대한 로마를 닮으려 할 것이다. 카이사르나 아우구스투스와 같은 탁월한 지도자를 세우고 그가 영도하는 전대미문의 팍스 아메리카나를 만들고자 할 것이다. 미국 시민권 하나로 어디도 두려움 없이 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 할 것이다.

페르시아에 머물렀던 알렉산더보다, 갈리아에 그쳤던 카이사르보다 더 위대한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남미를, 아시아를, 유럽과 아프리카마저도 패권의 영역 안에 넣고 지배하게 될 그날을. 팍스 로마나의 정책은 이런 꿈을 꾸는 데 있어 미국에 좋은 지침일지 모르겠다. 팍스 로마나의 정책이 우리의 교본이 될 수 없다지만, 로마에 어설피 맞섰다 처참히 무너졌던 약소국의 역사 또한 우리의 길은 아닐진대.

맞서다 무너지는 것이 우리의 갈 길은 아니라 해도 살아 숨 쉬는 주체로 우리는 분연히 일어서야 한다. 하지만 일어섬은 미국과의 전면전을 의미함이 아니다. 그러한 응전은 기껏해야 책 한 권으로 기술된 한니발이 될 것이고, 대부분은 역사책의 몇 페이지로도 묶이기 어려울지 모른다. 우리의 일어섬은 대한민국만의 시스템을 만드는 것으로 표출되어야 한다. 이 점에서 일어서야 할 주체는 농민의 곡괭이가 아니고 노동자의 크레인이 아니라 이 땅의 지식인들의 정신이다. 나 자신에 대한 표현과 관계 맺음까지도 미국의 방식이 스며들어버린 지금, 우주와 인간에 대한 우리만의 심오했던 통찰도 오천원권 지폐 속에서 춤출 뿐. 회자되는 것은 온통 미국의 시스템과 언어다.

일어서야 할 지식인들에게 <로마인 이야기>는 분명 수많은 삶의 전형을 보여주며 우리 각자의 삶에 적용할 표본을 찾게 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유념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나 하나의 삶을 위한 영웅 찾기나 처세술 익히기를 넘어, 열강에 끼어 힘겨워하는 조국의 운명을 생각하며 지식인으로 행해야 할 책임의 준칙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로마라는 패권국의 역사가 우리의 역사는 될 수 없다 해도 로마 지식인의 준칙이 로마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면, 올곧은 대한민국의 시스템을 만들기 위해 배워야 한다. 물론 그 배움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배움이 아니라, 그들과 좀 더 당당히 맞서기 위한 배움이어야 한다. 그렇기에 그 배움의 시작도 끝도 무작정 따라함이 아닌 우리의 시각에서 행해져야 할 것이다. 이런 전제하에 이천년 전 로마인들이 우리에게 전하는 지식인의 준칙은 '독창성'과 '유연함'이다.

열강에 맞서기 위한 당당함은 바로 대한민국만의 '독창성'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오늘날 미국은 모든 분야에서의 진일보를 통해 세계 문명을 이끌기 위한 부단한 노력을 하고 있다. 인간의 먹거리에서부터 행동과 사고방식까지도. 독창성은 대상의 본질에 대한 숙고로부터 태어난다.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를 주창하듯 거꾸로 가고 뒤집어 보기를 해야만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대상이 처한 환경과 그 영향에 대한 면밀한 관찰과 숙고에서 나온다.

본질에 대한 숙고도 대상에 대한 깊은 관심과 면밀한 관찰도 나를 벗어날 수 있을 때 더욱 명확해진다. 카이사르가 말하듯 인간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을 보려 하기에 더욱 어려운 것일지 모른다. 독창성은 남과 똑같은 방식으로 나를 메우는데 그쳐서는 완성될 수 없다. 내가 부족한 것에 대해 다른 것을 보고 배우겠다는 타산지석만으론 그들과 대등해질 수 없다. 누구도 보려 하지 않는 것을 보고 행할 때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다음은 '유연함'이다. 재차 언급하지 않아도 될 만큼 로마인은 복속한 지역의 민족을 보듬고 수용함에 탁월했다. 그렇다면 패권국이 복속한 국가들을 수용하듯 우리도 패권국의 문화를 온몸으로 수용하면 되는 것인가? 달라야 한다. 유연함이란 '원칙 속 예외의 인정'이다. 원칙 없이 이것저것 받아들여 갈팡질팡하는 것을 우리는 유연하다 하지 않으며, 원칙이 있다 하여 모든 것을 원칙 아래 독선적으로 포섭하는 것을 유연하다 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의 원칙이란 무엇이 되어야 할까? 로마가 로마시민과 형제국의 안위에 대한 보전이었다면, 미국은 미국시민의 안위에 대한 보전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필요한 대원칙은 대한민국 국민의 안위에 대한 보전이 최우선이 되어야 함이 당연하다. 그러한가? 그 어디에도 대한민국 국민의 안위는 없다. 열강과 동등하게 맞서려 한다면 로마가 로마의 시민을 보호했듯, 미국이 미국시민을 보호하듯, 대한민국은, 대한민국 지식인은 한국인의 권익이 최우선 되어야 한다.

여기에 유연함을 위한 예외의 인정이 따라야 한다. 대한민국의 권익이라 하여, 타국인의 권익을 위협해서라도 이익을 누려야 함을 말하는 자 있다면 답변을 생략한다. 동등함이란 자고로 남을 해치는 법이 없을 테니. 타국의 권익에 대한 인정은 앞을 내다볼 때 가능하다. 카이사르가 그러했고, 아우구스투스가 그러했듯 세상과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갖고 앞날을 생각할 때 당면한 하나를 버리고 미래의 둘을 얻는 여유를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았다. 미국의 패권 앞에 당당하고 대등한 대한민국도 하루아침에 만들어질 수 없다. 로마의 원로원이 행한 노블리스 오블리제는 금전적인 기부에 그쳤던 것이 아니다. 부아가 끓는 속을 달래기 위한 환금(換金)이 아니라 일상에서 그리고 전장에서 실천하는 지성으로 앞장서는 시원한 속 뚫림이었다. 로마인들이 대한민국 지성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도, 혼탁한 시대에 군웅 만들기가 아닌 독창적인 대한민국만의 시스템을 유연히 적용하라는 것이리라.

잊지 말자. 우리에게도 기회가 있다. 15권의 <로마인 이야기>가 아닌 세계 어느 국가와도 동등하게 맞선 <한국인 이야기>를 만들어 갈 기회가.

덧붙이는 글 | <로마인 이야기> 독후감 모집 응모.

덧붙이는 글 <로마인 이야기> 독후감 모집 응모.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 1995


#로마인 이야기 #지식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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